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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자 : 1855년 5월 20일 주일 아침

■ 설교 장소 : 영국 런던 스트랜드(Strand) 북쪽에 있는 엑서터 홀(Exeter Hall)

■ 설교자 : THE REV. C. H. SPURGEON

■ 설교 제목 : 복음의 두 가지 작용, The two effects of the gospel

■ 본문 참조 사이트 : https://www.spurgeongems.org

■ 설교 내용 :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오?

고린도후서 2:15-16"

 

이 말씀들은 바울이 바울 자신과 그의 형제들인 사도들을 대표하여 말하고 있는 것으로, 성령으로 택함을 받고 확증되어 주의 복음을 전하도록 포도원에 들여보내진 모든 이들에 관련한 것입니다. 저는 같은 장의 14절을 묵상하며 자주 감탄해합니다. 특별히 이 말씀들이 어떤 사람의 입에서 나왔는지를 기억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나이 든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죽을 자로 끌려갔던 사람이고, 큰 고난을 받았으며 모든 박해의 바다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그의 사역을 마치며 했던 말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파선했을 때 승리하고, 채찍질을 당할 때 승리하고, 갇혀 있을 때 승리하고, 돌에 맞을 때 승리하고, 세상의 조롱 가운데서 승리하고, 도시에서 쫓겨나 신발에서 먼지를 털어 낼 때 승리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때에 승리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몇몇 사역자들은 그렇게 말하면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의 박수를 즐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편하게 갈 수 있습니다. 자신들을 존경해 주는 사람들도 있도 그들을 공개적으로 대적하는 적도 없습니다. 개들도 꼬리를 치며 반겨하고 모든 것이 안전하고 즐겁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작은 일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바울과 같은 사람, 즉, 짓밟히고, 시련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했던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신성함에 대해서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자매 여러분, 바울이 자신의 모든 고난 가운데 자신의 마음에 적용한 이 위로는 얼마나 감미로운지요! 그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신다"하는 이 생각으로 사역자는 자신의 머리를 베개에 둘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자신의 생애가 끝나면 눈을 감을 수 있고, 또 "나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 이것으로 천국에서 눈을 뜰 수 있습니다. 그다음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오늘의 본문입니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복음이 모든 곳에서 감미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마다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그 사역의 성패에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오?" 복음을 전하는 사역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 아주 무거운 것임을 사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I. 첫 번째로 말씀드릴 것은 복음이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뭔가 이상한 것 같지만 세상에서는 좋은 것에는 늘 악한 결과도 있기 마련입니다. 태양을 밝게 비추어 보십시오.  그러면 초는 녹지만, 반대로 점토는 굳어 버립니다. 열대우림에 빛을 넘치도록 부어 보십시오. 그러면 초목은 아주 풍성해질 것입니다. 풍성하고 좋은 열매가 맺힐 것이며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알듯이 그곳에는 험악한 파충류와 독사들도 나오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세상을 향한 바로 그 의의 태양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인류에 부여한 광대한 양의 유익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복음이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다고 복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받지 않는 사람들의 잘못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마음을 열고 그것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다만, 진리를 미워하고, 경멸하고, 비웃고 복음의 진보를 비웃는 이들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인 것입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다루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1. 복음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무엇인지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존 베리지(John Berridge)는 한 마을에서 도덕을 설교했었는데 결과적으로 그 마을에서 도덕적인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도덕을 강조하는 설교만큼 도덕성을 망가뜨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수단으로써 선행을 설교하고 거룩을 권고하는 것은 신학적으로는 아주 좋은 것이지만, 실제로 현실에 적용해 보면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심지어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됩니다.

 

이 사실은 곳곳에서 확인됩니다. 제 생각에 토마스 차머스(Chalmers) 조차도 하나님을 알기 전 오랫동안 그렇게 해온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도덕과 계율만을 설교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술주정뱅이에게 술 취함의 해악을 보여준다고 술주정뱅이가 달라지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욕쟁이에게 죄의 심각성을 말해준다고 욕쟁이가 욕을 멈추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주의 크신 사랑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 전까지는,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명확하고 완전하며 능력 있는 복음을 전하기 전까지는 그는 사역의 성공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전하자, 수많은 술주정뱅이들이 술잔을 내려놓았으며, 욕쟁이들이 악한 말을 하지 않도록 그들의 입술을 제어했으며, 도둑들은 정직한 사람이 되었고, 불의한 자들과 경건하지 못한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렇지만, 앞서 제가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복음을 듣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복음이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거나 그리스도께 붙들려 있게 함으로써 최선을 결과를 산출함에도 불구하고, 이 아침 제가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를 엄청나고 엄숙한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선대신 악을 낳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것이라는 점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i.) 첫 번째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자신들의 죄 가운데 강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들 가운데 몇몇 교회 다니는 죄인들이 최악이라는 것은 아! 아주 끔찍하고도 엄숙한 사실입니다. 죄에 가장 깊이 빠지고, 도무지 양심이 동작하지 않으며 가장 강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신실한 사역이 그들을 찌르고 사도들의 단호한 꾸짖음이 그들을 흔들 수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때로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렇지만, 제가 지금까지 사람들을 보아온 결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들어 버리고, 하나님의 진리조차 사단을 위하여 들러리로 만들며, 자신들의 죄를 덮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충만하게 은혜의 교리를 듣는 사람들 중에 그러한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는 택함 받은 사람이므로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이므로 제가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됩니다" 저는 술집 탁자 위에 서서 잔을 든 채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 중 누구보다 더 많이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의 귀한 보혈로 구속받은 자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는 그는 손에 있던 맥주를 마저 마시고 사람들 앞에서 사악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노래들을 부르며 다시 춤을 추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에게 복음은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인 것입니다. 그는 진리를 듣지만 그것을 왜곡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들을 받지만 무엇을 하든 그것과 함께 스스로 죽습니다. 복음의 비밀을 열라고 주신 그 칼을 자신의 심장에 박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 중에서 가장 정결하고 모든 도덕 중에서 가장 숭고한 그것을 그는 자신의 사악함에 맞추어 자신의 악독함과 죄를 쌓는 발판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도 그 사람과 같은 이들이 있을까요? 여러분이 말하는 대로 복음을 듣기는 좋아하면서도 여전히 정결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앉아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여전히 마귀의 종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알아두십시오, 이들은 거짓말쟁이이며 외식하는 자입니다. 진리가 그들 안에 전혀 없습니다. "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계속적인 죄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유다서 1:4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그러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최선을 다해 예수님께 가까이 있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마태복음 7:16, 18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계속해서 복음을 악으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들은 복음을 스스로의 죄악을 덮는 변명의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에 더 큰 죄를 짓습니다. 저는 왜곡된 복음보다 더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기 쉬운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왜곡된 진리는 모두가 잘못된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쁩니다. 사람에게 불이 가장 유용한 것 중에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화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최상의 것인 복음도 가장 악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ii.) 그런데,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마지막날에 어떤 사람들에게도 그 형벌을 더 강하게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말하는 저 자신도 놀라는 일인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지옥이 더 뜨겁게 만들 것이라고 감히 말하는 자체가 끔찍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계 7:9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회복시키시며 "이사야 45:17 여호와께 구원을 입어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복음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에 대한 형벌을 더 끔찍하게 만들 것입니다. 왜 그런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사람들은 더 큰 빛에 대하여 죄를 짓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빛은 우리 죄의 훌륭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배워온 바에 의하면 이단들이 범법 함 없이 할 수 있는 것들 중에는 제게는 가장 큰 죄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런던에서는 처벌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죄라고 하셨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큰 죄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이 저에게는 최고의 범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려서부터 경건하도록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처럼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그런데, 그 빛 가운데서 길을 잃는 사람은 방랑자가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구덩이 빠지면 우리는 그를 안타깝게 여깁니다. 그렇지만, 눈동자에 빛을 가진 사람이 절벽에서 스스로 뛰어내려 자신의 영혼을 버린다면 그에 대한 어떤 동정심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저들은 깊고 깊은 저 지옥을 어떻게 감당하려나
거기에는 기쁨은 찾아볼 수 없다네
저들이 대면할 심판의 굴레는 무엇인가,
그 누가 전능자의 사랑을 비웃는가!"

 

여러분 모두에게 말씀드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주로 찾지 않으면 그것은 여러분의 정죄를 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핵심이고, 빛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빛에 따라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 자체가 정죄가 될 것입니다. 죄의 병균처럼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3:19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또한, 만약 여러분이 복음에 대적한다면 그것은 분명 여러분의 정죄를 더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긍휼의 체계를 사람이 무너뜨리려 한다면 그 죄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빌라도, 헤롯과 유대인들이 지은 엄청난 죄를 누가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치던 사람들의 운명을 누가 그릴 수 있을까요? 대충이라도 그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역자를 욕하는 사람, 주의 백성들을 비방하는 사람, 주의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 할 수만 있다면 경건한 이들을 이 땅에서 멸절시키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만한 지옥의 뜨거운 곳은 어디일까요? 아! 주여 불신자들을 도우소서, 신성모독자들을 도우시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최소한 저는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그냥 두시겠습니까? 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저주했습니다. 그분을 허풍쟁이라 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스스로 거짓임을 알면서도 복음이 거짓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음란한 말을 내뱉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저기에는 더 나쁜 것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욕하며 그들의 불완전함을 조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던 이들이 주님 앞에 오면 주께서 그들의 손을 잡고 "언젠가 너희는 내 일꾼에게 개라고 욕하며 침을 뱉었으니 내가 너희에게 천국을 주겠다!” 그러실까요?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사하여지지 아니하였다면,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실까요? "저주받은 자여, 네가 비웃던 지옥으로 가라. 네가 멸시하던 이 천국을 떠나라. 너는 하나님이 없다고 했지만, 이 오른팔이 너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교훈을 영원히 가르쳐 줄 것이다. 내 긍휼 가운데 깨닫지 못한 자는 나의 심판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떠나라!"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르는 것은 그들의 심판을 키울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이 사실상 많은 이들에게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라는 것이 참으로 엄숙한 시각 아닙니까?

 

(iii.)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리면, 저는 복음이 이 세상에 사는 어떤 사람들을 다른 이들보다 더 비참하여 만든다고 믿습니다. 술꾼들은 "요한계시록 21:8 모든 술꾼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하는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더 큰 즐거움으로 술을 마시고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출애굽기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안식일에 더 마음대로 했을 것입니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와 같은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방탕한 사람들은 얼마나 더 행복해하면서 자유롭게 미친 짓을 더 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만, 진리는 그들의 잔에 쓴 것을 담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그들의 영혼의 흐름을 얼어붙게 만듭니다. 복음은 이집트인 축제의 해골과도 같습니다. 낮에는 그것을 보고 웃었지만, 밤이 되어 어둠이 그의 주위를 감싸면 작은 소리에도 두려워 사시나무 떨듯이 떱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비참한 자신의 존재를 곱씹게 될 뿐입니다. 스스로에게 유익이 되기는커녕 그가 누리던 즐거움은 영원히 망쳐졌습니다. 그에게 속삭이던 주의 사랑과 긍휼은 더 이상 천둥소리 보다도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그것을 경멸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복음 아래서 그런 비참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압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 복음이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라니 정말 끔찍합니다.

 

이 자리에는 그런 분들이 얼마나 계실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스스로에게는 저주가 되는 그런 사람이 누구란 말입니까? 진리의 소리에 마음이 굳어지는 사람은 누구란 말입니까? 말씀을 받는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이지만 왜 그것을 믿지 않는 불신자 모두에게는 저주이고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일까요?

 

2. 그렇지만, 감사하게도 복음에는 두 번째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기도" 하지만, 복음은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이기도 합니다. 아!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중에는, 이 아침 허락되다면 복음이 생명으로 이르는 냄새가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그 시간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시내산의 천둥소리도 헛되고 파수꾼의 경성함도 허사였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죄로 인하여 죽음과 같은 깊은 잠 속에 빠져들어 있었습니다. 천사들도 우리를 깨울 수 없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처음으로 성소의 벽안으로 들어가 긍휼의 음성을 들었던 때를 기쁨으로 돌아봅니다. 여러분 중에 일부는 단지 몇 주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그분 어디에 계신지, 누구인지 압니다. 몇 주 전 몇 달 전만 해도 그분도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멀리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복음이 "생명에 이르는 냄새"였던 때를 돌아보실 수 있습니까? 죄를 버리고 정욕을 포기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켰던 때 말입니다. 아! 그때를 생각하면 그 어떤 때보다도 감격이었습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사오십 년 동안 완전히 듣지 못하던 한 분을 압니다. 어느 날 아침 그가 집 앞에 앉아 있는데 차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음악이 들려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리는 음악이 아니라 자동차 소리였습니다. 그의 귀가 갑자기 열리며 거친 소음을 천국의 음악처럼 느꼈던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처음 들었던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말씀을 듣도록 우리의 귀가 열린 그 첫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에 대한 확신을 가진 순간이지요. 그 순간만큼 말씀을 잘 들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전만 해도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돌아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내가 누렸던 평화로운 시간들이여!
그 기억들은 여전히 감미롭도다!"

 

복음은 처음에 우리 영혼에 생명에 이르는 냄새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복음이 생명에 이르는 냄새였다면 그것은 언제나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사망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아니라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 저와 대척점에 있는 알미니안주의자들에게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때로 복음은 사망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사람은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도 있지만 여전히 영원히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사람이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이후에 다시 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어깨에 죄의 짐이 얹힐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 거듭난 사람이 여전히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 내일이면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바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 저는 그런 거짓 교리를 참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믿게 두십시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변치 않는 사랑을 깊이 확신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는 믿는 사람이 지옥에 가야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에서 오래 머물지 않으시고 곧 이렇게 외치실 것입니다. "그 사람을 구조하라! 구조하라!"

 

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석이 하나 빠진 면류관을 쓰시며 영광중에 계시고, 사탄이 지옥에서 그 보석을 가지고 있다면 사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이고! 빛과 영광의 왕이시여, 제가 당신의 보석 중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은 보석을 들어 올리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 당신은 이 자를 위해 죽으셨지만, 당신은 이자를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당신이 한때 그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이 변해 나중에는 그를 싫어하셨으니 그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속으로 얼마나 하늘의 상속자를 비웃어 댈까요?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말합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 값으로 사셨었지요." 그리고는 지옥으로 던져버리셨습니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값으로 사셨던 사람,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자로부터 어떻게 훔쳐 왔는지 보십시오!" 그리고는 다시 말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용서받았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보십시오! 이 사람은 용서받은 이후에 징벌받은 것입니다." 사탄은 악의에 찬 즐거움으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의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지만, 저는 이 사람을 나중에 데려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두 번 벌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아! 아니지요. 사망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아니라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악한 거짓 복음은 가라고 하십시오. 전하고 싶은 곳에 가서 맘대로 하라고 하십시오. 그렇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내 양에게 영생을 주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그 양들에게 곧 잃어버릴 생명을 주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는 보통 이 주제를 다루게 되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견인에 관한 교리보다 중요한 교리는 거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자녀 중 한 사람이라도 버려진다면, 또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제가 안다면, 저는 즉시로 여러분 모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복음의 기쁨과 행복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복음은 핵심이 없는 껍데기입니다. 열매가 없는 껍데기이므로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알아서 가져가라고 하십시오. 우리는 그들과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가서 자신들의 것을 전하라고 하십시오. 가서 불쌍한 죄인들에게 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결국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전하라고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용서하실 것이지만 결국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실 것을 전하라고 하십시오.

 

가서 자신들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시오, 누가 그것을 듣겠습니까? 들어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만약 제가 회심한 이후에도 회심하기 전과 다르바가 없는 상황이라면 저에게 회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한번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그분 안에 영원히 있네
그분의 사랑은 그 어떤 것도 끊을 수 없네"

 

이것은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를 뿐만 아니라 영원히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가지 모든 이는 다음 생을 받을 것입니다. 시편 84:11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야 하지만 주님께서 이것을 취하셔서 이 아침 주의 말씀을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로 삼으신다면, 저는 제가 드린 말씀으로 충분히 기뻐할 것입니다.

 

II. 저희가 두 번째로 다룰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그 사역의 성패에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역자는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했는데도 한 영혼도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래도 왕께서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실 것입니다. 만약 제가 메시지를 전하였지만 듣는 사람이 없더라도 주께서는 "네가 선한 싸움을 싸웠으니 네 면류관을 받으라"라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고린도후서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것은 복음 사역자가 성경에서 무엇이라 불리는지 말씀드리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성경에서는 복음사역자를 대사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대사는 어떤 책임이 있습니까? 그는 전권대사로 한 나라에 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회의에 평화안을 올리고, 나름의 재능을 사용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전쟁은 여러 나라의 발전에 해롭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평화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만, 다른 왕들은 거만하게 무시해 버립니다.

 

그가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보낸 이가 "왜 평화를 이루지 못했느냐?"라고 물으면 그는 "저는 평화안을 올리고 설득했지만, 아무도 동의하지 않더군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대사를 보낸 이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구나. 너는 너의 할 일을 했다. 그러므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너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또한, 복음 사역자들은 성경에서 어부라고도 불립니다. 어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부는 그가 잡는 물고기의 양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다만, 그가 물고기 잡는 방식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몇몇 사역자들을 보면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물고기를 잡아본 적도, 그물로 물고기를 끌어모으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평생을 비단 낚싯줄과 금바늘 은바늘로 낚시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항상 고상한 문장들을 구사하지만, 물고기는 그런 것들을 물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저희는 더 거친 도구들을 가지고도 수백을 건져 올렸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그물을 적절한 곳에 펼치기만 한다면, 비록 우리가 잡은 것이 없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탓하지 않을 실 것입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어부야! 고생했다. 폭풍이 부는데도 그물을 던졌더냐?" "예, 주님" "무엇을 잡았느냐?" "한두 마리뿐입니다" "음, 그렇구나. 내가 너에게 여럿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너의 잘못은 아니다. 오직 내가 원하는 곳에 주기도 하고, 주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너는 열심히 일했으므로 너의 상이 있을 것이다."

 

또한, 사역자들은 씨 뿌리는 자로 불리기도 합니다. 어떤 농부도 씨 뿌리는 사람이 수확의 결과에까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의 책임은 씨 뿌리는 것에 국한될까요? 그리고 그는 좋은 씨앗을 뿌리나요? 만약 그가 좋은 땅에 씨를 뿌렸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씨가 길가에 뿌려져서 새들이 먹어 버렸다면 누가 농부를 탓하겠습니까? 그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는 그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는 씨앗을 흩뿌렸을 뿐입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분명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사역자가 그의 어깨에 곡식단을 한단 메고 천국에 들어간다면,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 추수하는 일꾼이구나! 전에는 씨 뿌리는 자였지! 너는 어디에서 그 곡식단을 얻었느냐?" "주님, 저는 바위에 씨를 뿌려서 자라지 못했는데, 어느 주일날 아침, 바람에 씨앗 하나가 조금 날아가더니, 준비된 마음에 떨어져서, 제가 이렇게 곡식단 하나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천사들의 합창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는 바위에서 얻은 한 단이 좋은 땅에서 얻은 천 단보다 영광이라네, 그러므로 그도 비옥한 땅에서 많은 수확을 거둔 자처럼 보좌 근처에 앉게 하라." 저는 만약 영광의 등급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행한 노력의 진실성에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사역자로서 옳은 의도를 가지고, 마음을 다하여 옳은 일을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면, 비록 결과물을 얻지 못했더라도 우리는 주님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천국에서 얼마나 더 행복할지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다니엘 12:3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저는 이런 장면을 생각하면 항상 기쁨이 넘칩니다. 언젠가 천국에 들어간다면 천국문이 열리고 천사가 날아와 저의 얼굴을 바라볼 것입니다. 저는 미소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 엎드려 주 앞에 절을 드립니다. 제가 주께 예를 드리고 있을 때 한 모르는 사람이 날아와 저에게 말을 건넵니다. 만약 천국에 눈물이 있다면 저는 분명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형제님, 저는 형제님에게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형제님에게서 처음으로 제 죄에 대한 경고를 들었습니다. 결국 저는 여기에 있고, 형제님은 제 구원의 도구셨습니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속량 받은 영혼들이 이어져 들어옵니다. 속량 받은 영혼들입니다. 각 사람은 별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에 있는 또 다른 보석입니다. 또 다른 영광이고 또 다른 찬양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주안에서 죽은 자들은 축복이로다, 그가 행한 일이 그를 따를 것이니라.

 

만약 천국 면류관의 가치가 구원받은 영혼들로 평가된다면, 자금 여기에 계신 몇몇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 중에 몇몇은 별 하나 없는 천국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별이 없는 천국 면류관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천국에서 별이 없는 면류관을 쓴 사람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한 사람도 구원을 얻게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그 사람은 가능한 한 행복하게 천국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 별 하나 없이 천국에 있다니요!

 

어머니들이여! 여러분의 자녀들 중에 그 누구도 천국에서 여러분의 이마에 별을 붙여줄 사람이 없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사역자들이여! 여러분들이 아무리 유창한 설교자가 되었다고 해도 여러분에게 별이 없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작가들이여! 여러분이 밀턴과 같은 글을 썼더라도 별 없이 천국에 있다면 좋겠습니까? 저는 우리가 이것에 관심을 거의 두지 않는 것이 두렵습니다.

 

사람들은 도서관에 영원히 꽂혀서 자신의 명성이 이어질 수많은 책을 쓸 것입니다. 그렇지만, 천국에서 영원히 빛날 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싶다면 수고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수고를 마다하지 마십시오. "전도서 11: 1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소와 나귀를 부리는 자는 주께서 그의 택하신 자들을 부를 때 영광의 수확을 얻을 것입니다. 사역자는 그 사역의 성패에 책임이 없습니다.

 

III. 그럼에도 결국 복음을 전하는 것은 높고 엄숙한 일입니다.

 

사역은 너무 흔하게도 직업으로 전락해 왔습니다. 요즘에는 강단에 설 마음은 없었지만 좋은 선장이 될 만 사람들이나 접수처에서 잘 기다릴 만한 사람들을 뽑아서 사역자로 만듭니다. 사람에 의해 선택되고 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어느 정도까지 교육을 시켜서 예복을 입고 나오면 사람들은 그를 목사라고 부릅니다.

 

저는 그들 모두에게 주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신실한 조셉 아이언은 이렇게 말하곤 했죠 "주께서 그들 중 많은 이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의 혀가 붙들어 지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만든 사역자는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빨리 없어질수록 좋습니다. 그들의 방식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원고를 아주 주의 깊게 준비하고 주일날 가장 감미로운 목소리로 그것을 읽어 내려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뻐하며 떠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설교 방식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방식으로 한다면, 저는 영원히 설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설교 원고는 돈을 주고 살 수도 있습니다. 이전에 50번 이상 전해졌던 설교라면 아주 작은 돈으로도 살 수 있습니다. 만약 처음 사용하는 것이라면 조금 더 비싸겠죠. 그렇지만, 그것은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일부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이들의 놀이도 누구나가 벌일 수 있는 사업이나 거래도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먼저 자신이 엄숙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성령 안에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가 말할 때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말하게 하시는 것을 말하는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강단에서 내려와 바로 나가야 합니다. 비록 삶은 자신의 것이라 해도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지 않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편 50:16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운 게 뭐가 있습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글쎄요, 바울도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오?"라고 했을 정도로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말씀을 전할 때 스스로의 편견에 휩싸이지 않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강력한 책망을 말하고 싶은데, 마음속에서 "이것 보세요, 그렇게 하면 자신을 정죄하게 될 것입니다"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면, 그런 책망은 하지 않고 싶은 유혹이 생기는 것이지요.

 

또 다른 시험은 교인들 중에 부유한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몇몇 사람들은 기분이 상하고 그 교리를 받아들이지도 않을 텐데, 그냥 두는 게 나을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오늘은 "호산나"를 외칠 수도 있겠지만 내일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역자의 마음에 작용합니다. 그도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므로 그런 것을 느낄 것입니다. 때때로 날카로운 비판의 칼과 그와 그의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쏜 화살이 그를 향해 날아오고 그는 그것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갑옷을 입고 "나는 너희 악을 개의치 않는다"라고 외칠 수 있지만 활 쏘는 자들은 요셉마저도 깊은 슬픔에 빠지게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나와서 스스로를 방어하지 않는다면 그는 또 다른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정말 어리석은 자입니다. 독수리가 재잘거리는 참새들에 개의치 않고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자칼을 내버려 두는 것처럼 비방하는 자들은 그냥 내버려 두는 바로 그 사람이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위험은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를 바로 잡기 원하다는 것입니다. 오! 그 누가 이런 위험한 바위들로부터 벗어나기에 충분할까요?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이러한 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바로 굳게 서서 주일이나 평일이나 매일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로 말씀드리고 결론을 내리자면 복음이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이고 사역자의 일이 엄숙한 일이라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일까요.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오" 했는데 바로 이들입니다. 제가 자주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듯이 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저의 기도노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저를 끔찍한 상태로 두는 것일 것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세상이 멸망하는 날은 아마도 기도로 하얗게 되지 않는 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역자가 진리에서 돌아서는 날은 아마도 그를 위한 기도가 끊어지는 날, 그를 위하여 은혜를 구하는 목소리 하나도 없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저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확신합니다.

 

주여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제 자리에서 볼 수 있었던 저의 자랑이자 영광이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제게 주소서. 월요일 저녁이면 하나님께 축복을 구하기 위해 함께 모였던 그 사람들을 제게 주소서. 그러면 저희는 저희를 반대하는 모든 대적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극복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한 우리의 모든 위험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도가 늘어나고 고상하고 고귀하신 분이 오셔서 제가 깨달음과 좋은 영향을 끼쳐도 기도하는 교회가 없다면 저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기도를 영원히 얻을 수 없을까요? 여러분은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실 것입니까? 우리의 수고는 이 위대한 장소에서 거의 끝날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성소로 행복하게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기도하기를 멈추시겠습니까?

 

저는 이 아침 여러분이 하셔야 했을 기도를 그렇게 많이 하시지 않은 것이 두렵습니다. 제가 두려운 것은 쏟아부을 수 있는 만큼의 풍성하고 진지한 기도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씩 경험했던 놀라운 능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책임을 여러분에게 돌리지도 않을 것이고 "그 사람들은 한때는 그렇게 열성적이었는데, 이제는 차갑게 식어버렸어!"라는 말을 듣도록 그냥 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세속적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 런던의 중심 서더크로 들어가지 못하게 합시다. 그것이 곳곳에 있다면 이곳 웨스트엔드에 처박아 두고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다니지 맙시다.

 

여러분 깃발을 들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어려운 자리에 있는지 아시고 "유다서 1: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웁시다.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그 사람 주위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수많은 대적의 공격에 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깃발을 든 자가 쓰러지면 완전히 무너질 수 있다.
단언컨대 그러한 치명적인 싸움이 없을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일어나셔서 여러분의 깃발을 붙잡고 그날이 올 때까지 단단하게 서 있게 하십시오.  지옥의 마지막 성이 정복되었을 때 우리는 그 성에 서서 외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전능하신 주께서 다스리시는도다!" 그날까지 싸워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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