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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자 : 1855년 5월 20일 주일 저녁
■ 설교 장소 : 영국 런던 스트랜드(Strand) 북쪽에 있는 엑서터 홀(Exeter Hall)
■ 설교자 : THE REV. C. H. SPURGEON
■ 설교 제목 : 미래의 축복에 대한 소망, The Hope of Future Bliss
■ 본문 참조 사이트 : https://www.spurgeongems.org
■ 설교 내용 :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 17:15"
복음이 복음의 친구들이나 대적들에게 가장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복음의 친구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복음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방 땅에서 복음을 전했고, 죽음을 무릅쓰고, 죽음의 공포 따위는 웃어넘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위험을 감수했으며 그들이 믿는 교리를 영화롭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대적들도 본의 아니게 적지 않은 일을 했습니다. 주의 대적들이 그리스도의 종들을 박해하자, 많은 이들이 먼 곳으로 흩어졌으며 그 흩어진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적들은 마치 약초를 찧는 것처럼 복음을 짓밟았지만 그럴수록 복음은 더 빨리 성장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적들에게 얼마나 많이 귀중한 부분을 빚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중의 상당수는 대적들이 그분께 대답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면 전혀 하시지 않았을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 대적들의 반대가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대답하신 그 귀한 말씀들을 전혀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대적들에게 엄청난 시험을 받지 않았다면, 적들이 그에게 화살을 쏘지 않았다면, 대적들이 다윗을 비방하고 욕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다윗을 깊은 고통 속에 밀어 넣어 그가 비참함 속에서 부르짖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윗이 직접 경험한 귀중한 증언들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정확무오하신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수많은 신뢰의 문구들, 그가 구원을 얻은 이후에 써 내려간 수많은 찬양들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적들이 분노에 가득 차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잃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대적들이 아니었다면 다윗은 시편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산의 자고새처럼 사냥당하고, 사냥개 앞의 겁먹은 사슴처럼 쫓길 때, 그는 잠시 기다렸다가 실로아 물에 몸을 담그고 언덕에 올라 숨을 가다듬습니다. 하늘 공기를 마시고, 서서, 지친 몸을 쉬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자기를 위해 승리를 거두어 주신 전능하신 여호와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오늘 본문은 대적들이 가져온 엄청난 환란들을 기술한 다음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미래의 축복에 대한 소망으로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야곱의 아들은 눈을 높이 들며 "나는"이라고 말합니다. 엔게디의 동굴 속에서 쫓기고 있는 무리의 우두머리가 "나는"이라고 말합니다. 한때는 양치기 소년이었으나 곧 왕관을 쓰게 될 사람이 "나는"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이 저녁 이 본문을 보면서, 우선은 본문의 정신에 주목할 것이고, 다음은 본문의 내용, 끝으로 본문에 있는 대조를 말하면서 설교를 마칠까 합니다.
I. 우선 이 말씀의 정신입니다. 저는 항상 어떤 사람이 쓴 글이나 설교의 정신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을 좋아합니다. 살펴보면, 사실 그들이 사용한 단어들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17: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이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정신은 무엇이라 해야 할까요?
첫째로, 시기심과 부러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정신입니다. 시편 기자가 악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던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시편 17:10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시편 17:14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그런데, 그들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부자여 네 부를 가지고 가라. 잘난 사람이여 네 자랑스러움을 가지고 가라. 행복해하는 이여 네 많은 자녀들과 함께 가라. 나는 너희들이 부럽지 않다. 내 것은 다른 것이다. 나는 너희의 소유에 대한 탐심 없이 너희를 볼 수 있다. 나는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가진 것들 중에는 내가 사랑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들의 세상 보물에는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는다. 나는 너희들의 반짝이는 먼지 더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게는 나의 구원자가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기쁨이 그에게는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즉 세상의 것들이 그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시선을 하늘로 향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오, 사랑하는 여러분, 시기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시기심은 피조물을 황폐케 하는 저주입니다. 만약 시기심의 바람이 불었다면 에덴동산조차도 황폐화되고 그 아름다움을 잃었을 것입니다. 시기심은 황금을 변색시키고, 은을 흐리게 합니다. 불타는 태양에서 시기심이 숨을 쉬면 태양의 불조차도 꺼질 것입니다. 시기심의 사악한 눈이 달을 향하면 달은 붉게 변할 것이고 별들은 놀라서 도망할 것입니다.
시기심은 저주입니다. 그렇습니다. 시기심은 사탄의 장자이고 악 중의 악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부하더라도 시기심이 있으면 아름다운 나무의 뿌리를 갉아먹는 벌레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행복하더라도 그가 다른 이의 것을 부러워하면 그를 행복하게 했던 것들은 그의 불행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이의 것보다 좋아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기심에서 자유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들로 만족하게 하소서. 이렇게 말하게 하소서 "당신들의 것은 당신들이 가지세요. 저는 당신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요. 나는 내 것으로 만족하오." 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주셔서 그들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게 하시고 그들이 더 가질수록 저도 더 기뻐하게 하소서. 그들의 촛불이 더 밝게 빛날 것이므로 저의 촛불은 그다지 밝게 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웃들이 잘되는 것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기쁨을 함께 기뻐할 수 있고 그들의 기쁨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때 내 주위의 모든 것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입니다. 시기심과 부러움! 오 주여 우리를 시기심과 부러움에서 건져 주소서.
그렇지만, 사실 우리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뭔가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만큼 어떻게 하면 시기심을 잘 없앨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보면서 "시편 17: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을 시기하거나 부러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진 것들은 우리의 특별한 취향과는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가 사자를 부러워합니까? 아니지요. 소는 고기를 먹을 수 없습니다. 까마귀들이 썩은 고기를 만나서 기뻐한다고 비둘기가 그것을 슬퍼합니까? 아닙니다. 비둘기는 다른 음식을 먹으며 삽니다. 독수리가 굴뚝새의 작은 둥지를 부러워할까요? 그렇지 않죠.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독수리처럼 넓은 날개를 펴고 높이 날아올라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만들어주신 별들 가운데 있는 보금자리로 날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여기에 머물겠습니다. 저는 이 땅을 하찮은 것으로 내려다볼 것입니다. 이 땅의 대왕들이여, 저는 당신들의 위대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전사들이여, 저는 당신들의 명성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 크로이소스여 당신의 부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 시이저여 저는 당신의 힘을 간청하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본문에는 시기심과 부러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정신이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은 본문에서 미래를 보고 있는 사람의 분위기를 인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으면 모든 내용이 미래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하리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현재와는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한다. 또는 나는 그렇고 그렇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무덤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는 그가 누울 무덤을 보며 "내가 깰 때에"라고 말합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시야를 가진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지요. 세상에서 조차도 우리는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버는 족족 써버리는 사람은 얼마가지 않아 스스로를 누더기처럼 만들 것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은 어리석지만 현명한 사람은 미래를 바라보며 만족합니다.
밀턴이 책을 썼을 때 그는 아마도 자신 생애 중에는 거의 명성을 얻지 못할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무덤으로 내려갈 때 나는 영광을 얻을 것이다"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들은 흙항아리가 깨질 때까지 머무르고 등불이 타는 것을 감수하는 것으로 만족해했습니다. 그들은 영광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영광은 미래에 맡겨둘 것입니다. 늦게 찾아오는 명성이 오래가는 법이지요" 그들은 "얻을 것이다"라며 미래를 살았습니다. "만족하리이다" 한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말합니다. 저는 이제 왕실의 화려함이나 명성을 구하지 않습니다.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고 돌아갈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하찮은 재산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크고 아름다운 곳으로 갈 때까지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팔짱을 끼고 오두막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곧 하나님의 집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미래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소망과 기대로 살고, 다음 세상에서 가질 것으로 살고, 하늘에서 내리는 생명나무의 것으로 배불리며, 광야에 내리는 소망의 만나로 살고,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마시는 것 말입니다.
소망의 나이아가라에 가셔서 황홀한 기쁨으로 물보라를 맞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한 영혼에 영광으로 쏟아지는 바로 천국의 물보라입니다. 미래를 살면서 "나는 뭔가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최고의 동기입니다. 저는 이것이 루터를 그토록 담대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왕들과 성주들로 이루어진 많은 청중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쓴 진실에 서서 죽을 때까지 이를 고수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조금씩 만족할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곧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선교사들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로 모험을 떠납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위험한 해변을 밟고, 이것 때문에 목숨을 걸고 열악한 기후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에게 올 상급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제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으면 웃는 소리로 나는 갚을 수 없고 대신에 하늘에 계신 내 주인께 달아 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는 결코 상급을 바라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빚으로 가 아니라 은혜로 기억될 것들이 많습니다. 제가 들은 한 가난한 목회자의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목회자가 설교하러 허름한 예배당으로 가는 길에 아주 부유한 목회자를 만났습니다. 부자 목회자가 가난한 목회자에게 설교하면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물었습니다. 가난한 목회자는 "글쎄요, 저는 면류관을 바랍니다"라고 답하자. 부자는 "아! 그렇군요. 어쨌든 나는 금화 한 닢 아래로는 설교하지 않고 있소" 그러자 가난한 목회자가 말합니다. "저는 면류관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물론, 지금은 면류관이 없지만 면류관을 바라며 미래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 목회자는 그가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의미한 것이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크리스천 여러분! 미래를 사십시오. 이 땅의 것을 구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예수님처럼 되어 올 때 그분으로 인해 빛날 것을 기대하십시오. 시편기자는 그 미래를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다윗이 이 시편을 쓸 때 다윗은 믿음이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확신으로 넘쳐납니다. 어떤 추정도 없이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지금 그렇게 말한다면 그들은 광신도라고 불릴 것입니다. 누군가 "주의 얼굴을 보리니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럴 것이다라고 추정한다고 간주할 것입니다.
또한, 지금 이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나는 알아, 나는 확신해, 나는 그렇게 믿어"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형제자매 여러분 한둘이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확신으로 말할 수 있는 수천수만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더 이상 바라지 않지만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높고 탁월한 위치에 도달하는 것은 아마도 그리 쉽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가능합니다. 더 이상 신뢰하지 않지만 설득됩니다. 저는 행복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확신하고 굳게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명백히 나타내셨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만일"이나 "혹시"가 아니라 긍정적으로 영원히 "할 것이다"가 되었습니다. “내가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여기에는 그런 분들이 얼마나 계실까요? 아! 만약 여러분이 그렇다고 말하신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닥칠 고난을 예상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불같은 시험 없이 강한 믿음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시험 없이 "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능력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강력한 폭풍을 겪지 않는 강한 배를 만들지 않으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전투력을 시험해 볼 생각이 없으시다면 그분은 여러분을 강력한 전사로 만들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검을 사용해야 합니다. 천국의 오랜 톨레도 검은 악마의 철갑을 상대하지만 부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부러지지 않는 예루살렘의 참 금속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 "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믿음을 갖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
여러분 중의 몇몇 분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누구든지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비록 지금은 죄인 중의 괴수라 할지라도 죽기 전에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이 드신 한 크리스천이 있습니다. 아주 가난하게 살았고 지금은 벽 사이로 별이 보이는 다락방에 있습니다. 그곳에는 그의 침대가 있습니다. 그의 옷들은 낡고 헤어졌고, 난로 바닥에 장작이 몇 개 있는데, 그가 가진 마지막 것들입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는데, 중풍에 걸린 그의 손은 떨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의 마지막 식사는 어제 점심이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약하고 연약한 그를 보면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렇지만 그에게 "어르신, 이 다락방을 시이저의 궁전으로 바꾸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런 누더기들을 버리고 부자가 되시고, 하나님을 바라는 사랑을 멈추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물으니, 그의 눈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릅니다. 그가 답합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저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볼 것이며, 곧 만족할 것입니다. 결코 여기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고난도 시련도 저의 몫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천국에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하늘에 요구하세요. 공정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세요.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그리스도를 포기하고 풍성한 재물을 달라고 하세요. 그는 "그리스도를 포기하라고요? 절대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내 믿음이 그를 붙잡을 수 있는 동안에는
구두쇠의 황금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 믿음이 충만하고, 확신에 차서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요.
다윗이 가진 정신이 이러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바라고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II. 그렇지만, 이제 두 번째로 이 본문의 내용을 다루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도우신다면, 저희는 본문의 아주 깊은 곳으로 뛰어들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저는 여러분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잘 말할 수 있도록 하는 은사나 재능은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감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그런 사람들처럼 서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께서 도우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오늘 본문은 이중의 축복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보는 것이고, 다음은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만족입니다.
그럼, 첫 번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다윗은 주의 얼굴을 볼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비전인가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길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본 적이 있습니다. 가끔씩 하나님은 하늘 가운데 그것을 두시고 구름으로 가리시기도 하십니다. 밤수레가 어둠 속을 질주할 때 가끔씩 주의 손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천둥 칠 때 번개가 구름과 하늘을 가르는 모습에서 저는 주의 손길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을 쏟으면 그물이 시냇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잔물결을 일으키며 강으로 들어갈 때, 여러분은 아마도 일상적인 모습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보셨을 것입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별들로 가득한 하늘에서, 꽃들로 수 놓인 들판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셨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은 너무도 경이로워서 한평생이 걸려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주 깊게 들어가 보십시오, 작은 부분에 집중해 보십시오. 그다음에는 망원경을 가지고 먼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볼 수 있을까요? 그분의 모든 손길을 볼 수 있을까요? 아니요, 백만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은 태양을 향하는 혜성에도 있고 거대한 궤도를 돌고 있는 행성들에도 있으며 모든 공간과 모든 존재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손길을 누가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손길이 그러할진대 하나님의 얼굴은 어떠할까요?
여러분은 가끔씩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떨었습니다. 저 자신도 엄청난 천둥소리 속에서 많은 물소리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경이로움에 휩싸여 있었지만 놀라운 기쁨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그 음악을 멈추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분의 놀랍고 깊으며 중후한 음성을 발하시는 것을 서서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그 음성을 들어보셨습니다. 저는 천둥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 영혼 속으로 들어오는 사랑으로 인해 아주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이고 제 가슴은 그 음성에 두근거립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가장 큰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천둥이 칠 때 그것은 그저 속삭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음성이 있다면, 그분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다윗은 말했습니다. "나는 주의 얼굴을 보리니"
금으로 장식한 아데미의 신전은 얼마나 밝게 빛났는지 문지기는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눈을 조심하라. 눈을 조심하라. 눈을 조심하지 않으면 눈이 멀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오! 저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십시오! 그분을 대면하여 보고, 천국에 들어가며, 의인들이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것을 보는 모습이란 정말 엄청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그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은 것은 영원한 보좌를 살짝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 그분이 거기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을 묘사하려고 하는 것은 제게는 거의 신성모독에 가깝습니다. 이 엄청난 일에 비하며 저의 말은 너무나 초라합니다!
그렇지만, 주의 얼굴을 보다니요? 저는 그분의 눈의 광채 나 사랑의 말을 내실 그분의 입술을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의 얼굴을 보다니요! 주의 깊은 바다에 뛰어들어 그 광대함 속에서 길을 잃었던 사람이라면 조금이나마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수천 년 동안 천국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모르지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그곳으로 가서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푸른 하늘 위로 가서 생명의 강에 몸을 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번개보다 높이 날고 별들 위로 떠돌라야 합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가졌던 소망은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쁨에는 특별한 감미로움이 섞여 있었는데, 왜냐하면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그는 의로운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 아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을까요? 저는 "유리를 통해 어둡게"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때때로 땅이 사라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천국의 순간에 하나님을 보지 않습니까? 천박한 유물론이 죽고 천상의 불이 높이 타올라서 천국의 불에 닿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시골구석에 있어 고요하고 세속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서 있으므로 발의 신발을 벗고 하나님과 대화합니다. 에녹이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던 것처럼 크리스천은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눕니다. 크리스천은 그분의 사랑의 속삭임을 듣습니다. 그분 앞에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슬픔과 탄식을 쏟아냅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느끼는 가운데서도 의로운 중에 그분을 뵙지는 못합니다. 우리 예수님을 제대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죄가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고, 너무 어리석고 많이 연약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라고 말합니다. 그 영광스러운 날이 오면 우리의 구주를 대면하여 볼 것이고 그분을 "의로운 중에" 볼 것입니다.
천국에 있는 크리스천은 그의 옷에 티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순백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예수의 피로 순수해지고 천사처럼 하얗게 되었습니다"
천국에서의 순백은 더욱 또렷해질 것이지만 지금은 때때로 이 세상에 의해 그을리고 이 가련한 육신 세상의 먼지로 덮입니다. 그렇지만, 천국에서는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고 먼지를 털어내고 의로운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주여!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가질 것이므로 당신만큼 순수하게 주 앞에 설 것을 믿습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주님의 의가 저에게 있을 것입니다. 오 크리스천 들이여 여러분은 이것을 즐길 수 있으십니까? 제가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의 마음 깊이 이것을 묵상하고 계십니까? 영원히 그분의 얼굴을 뵙게 하옵소서. 이 비전 가운데 누리게 하소서. 사실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의미만큼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게 하소서!
두 번째 축복은 만족입니다.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시편 기자는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한다고 말합니다. 만족! 만족은 그리스도인이 천국에 들어갈 때 누리는 또 다른 기쁨입니다. 이 땅에서는 결코 완전한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사실, 크리스천은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그 자체로 만족합니다. 크리스천 안에는 위로가 샘이 샘솟고 있고 흔들리지 않는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천국은 참되고 실제적인 만족이 있는 곳입니다. 믿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면 그가 상상하던 것이 완전히 충족되리라 믿습니다. 그가 천국에 가면 볼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 모든 거룩한 생각들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이 실제가 될 것입니다. 상상하던 영광스러운 모습은 그가 볼 수 있는 것으로 실체가 될 것입니다. 그가 천국에 영원히 앉아 있어도, 천국보다 좋은 것을 생각하거나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광채를 발하는 천국이 아닌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상상하던 것은 만족될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그의 지성 또한 충족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보고 듣고 알겠네,
내가 아래에서 바라고 기대하던 모든 것을.”
누가 이 땅에서 자신의 지식에 만족할까요? 우리가 가보지 않았던 자연의 깊은 신비와 같은 알고 싶은 것은 없나요? 그러나, 영광스러운 상태가 되면 우리는 알고 싶은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억도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우리가 이 땅에서 견디고, 행하고, 고통받았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만족할 것입니다.
"저기, 푸르고 꽃이 만발한 언덕 위에,
내 지친 영혼은 앉아 쉬겠네,
그리고 구원의 기쁨으로
내 발의 수고를 돌아보네."
하늘에서 그러한 일들이 있으면 소망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미래를 바라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모든 이가 만족하여 하나님의 다루심에 대하여 그 어떠한 것도 바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여러분 중에 일부가 반대할 만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의인들은 천국에서 잃어버린 자들의 심판을 보며 만족해할 것입니다.
만약 제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면 저는 분명 그들을 위해 울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제가 그들의 끔찍한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고 괴로움에 온몸을 비트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분명 저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천국에는 그러한 감정은 없습니다. 믿는 자들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만족하여, 하나님께서 최선의 길로 행하셨다는 생각에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잊을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자들은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일 뿐이고 하나님은 영원히 공의로우신 분임에 만족해할 것입니다.
만약 제 부모님이 제가 지옥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여도 그분들은 저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비록 천국에 있어도 "위대하신 하나님, 이곳은 공의입니다. 주의 긍휼과 함께 주의 공의는 반드시 드러나야만 합니다"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보다 훨씬 더 위에 계심을 느끼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더 높일 수 있다면 그 피조물들이 부서지는 것을 보고도 만족할 것입니다.
오, 천국에서 우리는 사람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사람이 뭔가 대단한 존재처럼 보일지 모르나, 천국에서 사람은 그저 추수철 들판에 쓸려가는 벌레 몇 마리처럼 보일 것입니다. 한 줌의 먼지처럼 보이거나 제거당할 운명에 있는 말벌집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 앉아 땅의 나라들을 메뚜기처럼 내려다볼 것이고 섬들을 아주 작은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만족할 것입니다. 무엇하나 불평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나는 만족하리이다"
그렇지만, 언제요?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그때까지는 아닙니다. 아니요, 그때까지는 아닙니다. 여기서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여러분은 하늘에서 주의 형상으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늘에 있는 그 누구도 잠든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지키며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깬다는 것은 그들의 몸을 가리킵니다. 몸이 아직 깨지 않고 잠을 자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 땅이여! 너는 죽은 자들의 누울 곳이라! 이 얼마나 광대한 침실인가! 하나의 거대한 묘지에 다름없다. 의인들은 여전히 자고 있으나 부활의 아침이 되면 만족해할 것입니다. 그들이 깰 때에 만족하지 않다고 할까요? 그들은 천국에 있습니다. 그들이 고통받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불만은 그들의 몸이 거기에 없다는 것뿐입니다.
제 뜻을 설명할 수 있는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한 로마 정복자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의 병사들과 함께 돌아와 집에 가서 다음날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다음날 그가 도시로 나가면 그는 또다시 큰 승리와 환호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말하자면, 일단 성도들은 자신의 몸 없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되면 그들의 몸도 깨어서 승리의 수레를 타고 갈 것입니다. 장엄한 행렬을 보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머리에 수많은 면류관을 쓰시고 밝고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길입니다.
우리 구주께서 맨 처음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그분 뒤로 모든 성도들이 손뼉을 치면서 들어옵니다. 그들 모두 황금 하프를 켜면서 승리의 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천국문에 이르자 영광의 왕을 맞이하기 위해 문이 활짝 열립니다. 천사들은 마치 로마의 환영 인파처럼 창문과 지붕 위에서 그들이 지나는 것을 바라보면 천국의 장미와 백합을 흩뿌리며 외칩니다. "모두 외치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 통치하시도다!" 모든 천사들이 승리의 행진을 맞이하고 그분과 함께 그의 백성들이 승리를 얻는 그 영광스러운 날에 저는 만족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기자는 우리가 주의 형상으로 깰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영에 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의로운 영은 행복함, 거룩함, 순결함, 무오함, 영원함과 고통에서 자유함과 같은 것에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것은 특별히 몸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에서는 깰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도 그리스도 처럼 될 것입니다. 정말 좋은 생각 맞습니다. 아 그렇지만, 오늘밤 이런 생각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말로 담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생각입니다. 아무튼 저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깰 것입니다.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저는 모르고 거의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때때로 저는 앉아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뭐라 하든 상관없습니다. 때때로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는 저의 구주를 바라보는 것으로 제가 유익이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저는 가시면류관을 쓰신 그분을 바라봅니다, 창에 찔린 옆구리, 피 흘리는 손과 발, 십자가 달리셔서 흘리신 모든 핏방울을 바라봅니다. 그렇지만, 저는 천국에 계신 그분을 도저히 그릴 수 없습니다. 그분은 너무 밝고, 너무 영광스럽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통하여 엄청난 빛을 발하십니다. 그분의 눈은 등불과도 같고, 그분의 혀는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항상 계신 분이므로 머리는 눈처럼 흰머리로 가득합니다. 그분은 구름을 묶어 당신 주위에 띠로 삼으시고 그분이 말씀하시면 그 소리는 마치 많은 물과 같습니다. 제가 요한계시록에 적힌 말씀을 읽었지만, 저는 그분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이지만 저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뜻이 무엇이든 간에 저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깰 것을 압니다.
오! 우리 중에서 천국에 들어가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입술에 구원의 말씀을 가지며 전장에서 쓰러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다리는 총에 맞았고 그의 몸은 칼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천국에서 깨면 몸에 아무런 상처도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총에 맞은 자국도 없고, 칼에 베인 흔적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처럼 된 것입니다.
오랜 세월 지팡이에 의지하여 힘든 삶을 살았던 한 할머니가 있습니다. 세월은 그녀의 이마에 깊은 고랑을 파 놓았습니다. 야위고 절뚝거리던 그녀의 몸은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오! 그 할머니는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평생을 장애를 가지고 살았던 또 다른 사람은 그가 깰 때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깰 것입니다.
얼굴 생김새가 어떠했든, 외모가 어떠했든 천국에서는 세상의 아름다움은 불구였던 사람의 아름다움을 넘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멋있고,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도, 지금은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사람들이 천국에 가면 그들보다 더 밝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처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III.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오늘 본문은 아주 슬픈 대조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잠들 것입니다. 몇 년이 더 지나면 여기에 계신 분들은 과연 어디에 계실까요? 크세르크세스 황제는 얼마 지나지 않으면 자신의 모든 군대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울었다죠. 저도 여기에 서서 울 수 있을까요? 몇 년이 지나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 서서 "아버지,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선하신 주여 이게 사실입니까? 실제가 아니지요? 모두가 사라진 것입니까?
아! 그렇습니다. 이 광경은 곧 사라질 것이고 저와 여러분도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연극과 같습니다. 이 인생은 단지 사람들이 연기하는 무대일 뿐이고, 우리는 커튼 뒤로 물러가 마스크를 벗고 하나님과 대화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죽기 시작합니다. 나무는 여러분에게 관을 주기 위해 오랫동안 자라왔고, 잔디는 여러분 모두를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광경은 곧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짧은 꿈 하나, 살짝 든 낮잠 같은 순간이 지나면 이 모든 광경은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처럼 다시 깨어나서 함께 서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보다는 더 강력한 압박 속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설교자나 청중이나 모두 같이 서 있을 것입니다. 유일한 구별이 있다면 의인과 악인의 차이입니다.
우선 우리 모두는 함께 설 것입니다. 이런 장면이 펼쳐질 것 같습니다. 바다는 끓고, 하늘은 갈라집니다. 구름은 마차로 변합니다. 예수께서 마차에 타시고 마차는 불날개로 하늘을 날아오릅니다. 예수께서 준비된 보좌에 앉으십니다. 주께서 고개를 끄덕이자 온 세계가 잠잠해집니다. 주께서 손을 들어 시간별로 우리의 모든 행위가 적힌 운명의 책, 심판의 책을 여십니다.
그분은 손가락으로 위에 있는 군대를 가리키시며 "우주를 나누라" 명하십니다. 생각보다 빨리 모든 땅이 갈라질 것입니다. 우주가 나뉘는 때가 오면 과연 저는 어느 곳에 있을까요? 모든 것이 나뉘면 의인들은 우측으로 갈 것입니다. 의인들을 향하여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음악보다도 감미로운 목소리이십니다. "오라! 너희들이 왔구나, 계속 오라! 어서 오라! 너희 삶의 결과물이 앞에 있다. 그러니 계속 오라. 와서 마지막 걸음을 내딛으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자들이여, 어서 오라! 와서 창세전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하신 나라를 받으라!"
그리고 이제 왼쪽에는 악인들만 남았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떠나가라! 너희는 너희 평생 동안 떠나 있었고, 나로부터 떠나 있는 것이 너희 일이었다. 너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지 '나를 떠나라. 나는 너의 길을 좋아하지 않아' 그래, 지금까지 그래왔던 대로 떠나가고, 이제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으면 된다." 악인들은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서, 그대로 서있습니다. 구주께서는 심판자가 되십니다. 이전에는 긍휼을 베푸시던 손으로 이제는 공의의 검을 잡으십니다. 사랑을 말씀하셨던 입술이 이제는 완전히 천둥과 같습니다. 그분은 검을 들으시고 그들을 쓸어버리십니다. 악인들은 사자 앞의 사슴처럼 지옥의 구렁텅이로 날아 들어갑니다.
그러나, 저는 바라기는 여러분에게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꼭 말하고 설교를 끝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아침 저는 하나님 없는 분들, 가장 악한 죄인들에게 설교했고 많은 이들이 울었습니다. 제가 위대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말했을 때 많은 이들의 마음이 녹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녁에는 아직 그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다른 길을 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오! 목마른 자, 무거운 짐 진 자, 길을 잃은 자, 완전히 무너진 자들이여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주의 긍휼하심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여기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누군가 말합니다. "믿는다는 게 뭐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는 될지언정 전부가 아닙니다. 모든 알미니안주의자도 그 교리를 갖고 있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기는 것입니다. 한 흑인은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했냐는 캐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예수께 던지고 누워버렸습니다. 약속에 따라 저 자신을 던지고 누워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모든 죄인들에게 "나는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약속에 의지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그렇다면, 주여, 저를 구원해 주소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1:18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자신을 그분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의 백성중의 하나가 아닌 것 같아 두렵습니다. 생명책에서 제 이름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약 모든 사람의 이름을 성경에 적는다면 성경은 엄청나게 큰 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분이 존 스미스라는 자신의 이름을 성경에서 찾았더라도,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그것은 다른 존 스미스를 지칭하는 것일 거라고 확신할 것입니다.
러시아 황제가 모든 폴란드 난민들에 대하여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칙령을 발표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한 폴란드 난민이 벽에 걸린 커다란 플래카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렇다면,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누군가 그에게 "저기에 발레프스키는 없어"라고 합니다. 그는 "맞아, 그렇지만 폴란드 난민이라고 하잖아. 폴란드는 내 세례명이고 난민은 내 성이야, 결국 나를 말하는 거지"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성경에 여러분의 이름은 없지만, "잃어버린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인"은 여러분의 세례명이고 "잃어버린"은 여러분의 성인데 왜 오지 않는 것입니까? 성경은 "잃어버린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까?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다른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저는 제가 택함 받은 자가 아닐까 봐 걱정입니다" 오! 사랑하는 영혼들이여! 그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누구나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택함 받지 않았다면 결코 그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그의 피에 의지하여 긍휼을 바라는 사람은 택함 받은 사람이고 나중에 자신이 택함 받았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택함 받았음을 확인하기 전에 먼저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택함 받음이라는 학교는 회개의 학교를 마치기 전에는 갈 수 없는 학교입니다. 주기도문을 말하기도 전에 아멘을 먼저 말하는 것은 책을 거꾸로 읽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하고 그다음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오시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라이 임하옵시며"로 시작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믿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빈손으로 나아옵니다"
라고 시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항상 무에서 그분의 백성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오늘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은혜와 긍휼을 바라고 온다면 그는 은혜와 긍휼을 얻을 것입니다.
한 사례를 말씀드리면서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어떤 가난한 여인이 길을 지나다가 문 앞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아이의 찬양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회심하고 생명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전부이십니다"
축복의 노래입니다. 댁에 가셔서 찬송을 불러 보십시오. 그리고 이 몇 안 되는 단어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예수님 없이는 자신이 허무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은 단지 천국에서 떨어져 있을 뿐 거기에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의 형상으로 깨어날 때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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