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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자 : 1855년 6월 3일 주일 아침

■ 설교 장소 : 런던 사우스워크의 뉴파크스트리트 교회(New Park Street Chapel)

■ 설교자 : THE REV. C. H. SPURGEON

■ 설교 제목 : 그리스도의 교회, The Church of Christ

■ 본문 참조 사이트 : https://www.spurgeongems.org

■ 설교 내용 :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에스겔 34:26"

 

예배를 시작하며 읽은 에스겔 34장은 예언적인 내용입니다. 제 생각에 본문의 내용은 포로 시기의 유대인들의 상태나 이후 포로 귀환 때의 행복과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느헤미야와 에스라 시기에 고국으로 돌아와 빠지게 될 상태,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질 그 상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지자는 우리에게 그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대신에 직접 먹이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양들이 풀을 먹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풀을 밟아버려 먹지 못하게 하고 물도 더럽혀서 양들이 마시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포로 귀환한 이후의 모습으로 지식의 열쇠를 맡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일어난 때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이들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만든 사람들이고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신들은 손가락조차도 대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를 완전히 제사와 의식으로만 만들고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서 "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울부짖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같은 악이 오늘날 불쌍한 유대인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탈무드와 게마라의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을 읽어보시면, 그들이 사람들에게 지운 무거운 짐들을 보시며 "참으로 그들의 목자들은 게으르구나.”하는 말을 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양들에게 양식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상적인 미신과 어리석은 시각으로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메시아가 이미 오셨다는 말 대신에 유대를 회복시키시고 영광스럽게 할 메시아가 아직 오시지 않았다며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이 바리새인들과 랍비들에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에스겔 34:21 옆구리와 어깨로 밀뜨리는" 이 악한 목자들은 양들이 눕지도 못하게 하고, 좋은 초장을 찾아 양들을 먹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를 설명한 다음 선지자는 불쌍한 유대를 향한 더 좋은 때가 올 것을 예언합니다. 게으른 목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랍비의 권력이 그치고, 미슈나와 탈무드의 전통이 폐기될 날이 오고 있습니다. 각 족속이 자기의 나라로 올라갈 때가 오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울부짖는 광야와 같던 유대가 다시 한번 장미처럼 피어날 때입니다. 만일 성전 자체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시온의 언덕에 기독교 건물이 세워질 때이며, 그곳에서 그 옛날 다윗의 시편이 성막에서 불려지던 것처럼 엄숙한 찬양의 노래가 들리게 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그들은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이 머물고 유리하던 그 먼 땅에서 돌아올 것입니다. 세상의 오물처럼 여겨지던 그들이, 그 이름은 속담거리가 되고 이야깃거리로 전락했던 그들이 모든 땅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낙심한 시온은 그 머리를 들고 먼지와 어둠과 죽음에서 떨쳐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그의 백성을 먹이시고 그들과 그의 산 사방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유대인의 회복에 대하여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성경에 약속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성경을 읽는다면 이스라엘 자손의 실제적인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리로 올라갈 것이다. 그들이 울며 시온으로, 간구함으로 예루살렘으로 오리라."

 

행복한 그날이 속히 오기를 기원합니다! 유대인들이 회복될 때는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모일 때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돌아오면 예수께서 시온산에 오셔서 영광스럽게 통치하실 것이며 천년 왕국의 평온한 날들이 밝아올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가 형제요 친구인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는 우주적인 방법으로 통치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주님의 산 주변에 복을 주시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아침 저는 이 말씀 그대로가 아니라 좀 더 제한된 의미로 바라볼까 합니다. 어찌 보면 더 확대된 의미 일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여러분과 제가 연결된 이 특별한 교회에 적용할까 합니다. "에스겔 34:26.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맛비를 내리리라"

 

두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축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를 오늘 본문의 서로 다른 곳에서 찾게 되실 것입니다.

 

I. 첫째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온 세상 중에 한 사람을 택하신 목적은 그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꼭 필요한 유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을 때, 그를 단순히 하나님의 친구나 특별한 권한을 받는 사람으로 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진리의 수호자로 만드시려고 그를 택하셨습니다. 그는 진리가 숨겨진 방주가 되고, 온 세상을 대신하여 언약을 지키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주권적인 은혜로 택하시고 그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실 때는 그 사람 자신을 위해 그를 구원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 우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을 모르십니까?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소금으로 만드실 때는 여러분 안에 소금을 가지고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소금처럼 전체를 보존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누룩으로 만드신다면 작은 누룩처럼 여러분으로 하여금 덩어리 전체를 부풀게 하기 위함입니다.

 

구원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은 그것을 혼자만 간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축복하는 수단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큰 날이 이르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선물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축복받았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악인이 당장 죽지 않고 그 징벌이 유예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값을 치르고 얻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와 그들이 누리는 현세적인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복음은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축복하고 그런 다음 그것을 확장하여 그들이 온 인류의 축복이 되도록 보내진 것입니다.


교회를 축복으로 말할 때 우리는 세 가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첫째로 신성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둘째로 종교의 성격이고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셋째로 종교의 발전입니다.


1.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축복이 되게 하시는 것과 관련하여, 첫째로 여기에는 신성이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우리 중 그 누구도 다른 이에게 복을 끼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성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들을 돕고 이끌어 감으로써 그들에게 복을 내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도우심으로 그들이 복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이 강단에 서서 수천, 수백 번 설교하지만 사람보다 더 크신 분이 저와 함께 하지 않으시다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주일학교에서도 일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그곳에 계셔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 저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원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면 저희가 하는 아주 작은 일조차도 축복이 되게 하십니다. 아! 때로는 설교 전체보다 단어 몇 개가 더 복이 되게 하십니다. 여러분도 그러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떤 사람은 여러분이 말한 것 중에 몇 단어를 기억해서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그 이야기를 꺼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일을 습관적으로 하시는 한 백발노인을 압니다. 그분은 한 소년을 어떤 나무로 데리고 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 요한아, 너 저 나무 아래서 무릎을 꿇을래! 나도 너와 함께 무릎을 꿇으마"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소년의 회심과 소년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분은 말합니다. "자 이제, 네가 혹시 이 나무로 오게 된다면, 네가 회심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이 나무 아래에서 너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했다는 것은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 소년은 떠나서 백발노인의 기도는 잊었지만,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그 소년은 그곳을 걸으며 다시 그 나무를 보게 됩니다. 그 백발노인의 이름이 나무껍질에 새겨져 있는 듯 보였습니다. 오래전 이곳에서 기도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비록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감히 그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습니다. 무릎 꿇고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그곳은 그의 영적 출생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면 그리스도인의 아주 단순한 것도 복이 될 것입니다. "시편 1:3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주께서 도우시면 그리스도인이 하는 단순한 말조차도 소중히 간직될 것이며 그가 하는 모든 일은 형통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제약이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가 그들에게 복을 줄 것이다. 내가 그들이 반드시 복이 되도록 할 것이다. 저는 제 동료 피조물에게 복이 되는 일을 할 때면 항상 그것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어느 날 누군가 저를 불러서 자신의 반을 맡도록 요청하고, 간청하며 기도했습니다. 저는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은 저의 손과 발을 붙잡으셨고 저는 계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말씀을 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저는 제가 그것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어나서 몇 마디 주절 거렸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그것은 제가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말씀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분명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성도들은 아무런 경고의 말씀이나 설교도 듣지 못하고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그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들에게 말씀을 전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손대는 모든 것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항상 제가 어떻게 저항해 볼 수 없는 힘을 느끼곤 했습니다. 주님의 섭리로 제가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 그것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만약 제가 원했더라도 저는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삶을 살아가면서 축복이 되었던 모든 곳에서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도원으로 밀어 넣으신 것과 같은 상황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고 그런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무슨 쓸모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마차에 누워있을 뿐이었고 좋은 일은 거의 하지 않았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내리며"  주님은 그에게서 부를 벗겨내고 낮은 자리로 이끄십니다. 결국 그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되고 그 사람의 뛰어난 교육과 지성은 사람들에게 복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복이 되도록 만드십니다.

 

다른 한 사람은 천성이 본래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회에 가더라도 기도하지 않았고, 교회에 참여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위치에 처하게 됩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내리며" 여러분이 하나님의 종이 확실하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복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금을 덩어리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것을 깨부수어 복이 되게 하십니다.

저는 여기 있는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을 전파할 능력을 주신 분들이 있다고 믿습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아직 그것을 모르시겠지만 하나님께서 조금씩 알게 해 주실 것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일을 행하게 하시는 지를 잘 살펴보고 어떤 힘을 느꼈다면 주저하거나 확인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성령님의 임재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퀘이커 교도들의 신학을 취하는 편이고 그것들 중의 하나를 확인해야 할까 봐 두렵습니다. 만약 제 마음에 "저 사람 집에 가자"하는 생각이 들면 저는 항상 그렇게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무엇이 성령님에게서 온 것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도 비슷한 의미라고 이해합니다.

"내가 그들로 하여금 복이 되게 할 것이다. 내가 그들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할 것이다. 만약 내가 어떤 방법으로든 그들에게서 좋은 향취가 나게 할 수 없다면. 나는 그들을 고통의 절구에 넣고 찧을 것이다. 만약 그들에게 있는 씨앗이 어떤 방법으로든 뿌려질 수 없다면, 나는 강한 바람을 보내어 작은 씨앗들을 사방으로 불어낼 것이다." "내가 그들로 하여금 복이 되게 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그 누구에게도 결코 복이 된 적이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일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께서는 "내가 그들로 하여금 복이 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2. 그렇지만, 다음으로 축복의 성격을 주목하십시오. "내가 그들로 복이 되게 할 것이다" "내가 교회의 각 구성원이 복이 되게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집인 교회로 오는데, 누군가 이렇게 말합니다. "음, 당신은 당신이 다니는 곳에서 대체 뭘 하시죠?" "글쎄요, 우리는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라는 단어를 어떻게 쓰시죠?"

당신은 "그것은 단순한 단음절 단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우리라는 단어 안에 나를 넣으셨나요?" "아닙니다. 나를 넣지 않고 우리라는 단어의 철자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엄청 많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말하지만, "제가 얼마나 많이 했나요? 제가 그곳에서 무언가를 한 게 있나요? 그래요 이 교회가 커졌는데, 제가 뭐 한 것이 있나요? 저는 헌금을 아주 조금 했을 뿐이에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입니다. 돈을 지불한 사람들이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합니다" 정말, 우리가 한건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앉아서 조금 들을 뿐 축복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큰 주일 학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곳에서 가르치신 적이 있나요? "우리는 곳곳에 봉사할 거리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곳에서 봉사하신 적이 있나요? "우리"라는 단어는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들로 복이 되게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건설되었을 때 각 사람은 각자의 집 근처에서 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여러분은 무언가를 짓거나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에 대하여 거짓말하지 맙시다. 만약 우리가 건축에 관여한 것도 없고 삽도 창도 잡지 않았다면 우리의 교회에 대해서 말하지 맙시다. 본문은 "내가 그들로 복이 되게 할 것이다"라고 하시며 각 사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집에서 그냥 아빠일 뿐입니다. 일이 바빠서 아이들을 조금 돌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직장에 일하시는 분들이 있지요? "아니요, 제가 근로자입니다" 같이 일하시는 분들도 계시지요? "아니요, 저 혼자 일합니다." 혼자 일하신다고요? 수도사처럼 혼자 사신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믿을 수 없네요.

그런데 당신은 당신이 일하시는 곳에서 동료들에게 그들의 양심에 대하여 한마디도 말할 수 없나요? "저는 일하는 곳에 종교를 끌어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맞아요, 저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물론 일할 때는 일에 집중해야지요. 신앙생활을 할 때는 신앙에 집중하고요. 그런데, 당신은 그런 기회가 있었나요? 버스나 기차를 타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언가를 말할 수는 없을까요? 저는 그 방법을 찾았고, 다른 사람들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까? 모자 안에 소책자를 두었다가 가시는 곳에 놓아둘 수는 없나요? 아이들에게 한마디도 할 수 없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사람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 까요? 벽에 붙은 거미조차도 거미줄을 쳐서 해로운 파리를 없앱니다. 교회 묘지에 있는 쐐기풀조차도 유익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있는 작은 별도 지도에 표시되어 항해자들의 길잡이가 됩니다. 물속에 있는 벌레가 바위를 만든다고 하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무언가를 위해 만드셨지만, 여기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는 그가 할 일을 전혀 주시지 않으셨다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쓸모없는 것을 만드시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하시는 것에게는 불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뭔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 하나님께서 주의 섭리와 은혜의 놀라운 능력으로 여러분이 그것을 보고 실행할 수 있게 만드시기를 기원합니다.

3. 그런데, 우리가 세 번째로 주목해야 할 점은 복음적 축복의 발전과정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로 끝나지 않고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확장적인 것입니다. 처음 마음에 시작했을 때는 겨자씨 같이 아주 작은 것이지만, 점차로 커져서 나중에는 큰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가지에 깃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에게는 종교적일 수 없습니다.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여러분도 이 이야기를 수십 번 들으셨을 텐데, 돌멩이 하나를 개울에 던지면 그것은 작은 고리를 만들고, 그 외부에 다른 고리를 만들고 또 다른 고리를 만드는 방식으로 물가 전체로 그 물결이 퍼집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축복이 되게 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사역자 한두 명을 축복이 되게 할 것이다. 다음에는 그로 하여금 백 명에게 축복이 되게 할 것이고, 그다음에는 그로 하여금 수천 명에게 축복이 되게 할 것이다. 각 사람이 축복이 되게 할 것이고, 내가 그렇게 하고 나면, 주변 모든 곳이 축복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릴 것이다"


저는 우리가 이 교회의 일원으로서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산 사면 모든 곳이 복이 될 때까지 결코 만족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산 사면은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 우선은 우리의 기관들이고 둘째로는 우리 동네, 세 번째는 우리와 인접한 교회들입니다.


우선은 우리의 기관들입니다. 저희는 주일학교가 있습니다. 우리의 산에서 얼마나 가깝게 있는지요? 제가 이렇게 주일학교를 강조하는 이유는 더 많이 알려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아침 실제적인 설교로 여러분 중에서 주일학교로 오셔서 가르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사기 5:23 와서 여호와를 돕고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도다"하는 말씀에 적합한 사람들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학교를 우리의 산에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주일학교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일학교에서 교회로 갈 수 있도록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 협회가 있습니다. 저는 이곳이 축복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을 방문하는 병자를 열정적이고 진지하게 섬기는 사람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그 사랑하는 선교사 형제의 감독자로서 주기적으로 그 형제에 관한 일을 보고 받는데, 그 보고서는 저를 아주 기쁘게 하였고, 그분이 우리 주위에서 얼마나 열심히 섬기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의 마음과 힘이 그 협회로 향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를 여호수아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그와 함께 여러분의 이웃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두운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거리를 따라 조금 걸어 내려가 보십시오. 길을 걷다 보면 주일에도 문을 여는 가게들을 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그중에 몇몇 가게들은 오셔서 저희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더 많이 얻게 될 것입니다. "시편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하셨는데 왜 우리가 갖지 못하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병자를 방문하거나 집집마다 전도지를 나눠줄 때, 이 기도를 드리십시오. 주여 이곳도 우리 산 사면 중 하나입니다. 축복이 되게 하소서! 이 교회와 관련된 어떤 기관도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 산 사면에는 여러 기관들이 더 있고, 주님께서는 방금 제 마음에 다른 기관을 만들어 우리 산 사면이 축복이 되게 하라는 생각을 넣어 주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분은 그것에 대해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도록 인도하신 형제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들은 나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룹을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축복하시고 우리를 사람들에게서 주목받고 이름을 얻게 하셨는데, 왜 계속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엄청난 열정과 사랑의 때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이 바로 무언가를 해야 할 때입니다. 쇠가 뜨겁게 달구어졌는데, 그것을 쳐서 모양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가 런던에 있는 침례교회들의 영광이 될 교회를 이곳에 세울 수 있는 재료뿐만 아니라 대도시 전역에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냉철한 판단과 신중함으로 뒷받침된 더 많은 계획들이 있는데 이 대도시가 순수한 복음의 소리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로 더 많은 영광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산 사면에 있는 기관들이 복이 되게 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런데 다음으로 우리의 이웃들이 있습니다. 때때로 저는 이곳이 광대한 영적 사막 가운데 있는 푸른 오아시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웃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바로 우리 뒤에는 수백 명의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있고 최악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들을 축복이 되게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은 슬픈 일입니다.


이것은 제 청중인 여러분에게 큰 축복이 될 것이지만 여러분은 이 지역에서 오신 분들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 사람들을 봐봐, 저 예배당에서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야. 그런데, 우리는 들어갈 수가 없네"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한 가지는 여러분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이곳에 오시지는 마시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른 교회의 교인이라면 그냥 집에 계시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길 잃은 양들이 많습니다. 저는 다른 교회 교인인 사람들보다 그들을 더 원합니다. 다른 교회 교인이라면 자신의 자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저는 다른 사역자의 교인을 빼앗고 싶지 않습니다. 돕고 싶은 마음으로 이곳에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호의는 대단히 감사하지만 여러분이 다른 교회 교인이라면 저희는 여러분이 저희와 함께하기보다는 집에 계시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죄인들이 오기를 바랍니다. 온갖 종류의 죄인들 말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설교자 쫓아다니는 그런 사람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해, 다른 것이 필요해" 오! 제발, 하나님의 이름으로 간청드립니다. 이곳저곳으로 쫓아다닌다고 원하는 바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구르는 돌이 뭐라고 하시는 줄 아십니까? 아마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끼를 모을 수 없어" 여러분 이제 구르는 돌이 되지 마시고  그냥 집에 계십시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가 이웃들의 축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저는 주위 사람들에게 뭔가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향해 팔을 활짝 펴야 합니다. 그들을 향해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만 하고 전할 것입니다. 그렇게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면 "저곳이 사우스워크의 대성당이다!"라는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그곳에서 축복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에 복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산 사면이 의미하는 다른 곳은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와 인접한 교회들을 들 수 있습니다. 저는 주위의 모든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바라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목요일 아침에 사랑하는 형제 셔먼 씨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교회가 부흥하고 있는 곳은 몇 군데 없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교회 전체를 보면 참으로 비참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영을 부어주고 계신 곳은 몇 군데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썰물이 되면 뻘속에 묻혀버리는 블랙 프라이어스 다리에 있는 바지선과 같은 상태입니다. 밀물이 와서 바지선을 떠올릴 때까지는 국왕의 모든 말과 사람들을 동원해도 끌어낼 수 없지요."


그렇다면, 이 교회들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이루어질지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여기 있는 촛대에 불이 있다면 다른 교회들도 와서 자신들의 촛불을 밝히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여기에 불이 있다면 그 불이 주변 모든 교회로 퍼져서 영광으로 불을 밝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정으로 이 땅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부흥은 결코 한 곳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끝이 어디일지 누가 알 수 있을까요?


"위대한 복음이여 멀리 날아가라;
가서 이기고 정복하라, 결코 멈추지 마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산 사면으로 복이 되게 하시면 그것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II. 두 번째는 하나님의 백성이 축복이 될 뿐만 아니라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을 읽어 보십시오.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맛비를 내리리라" 우리가 여기서 받기를 바라는 축복의 소나기에 대한 예언으로서 하나님께서 축복의 소나기를 예배당을 열 때 내리셨다는 것은 다소 특이합니다. 제가 어떤 징조를 믿는 사람이라면 저는 첫날에 내렸던 소나기가 그 이후에도 계속 내리도록 기도할 것이고 축복의 소나기가 그친다면 예배당도 닫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은혜의 소나기가 내리고 있을 때만 열리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첫째, 여기에는 주권적인 긍휼 하심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주권적이고 신성한 긍휼 하심 아닙니까? 하나님 말고 그 누가 "내가 비를 내릴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무지한 남아프리카의 코이코이족 사이를 걷는 거짓 선지자가 할 수 있을까요? 그는 자신이 비를 만드는 사람이며 그들에게 비를 줄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가 할 수 있겠습니까?

 

제국의 군주나 이 땅에서 제일 학식이 높은 사람이라고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맛비를 내리리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모든 구름을 쥐고 있는 주먹은 하나뿐입니다. 창공 위 거대한 대양의 모든 길을 품고 있는 손은 하나뿐입니다. 구름들에 명하여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목소리는 하나뿐입니다. "욥 38:29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누가 땅에 비를 내리게 하는가? 누가 푸른 풀 위에 소나기를 뿌리는가? 나, 여호와가 아니겠는가?" 다른 누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비가 하나님의 능력에 속해 있지 않다고요? 그렇다면, 그분 말고 대체 누가 비를 보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가톨릭 신자들은 은혜를 하나님에게서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사제를 통해서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교황에게 주셨고, 그것이 추기경과 주교라는 좀 더 작은 파이프로 흘러가고 결국 각 사제에게로 흘러간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수도꼭지를 돌리면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복된 장맛비를 내리리라"로 하셨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주목할 점은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복된 장맛비를 내리리라" 비가 없다면 땅은 어떻게 될까요? 흙덩이를 깨고 씨를 심을 수는 있겠지만 비가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창고를 준비하고 낫을 갈아 놓을 수는 있겠지만 비가 없다면 밀을 수확하기도 전에 낫은 녹슬고 말 것입니다. 비가 필요하듯이 신성한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볼로가 씨를 뿌리는 것도 헛되고,
바울이 심는 것도 헛되도다"


여러분이 여기에 오시는 것도, 일하시는 것도, 헌금을 하시는 것도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한 비를 내리시고,
구원을 내려 보내실때 까지"

 

다음은 풍성한 은혜입니다.  "복된 장맛비를 내리리라" 하나님은 물방울을 내린다고 하지 않으셨고 장미비를 내린다고 하셨습니다. "비가 자주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내리면 쏟아붓는 것입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복을 주시면 그 복을 받아 둘 곳이 없을 정도로 쏟아부어 주십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복을 어디에다가 보관할까요? 저는 지난 목요일에 하나님은 십일조를 창고에 들이면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복을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시도했을 때 약속은 그대로 이루 졌으며 항상 그렇듯이 우리가 그 약속을 의지하는 한 약속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  풍성한 은혜여! 형제자매 여러분은 우리는 풍성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풍성한 은혜는 우리를 겸손하게 지켜줄 것이며, 풍성한 은혜는 우리를 기도하게 만들어 줄 것이며, 풍성한 은혜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고, 풍성한 은혜는 우리를 열정적으로 만들어 주며, 풍성한 은혜는 우리를 진실되게 만들어 줄 것이며 풍성한 은혜는 우리의 이번 생을 지켜주어 끝내는 천국까지 데려다줄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소나기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은혜의 소나기가 말라버린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여기 은혜의 소나기가 있음에도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소나기가 내리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편견의 우산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앉아 있는 것처럼 그들도 여기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비가 내리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편견은 그것을 막아버리고, 듣고 싶어 하지도 사랑하지도 않고 다시 도망가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소나기는 분명히 있고, 우리는 은혜의 소나기를 내려 주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은혜는 때가 있는 은혜입니다.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에 맞는 은혜만큼 좋은 것이 있을까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과일도 제 때에 나오는 것이 가장 맛있습니다. 은혜도 때에 맞는 것이 좋지만 우리는 항상 그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를 짜증 나게 하고 화를 돋운다고 가정해 보죠. 그 순간 저는 인내할 수 있는 은혜를 원하지만 얻지 못하면 화를 내고 맙니다. 십 분이 지나면서도 여전히 참고 있지만, 결국 저는 때에 맞는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이것은 주께서 주시는 약속입니다. 기다리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이여, 이 아침 여러분의 때는 무엇입니까? 바싹 마른 가뭄의 때입니까? 그렇다면 소나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검은 먹구름이 가득한 때입니까? 그렇다면 소나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사업하시는 여러분, 이 아침 여러분의 때는 무엇입니까? 일주일 내내 돈을 잃기만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소나기를 구할 때입니다. 지금이 밤이라면 이슬이 내릴 것입니다. 이슬은 낮에는 내리지 않습니다. 밤에 내립니다. 고통과 시험과 고난의 밤에 내립니다.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하는 약속이 있습니다. 가셔서 간청만 하시면 됩니다.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때를 따라 비를 내릴 것이다" 하는 약속에는 다양한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축복이란 단어는 복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종류의 축복을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비가 내릴 때는 그저 비라는 것 한 가지이지만 은혜는 한 가지도 아니고 같은 결과를 가져오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에 비를 내리실 때는 "축복 소나기들을" 내리십니다. 

 

어떤 사역자들은 교회에 소나기가 내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일을 소나기처럼 보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일을 소나기처럼 보내신다면, 하나님은 위로의 소나기도 보내실 것입니다. 어떤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진리의 복음이라는 소나기를 보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진리의 복음이라는 소나기를 보내신다면 거룩의 복음이라는 소나기도 보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들은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손에 손을 주고 춤추는 사랑스러운 은혜의 자매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소나기를 보내십니다. 만약 주께서 위로의 은혜를 주신다면 주님은 또한 회심의 은혜도 주십니다. 만약 주께서 파산한 죄인을 위한 나팔을 불게 하신다면 주님은 또한 사함 받고 용서받은 죄인을 위한 기쁨의 함성도 울려 퍼지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축복의 소나기를 보내실 것입니다.


자, 성경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저희는 그 약속을 설명하고 적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 책에는 숨겨져 있습니다.
값을 알 수 없는 진주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풍성한 약속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교회로서 그것을 보았는데요. "그것이 우리의 것입니까?"라고 물으면, 제 생각에는 대부분의 분들이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우리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때에 맞게 축복의 소나기를 우리에게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약속이 우리 것이라면 약속만큼이나 계명도 우리의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를 축복으로 만드시도록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분들은 자신이 젊었을 때는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만약 오십이라면 여러분은 아직 노인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까? 여러분이 지난날에 하셨던 일을 나누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저는 여러분 중의 일부가 어떤 분이셨는지 압니다. 한때는 밝게 빛나셨던 분이지요, 그렇지만 최근에는 여러분의 촛불이 다듬어지지 않아서 그다지 밝게 빛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적인 염려는 거두어 가시고 여러분의 촛불을 조금 다듬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전에는 초를 다듬기 위한 심지 가위와 받침대가 있지만, 소화기는 없습니다. 만약 이 아침 여기에 오랫동안 심지를 다듬지 않아서 빛이 희미한 양초가 있다면 저는 그에게 소화기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항상 심지가위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제가 불을 밝히러 왔을 때 처음 생각한 것은 심지를 다듬는 것이었습니다. 제 설교의 의도도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의 심지를 조금 다듬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 시온이여 너는 티끌을 떨어 버릴지어다! 오 그리스도인이여 잠에서 깰지어다! 전사여 너는 갑옷을 입어라, 군병들이여 각자의 칼을 잡아라! 대장께서 전쟁의 경보를 울리신다. 오 게으른 자여 왜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가? 오 하늘의 상속자들이여,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그 많은 일을 하셨는데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구속의 긍휼로 사신바 되었고, 사랑과 온유함으로 띠를 부른 바 되었으니,


"이제 신성한 기쁨의 함성을 외칩시다"

 

그리고, 함성과 함께 전장으로 나갑시다!


작은 씨앗이 이렇게 자랐으니 그것이 무엇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변함없이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합시다. 예수님을 위하여 일합시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사람들에게 이렇게 좋은 기회가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시저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있는 법, 기회를 잘 타면 성공에 도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기회를 잡으시겠습니까? 항구 입구를 넘어갑시다! 천국의 배여 네 돛을 활짝 펼쳐라! 천이 말리지 않도록 하여 바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앞에 놓인 어려움의 바다를 가로질러 갈 수 있게 하라.


오! 그 마지막 날에는 이 경멸받는 땅에서도 빛을 보게 하소서! 오 주여! 이곳에서 첫 파도가 일어나 다른 파도로, 그리고 또 다른 파도로 움직이게 하셔서 그리하여 마침내는 시간의 모래를 휩쓸고 영원의 바위에 부딪혀 떨어지며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전능하신 주께서 통치하시도다" 외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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