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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자 : 1855년 5월 20일 주일 아침
■ 설교 장소 : 영국 런던 스트랜드(Strand) 북쪽에 있는 엑서터 홀(Exeter Hall)
■ 설교자 : THE REV. C. H. SPURGEON
■ 설교 제목 : 용서, Forgiveness
■ 본문 참조 사이트 : https://www.spurgeongems.org
■ 설교 내용 :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3:25"
"구원의 말씀"이라 불리는 성구들이 있습니다. 다른 성구들보다 영혼의 회심에 더 풍성한 축복을 주는 그러한 말씀들입니다. 우리가 그 말씀들이 어떻게 쓰였는지, 왜 쓰였는지 찾지 못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몇몇 구절들은 다른 성구들보다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하는데 더 많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 구절들이 더 영감이 있다기보다는 문맥과 어법에서 독자의 시선을 더 끌고, 영적 상태를 더 끌어올리는데 적당한 주목받는 구절들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하늘에 있는 모든 별들이 아주 밝게 빛나지만, 항해자들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데 사용하는 별들은 몇몇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특별한 그룹에 속한 몇몇 별들이 쉽게 인식되고 시선을 그것에 주목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특별히 주의를 끌고 죄인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하는 그러한 구절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연히도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러한 구절들 중에서도 으뜸인 구절입니다. 제 경험상 이 말씀은 가장 유용한 구절이었습니다. 제게 와서 자신의 회심과 경험을 말했던 수백 명의 사람들 중에서 수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선포하는 이 귀한 말씀을 읽고, 듣고, 마음에 새겨 그들의 영혼에 능력으로 적용함으로써 신성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주께서 제 영혼을 만져주실 것이므로 이 아침 그러한 구절을 다루게 되어 기쁘지만, 반면에 저의 부족함으로 이 구절을 망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을 성령의 도우심에 절대적으로 맡길까 합니다. 그리하여, 제가 말하는 모든 것은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이 되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최대한 제 생각을 배제한 상태로 전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이 아침 우리가 먼저 다룰 것은 긍휼의 대상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시고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긍휼의 행위를 살펴볼 것입니다. "나 곧 나는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세 번째로는 긍휼의 이유로 "나를 위하여"이고 네 번째는 긍휼의 약속으로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입니다.
I. 우선 우리는 긍휼의 대상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 모두가 잘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아마도 이 자리에는 죄인들의 괴수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빛과 지혜를 거스려 죄를 지은 사람들, 죄를 위해 자신의 온 힘을 쏟아부은 사람들이지요. 스스로 정죄하며 자신에게는 긍휼도 용서도 없을 것이라며 두려움으로 이곳에 오신 분들입니다. 저는 지금 그분들에게 우리의 영광스러운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에게 설명드리는 여러 특성들 가운데서 스스로의 상태를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함 받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성경을 한 장 넘기면,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을 바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이 있는 이사야 43장 22절을 보면 여러분은 우선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그런데, 이 아침 이 자리에 앉아 계시거나 서 계신 분들 중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혹시 제가 의자를 따라 걸어가며 "당신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하며 손가락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지적하면 어떨까요?
아니면, 제가 이 단상에서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손을 내밀며 "당신은 골방에서 마음을 다해 그분과 대화를 나누지 않으셨죠?"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많은 형태의 기도를 반복했을 수 있지만 그들의 입술에서 생명의 말들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죄인들이여, 여러분은 지금까지 간절한 기도 없이 지금까지 왔지만,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두려움으로 여러분의 입술에서 기도가 나오고, 병상의 고통 중에서 간절한 부르짖음이 있었다면 그것은 죽음의 고통이 여러분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는다면 그 힘들었던 때의 느낌은 곧 잊힐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끊임없이 기도를 실천하고 계십니까?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얼마나 많은 분들이 나는 기도하지 않았다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습관이 없다고 고백해야만 할까요? 기도하지 않는 영혼은 그리스도가 없는 영혼입니다. 자주 주님의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는 한 그리스도와도 하나님과도 진정한 교제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태에 있지 못함에 스스로를 정죄하며 탄식하고 계시다면,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다" 그렇지만,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이 긍휼의 말씀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을 같은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로워하였으며" 바로 신앙을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서 "당신은 신앙을 경멸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사랑하지 않는군요"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너무나 많은 분들이 주일을 일주일 중에 가장 힘든 날이라고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주일 오후면 장부를 들춰보고 있지 않나요?
만약 여러분에게 안식일에 예배를 두 번 드리도록 강제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가장 크고 끔찍한 고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는지요? 안식일을 보내며 뭔가 세상적인 즐거움을 찾아야만 합니다. 결과적으로 교회 모임이 깨지지 않기를 바라거나 안식일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여러분 중에는 오히려 안식일이 일주일 중에 가장 지루한 날 아닙니까? 그분들은 안식일을 힘들어하고 안식일이 끝나면 기뻐합니다.
이런 분들은 어떤 시인이 표현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여, 주의 행사가 선하시나이다,
주의 이름을 높이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나이다"
이분들은 시온의 궁정에서 쫓겨나는 고통을 모릅니다. 그곳은 신성한 백성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하지도, 거룩한 장소가 베델, 즉 하나님의 집이 된 것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그곳은 바로 천국문입니다. 그들은 결코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
"이곳과 같은 공간에
나는 기꺼이 머물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기쁨을 위해
앉아서 노래하리라"
아! 이분들에게 신앙은 친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피곤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그 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이 아침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 거짓 없는 회개로 내게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말씀에서 지목하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한번 살펴볼까요. 그들은 감사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사야 43:23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그들은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가축과 양 떼들 모두 번성하여 몇 배로 늘어났으나 그중의 작은 소 한 마리도 감사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작은 새끼 한 마리도 결코 그분께 번제로 드리지 않았고 그저 땅에 뿌려진 도토리를 게걸스럽게 찾는 돼지처럼 된 것입니다.
선물을 받았지만 그것을 주신 전능자에게 결코 감사하지 않는 육신적인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작은 닭조차도 시냇물을 마시면 물을 공급하신 하나님께 마치 감사하듯 머리를 듭니다. 그렇지만, 이분들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았지만 자신들의 양 떼 중의 한 마리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우리 교회에 오시는 분들 중에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금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누군가 저희에게 미국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마치 그 사람과 같습니다. 그 미국인은 신앙이란 일 년에 몇 센트 정도면 충분한 값싼 것이라며 떠벌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신실한 분은 그 사람을 보며 "주여 저 당신의 작고 인색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저런 신앙보다 낫지 못하다면, 풍성하게 내놓을 수 있는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전혀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목요일밤 설교하면서 "이사야 43:24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서 뭔가를 받으실 필요는 없지만 그분은 작은 예물을 좋아하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이후에도 여러분의 예물을 받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분의 눈에는 아주 작은 것이겠지만 친구에게서 온 것이므로 훌륭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여러분 중의 일부는 자신의 돈으로 산 향품을 그분께 가져온 적이 결코 없습니다. 그분을 높여드리는 찬양을 결코 부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운으로 돌리고 자신이 얻은 모든 것은 자신의 손으로 수고하여 얻은 것이라 자랑합니다. 그러니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하여 그 누구에게도 감사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들의 마음입니다. 천지의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고 자신에게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여러분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이러한 여러분의 죄를 기꺼이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여러분에 대해서도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보면 "이사야 43:24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사람들은 쓸모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하죠. 그런 목적 하에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모든 것을 만드셨고, 그것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그렇지만, 이 아침에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 자신의 일생을 통하여 단 한 번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적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자신이 한 일을 물어보셨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역사를 써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3천 년 동안 화석으로 있었던 두꺼비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의 역사를 쓸 수 있겠지만 아무것도 한일은 없습니다. 어떤 영혼을 구주께 인도한 적이 있습니까? 그분의 이름을 얼마나 높여 드렸나요? 그분을 위해 봉사하거나 일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한일을 무엇입니까? 오히려 다른 나무들이 잘 자랄 수도 있는 땅의 양분을 빼앗아 위대하신 농부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땅의 방해꾼은 아니었습니까? 아니면 적어도 그분이 받으실 가치가 없는 불쌍한 몇 마리의 게라도 되었습니까?
세상도 또한 여러분이 한 모든 일을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적어도 여행자의 발걸음을 밝혀주는 반딧불이만큼의 소용도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아마도 여러분이 없어지는 것을 좋아하고, 여러분이 가버리면 기뻐할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연결된 사람들의 영혼을 파괴하는데 일조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청년을 처음으로 맥주집에 데려간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끔찍한 맹세를 했던 때도 기억할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의 자녀가 듣고 그대로 배우는 거죠. 여러분은 지금도 여러분을 따라 하며 지옥으로 가고 있는 영혼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에서 철침대에서 일어나 비통함에 울부짖는 영혼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나를 여기로 인도했지? 누가 내 영혼을 파괴했지? 바로 당신이 내 저주를 만든 장본인이야!"라고 울부짖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는 것이 사실입니까? 제기한 문제들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까? 지금도 여전히 여러분의 큰 죄를 회개하지 않을 것입니까? 혹시 그럴지라도 저의 주님은 제가 이 말씀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또한, 신성한 죄인, 시온의 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악의 죄인들입니다. 보통 어떤 사람이 큰 죄를 고백하고 나서 자신이 했던 일들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느낀다면 저는 그가 경건한 부모의 자녀였는지 여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신음하고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들의 비통함을 표현하는 소리 없는 언어입니다.
제대로 된 언어라면 이럴 것입니다. "저는 경건한 부모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가장 최악의 죄인임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부모님께서는 저를 신앙 가운데서 키우셨지만 저는 그것을 거부하고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최악의 죄인은 시온의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빛과 지식에 대하여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이 말하듯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넘어서 자신의 길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가장 최악의 길은 십자가를 넘어서 가는 것입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여러분 중에 많은 분들은 여러분이 사랑하시는 어머님에 의해 하나님께 드려졌고, 여러분의 아버님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을 읽고 사랑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디모데처럼 키워진 것입니다. 구원의 방법에 대한 교리를 잘 이해하고 있지요, 그렇지만 여기에 오신 청년들의 일부는 하나님의 적이고 그리스도가 없으며 그분의 말씀을 경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비웃기까지 합니다. 비웃지 않더라도 신앙이 자신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말이 아니더라도 행동으로 예수께서 죽으셔야 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아!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고 있지만, 저 자신을 빼놓을 수는 없죠. 만약 제가 지옥에서 깨어나는 것의 저의 분량이라면 저는 그곳에서 가장 끔찍하게 저주받은 사람들 중에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가장 경건한 훈련을 받았고 시온의 죄인들과 함께 있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이 자신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두렵지 않습니까?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과연 우리 중에 삼키는 불에 던져질 사람은 누구인가?" 여러분은 두려움에 떨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주님 이름으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요. 그분은 회개하는 죄인들에게는 사랑과 긍휼만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 여호와께서 지금 선언하십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여기 우리 중에는 하나님을 지치게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사야 43:24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여러분은 신학교수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교회의 한 일원이었던 20년 전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을 보고 계십니다. 이 사람은 분명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의 길로 갔습니다. 때때로 그의 입술은 맹세로 오염되었고 그의 영혼은 죄의 종이 되었으나 지금도 종종 그는 교회에 나옵니다. 가끔씩 그는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분명 나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거야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지금보다는 나을 거니까"
그는 스스로 자책하며 마음으로 괴로워하면서 울며 서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주목해 보십시오. 이 아침 그가 떨며 이 거대한 집회에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의 회심이 아침 구름이나 이슬처럼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전환점이 온 것입니다. 벡스터가 말하던 것처럼 지금 아니면 결코 기회가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 아니면 사탄입니다. 지금 주께 받아들여지거나 아니면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불쌍한 배도자들이여 주께로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그분은 여러분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모든 죄를 도말하실 것입니다. 죄를 도말하시고 영원히 기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룬 것들은 긍휼을 받을 사람들의 특성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의 일부는 "당신은 우리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는 것 같군요"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예,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우리를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정직하고, 도덕적이며, 올바른 사람들입니다"라고 외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저는 그분들에게 전할 복음이 더 이상 없습니다. 여러분이 원하시면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가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많은 예배당에서 도덕적인 설교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죄인들에게 설교하러 왔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바리새인 여러분에게는 이 말 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의롭고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결국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했던 말들은 모든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면전에서 영원한 추방이 될 것입니다.
II.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긍휼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사람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긍휼이라는 행위는 무엇일까요? 우선 용서의 행위입니다. 저는 이 용서를 말할 때 먼저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신 신성한 용서를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만이 가능한 유일한 용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죄를 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 가톨릭 사제든 그 누구든 그 어떤 성직자도 주의 이름으로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 한다면 그것은 가증스러운 신성모독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저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저는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께 잘못했다면 저는 그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유일하고 꼭 필요한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뿐입니다.
제가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왕이나 여왕이 저를 용서하지 않고, 제 형제들도 저를 용서하지 않고 저 스스로도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고 가정해 보지요. 만약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면 그것은 제 구원을 위해 필요한 전부입니다. 아마도 저는 나라법으로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살인을 저지른 자라면 처형대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하지요. 여왕은 저를 사면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입장에서 보면 사면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여왕의 사면을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를 보고 수군거리며 제가 없어지길을 바랄 정도로 제가 버림받은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저의 죄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을 안다면, 제가 사랑들의 용서를 바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것들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시면 그것을 충분합니다. 만족스러운 용서를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용서는 양심의 가책을 덜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독선적인 바리새인은 미혹의 요람에 잠들도록 자신을 사제들의 손에 맡기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신에 찬 불쌍한 죄인은 사제들의 오만 말이나 마법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가 나를 위하여 너의 죄를 도말하노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 다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음을 느낍니다.
다시 말하지만 참으로 놀라운 용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 곧 나는"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 자신이 죄가 사함 받는 것에 대해 놀라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반복하여 우리 중 그 누구에 그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도록 하셨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특히 자신의 죄와 그 위험성을 처음으로 깨달은 불쌍한 죄인에게는 더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좋아 보이고, 자신의 닫혔던 마음이 열리는 것을 느끼며 놀랍니다. 주께서 베푸신 긍휼은 너무나 압도적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한 도시를 공격할 때 성문 앞에 불을 하나 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약 주민들이 불이 꺼지기 전에 항복하면 그들을 살려주었고, 만약 불이 먼저 꺼지면 그들 모두를 죽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주님은 이것보다 훨씬 더 자비로우십니다. 만약 그분이 은혜만을 나타내셨다면 작은 불이 켜졌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어야 할까요?
이 자리에는 칠십이나 팔십의 연세를 가지신 분들도 계시는데,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여전히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한번 꺼지면 모든 용서의 소망도 사라져 버리는 빛이 있습니다. 바로 생명의 빛입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여러분 보십시오. 여러분의 양초는 거의 다 탔습니다. 남은 거라고는 밑동 조금입니다. 여러분이 칠십 년간 이곳에서 죄가운데 살고 계셨지만 하나님의 긍휼 하심은 여전히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이 세상을 곧바로 떠나신다면 저를 주목하시겠지만, 그때는 여러분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놀라운 은혜, 긍휼의 말씀은 여전히 선포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등불이 타고 있다면,
가장 악한 죄인이라도 돌아올 수 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주의 긍휼입니다. 지옥에서 아무리 검게 나왔더라도 주께서 희게 씻을 수 있으십니다. 어떤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나왔다라도 주께서 용서할 수 없거나, 용서하고 싶지 않은 죄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라고 놀아운 사실을 선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용서는 현재의 용서라는 것입니다. 나는 네 허물을 도말할 자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지금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은 것을 이번 생에서는 알 수 없다고 믿고 있거나 적어도 그렇게 상상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각에는 이런 분들은 결국 균형을 잡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정말로 주의 용서를 구하고 간절히 바라는 불쌍한 영혼에게는 만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며, 죄인이 믿는 순간 언제라도 그 일을 행하실 것이란 축복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달려 돌아가신 그분을 믿는 순간 그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는 것입니다. 혹시 그가 여전히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용서받습니다. 만약 제가 주의 용서를 받은 후 팔십까지 산다면 분명 저는 수많은 잘못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용서는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미래의 수많은 잘못들까지 유효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형벌을 감당하셨고 하나님은 결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영광스러운 율법의 성취를 우리에게 요구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에는 불의가 있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잃는 것보다 용서받은 이를 잃는 것이 더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보증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결코 제 빚을 두 번 갚으라고 하지 않을 실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온 땅의 하나님께 불의를 돌리지 마십시오.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한 죄에 두 번의 형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가장 악한 죄인이었다면 여러분은 가장 큰 용서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은 그것을 지금 바로 주실 수 있으십니다.
저는 이 용서의 완전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빚쟁이에게 가서 "내가 갚을 것이 없소"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죠. 빚쟁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압류할 수도 있고, 감옥에 쳐 넣을 수도 있어" 그런데, 여전히 여러분은 갚을 것이 없고, 채권자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만 하는 상황임에도 그 채권자가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할 것이다"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놀라서 선 채로 말합니다 "제가 당신에게 수천만 파운드의 엄청난 빚을 졌는데 그것을 탕감하시다니요.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채권자는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런데,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요? 빚 문서가 남아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채권자는 빚문서를 모두 가져다가 여러분에게 넘겨주며 말합니다. "완전히 갚았다. 나는 모든 것을 없애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회하는 자를 다루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모든 빚이 적힌 책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여러분이 어긴 규례의 내용들을 모두 지우십니다. 빚 문서는 파쇄되고 그분은 여러분에게 빚을 갚도록 다시 요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탄은 마틴 루터에게 한 것처럼 반대로 가끔씩 죄책감이 들도록 할 것입니다. 루터가 사탄에게 "내 죄의 목록 가져와 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사탄이 어둡고 긴 두루마리를 가져오자, 루터가 "그게 전부입니까?" 하자 사탄은 "아니" 하면서 또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영웅적인 성도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두루마리 끝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셨다'라고 쓰시오. 그러면 완전히 갚은 것이지"
III. 세 번째로 긍휼의 이유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불쌍한 죄인이 말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용서하시는 거죠? 확신하기는 그분이 그렇게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긍휼을 받을만한 일을 한 적이 없거든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너를 위하여 용서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저는 충분히 감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지, 그러나, 나는 너의 감사 때문에 너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름을 위해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 만약 제가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앞으로 제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의 가장 좋은 날들을 사탄에게 바쳤기 때문이죠. 오 하나님, 제 삶의 지저분한 찌꺼기들은 분명 하나님께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것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네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십니다. "나는 너와 함께 할 수도 너 없이 할 수도 있다. 수많은 언덕의 소들은 내 것이며, 내가 원한다면, 나를 섬기는 가장 위대한 군주나 가장 유창한 설교자만큼 명성이 있는 인류 전체를 창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할 수도 그들 없이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다"
여기에 죄인들을 위한 희망이 있지 않습니까? 용서받기에는 자신의 죄가 너무 크다며 간청할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죄인을 위하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용서하신다는 것을 보면 여기에서 죄의 크기와 양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으십니까? 어떤 의사가 환자가 누워있는 병상을 찾았습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저를 봐주시는데, 저는 드릴게 아무것도 없네요." 의사는 "아닙니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해드리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제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환자분이 얼마나 오래 사는지는 저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제 실력을 발휘하고 세상으로 하여금 제가 질병을 고칠 실력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름을 얻었으면 하는 것이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긍휼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죄가 크다면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더 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불쌍한 죄인들이여 당신들이 헐벗고, 불결하고, 가난하고, 비참하며 악하고, 모든 것을 잃고, 죽을 정도라도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께로 가십시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그분입니다.
"이것은 그분이 너에게 주시는 것,
떠오르는 그분의 성령의 빛"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를 위하여 용서할 것이다"
IV. 이제 결론으로 긍휼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조차도 하실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가 전능하신 분인 것은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하실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버리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언약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입니다. 바로 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가요? 우리 유한한 피조물은 많은 것을 잊어버리지만 전능자께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별을 세시고 각각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 거대한 바다에 얼마나 많은 미세한 유기체가 있는지 아시는 하나님, 여름 대기 중에 떠다니는 모든 먼지 알갱이를 인식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숲의 모든 잎사귀를 알아주시는 하나님께서 기억하는 것을 멈출 수 있으실까요?
아마도 우리는 "아니요"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행위 수행이라는 절대적인 사실에 관한 것이 아니라, 표현에 있어 완전히 정확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잊으신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요?
우선, 우리가 마침내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그분은 우리의 죄에 맞는 형벌을 내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많은 고발자가 있을 것입니다. 마귀가 와서 "저 사람은 큰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면, 하나님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라고 하십니다. 고발자가 "저 사람은 당신에게 반역하고 당신을 저주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므로 나는 그것이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양심은 말하지요 "아! 그렇지만, 하나님,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가장 지독한 죄 맞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기억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지옥의 모든 악마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귀에 떠들라고 하고, 아주 열심히 우리 죄의 목록을 외치라고 해라, 우리는 그날에 담대하게 서서 "로마서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노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조차 안 하시기 때문입니다.
재판장이 기억하지 않는데 누가 그것을 처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불의하고 악했으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잊으셨습니다. 주께서 잊으신 것을 그 누가 다시 기억나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주께서는 "미가 7:19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건질 수 있는 얕은 물이 아니라 사탄도 찾을 수 없는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하여 기록된 그러한 죄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애셨으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의 보혈로 모두 사라졌고 깨끗해졌습니다.
이 말씀의 두 번째 의미는 죄를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심도 안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한 아버지에게 제멋대로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허랑방탕한 삶을 살기 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아들은 참회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나는 너를 용서할 것이다"라고 했지요. 다음날 그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먼 마을에 할 일이 있고 여기 그 일을 하기 위한 돈이다." 그렇지만 그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믿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스스로에게 말하기를 "전에는 돈에 대해서 아들을 믿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강탈했고 이제 그를 믿기가 두렵다"
그러나,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과거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귀중한 은사를 가진 그분의 백성들을 신뢰하십니다. 그분의 백성들을 결코 의심하지 않으십니다. 단 하나의 의심스러운 생각조차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백성들이 마치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는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분의 복음을 전하도록 할 것이며, 주일학교에 들어가게 하여 그 아들의 종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상급을 베푸실 때에도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탕자의 허물을 너그럽게 넘겨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아버지가 죽을 때가 되어 유언을 전할 때의 모습은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아버지 옆에 있는 변호사가 유언을 읽어 내려갑니다. "항상 올바르게 행동했던 윌리엄에게 많은 것을 물려주마. 다른 아들에게는 어느 정도 줄 것이고, 딸에게도 넉넉하게 물려주마. 그런데, 내게는 탕자가 있지. 그가 어렸을 때 나는 그에게 많은 돈을 썼지. 그렇지만, 그는 받은 것들을 모두 허비해 버렸어. 그를 다시 받아 주었고 지금은 잘 지내고 있지.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그와 다른 자식들 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내가 그를 용서했지만 그를 다른 형제와 똑같이 취급한다면 그것은 불공평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는 변호사는 다른 형제들에게는 아마도 수천 파운드를 주었지만 탕자에게는 몇백 파운드를 줍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여러분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두에게 기업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괴수에게도 최고의 성인에게도 천국을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몫을 나누신다면 막달라 마리아를 베드로만큼 높여주실 것이고 도둑을 요한만큼 높여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십자가에서 죄를 담당하고 죽으신 그분은 가장 도덕적이 사람입니다. 여기에 축복의 잊음이 있습니다.
불쌍한 죄인들이여 이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신비한 힘에 의해 십자가 아래로 이끌리십니까? 그렇다면 저는 주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제 삶의 한 목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영혼을 얻는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 삶이 축복스럽게도 그런 삶이라면 제 삶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저의 죄는 용서받기에는 너무 커요"라고 말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하늘이 땅에 비할바가 아닐 만큼 높듯이 하나님의 긍휼 하심은 여러분의 죄보다 훨씬 크고 그의 은혜는 여러분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아, 그렇지만, 하나님은 나를 받으시지는 않으실 것에요"라고 말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히브리서 7:25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 본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6:37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요한계시록 22:17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럼에도 여전히 "저는 포함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마시고, 믿는 자가 되십시오. 오! 제게 힘이 있다면, 하나님은 제가 여러분의 영혼을 얻기 위하여 눈물을 흘릴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의 마음은 증명한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것을 위해 울 수밖에 없다.”
저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를 용서하신 이후로 저는 그분의 사랑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떠났었고 그분의 책망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음성이나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축복의 성경 말씀은 읽지 않았고, 기도하려 무릎을 꿇지도 않았습니다. 눈은 허망한 것만 바라보았지요. 그런데, 그분이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나요? 용서하지 않으셨나요? 그분은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기 전에 그분의 택하시고 구속하시며 용서하시고 살리시는 긍휼 하심 가운데 있는 거져 주시는 은혜를 선포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오! 제가 지옥에서 나왔고, 정죄에서 벗어났으니 저는 얼마나 크게 노래해야 할까요. 그리고, 제가 지옥에서 나왔다면 왜 여러분은 아니겠습니까? 제가 구원을 받는 다면 왜 다른 사람은 아니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라 할 수 있는 막달라 마리아나 다소의 사울도 받으셨는데 왜 여러분은 버려졌다고 어리석은 결론을 내리십니까? 오! 불쌍한 참회자들이여, 여러분이 세상을 떠난다면 여러분은 어리석은 결론을 내린 첫 참회자가 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여러분에게 축복을 내리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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