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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자 : 1855년 5월 13일 주일 저녁
■ 설교 장소 : 영국 런던 스트랜드(Strand) 북쪽에 있는 엑서터 홀(Exeter Hall)
■ 설교자 : THE REV. C. H. SPURGEON
■ 설교 제목 : 마지막 싸움에 대한 단상, Thoughts On The Last Battle
■ 본문 참조 사이트 : https://www.spurgeongems.org
■ 설교 내용 :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린도전서 15:56-57
성경의 언어는 말할 수 없이 숭고하지만 가장 시적인 책 중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이 얼마나 사실에 충실한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을 가로막거나 진실을 얼버무리지 않습니다. 주제가 아무리 어두워도 성경은 그것을 빛으로 밝혀주지만 그것과 관련된 어둠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바울의 서신서 중에서 언어의 걸작이라고 칭송받는 이번 장을 읽는다면, 여러분은 바울이 죽음 이후에 다가올 기쁨과 영광을 말하고 있으며, 여러분 스스로도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지금 바로 떠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음의 말씀을 읽고도 기뻐하지 않고, 마음이 들뜨지 않으며, 성령의 불로 가득 차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15:52-55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장엄한 언어 구사와 수려한 웅변이지만 바울은 죽음이 우울하고 어두운 것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묘사하고 있는 것들 조차도 그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비웃지도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죽음을 괴물로 묘사합니다. 죽음이 쏘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 쏘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승리의 환호 가운데서도 바울은 그 승리를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오늘의 말씀과 같은 본문을 택할 때면 저는 이런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설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를 압도하는 생각은 말조차도 어물거리게 합니다. 이 놀라운 본문의 위대한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웅변력을 하나로 모은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제외하고 제가 그 어떤 사람도 하지 못했던 말을 할 수 있더라도 저는 이 말씀과 같은 방대한 주제를 다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할 수 있는 척하지 않겠습니다. 대신에 저의 마음이 산출할 수 있는 수준에서 몇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밤 저희는 세 가지를 말씀드릴 것입니다. 첫째는 죽음의 쏘는 것, 둘째는 죄의 능력, 그리고 셋째는 믿음의 승리입니다.
I. 첫째로, 죽음의 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죽음을 무서운 용이나 괴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닥쳐서 각자 자신을 위해 싸워야 하는 대상입니다. 혹여 어떤 사람은 피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주지 않습니다. 죽음의 강을 건너갈 수 있는 다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죽음 없이 이 존재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갈 수 있는 희미한 희망마저도 주지 않습니다. 그는 괴물을 우리의 삶의 경로를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각 사람이 홀로 그것과 싸워야 하며 각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암흑의 강을 건너야만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철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죽음 없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경로는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벗어날 희망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는 우리가 대면할 전투를 위해서 우리의 신경을 바싹 곤두 세우지만 우리가 괴물을 물리칠 수 있다는 희망은 주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검으로 괴물을 찌르고 죽음을 뒤집어 압도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용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이길 수 없어. 당신이 용의 목을 밟고 용의 머리 부술 수 있다는 희망은 전혀 없지. 그런데, 한 가지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용의 독침을 빼내는 것이야. 당신이 죽음을 발아래로 짓밟을 수는 없지만, 쏘는 독침을 빼내기만 한다면 더 이상 괴물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 괴물은 더 이상 괴물이 아니고 당신을 천국으로 끌어올릴 천사가 될 것이야"
그렇다면, 용의 쏘는 것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어디를 공격해야 할까요? 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죽음의 쏘는 것은 죄"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일단 그것을 잘라버리면 죽음이 무섭고 엄청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괴물의 쏘는 것이 여전하면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제 "사망의 쏘는 것은 죄"라는 사실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1. 첫째로, 죄가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볼 때 죄는 죽음 안에 쏘는 것을 둔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죽음이 형벌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사람들은 죽음을 조금 더 호의적으로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만약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어떤 수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살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지구에 살았었는데 그 모든 수효를 가늠하기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들 모두를 위한 충분한 공간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적절한 때가 오면 우리를 데려갈 어떤 수단이 마련되어 우리를 천국까지 안전하게 인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처럼 각 사람을 위한 불말과 불병거를 준비하셨을 수도 있고, 에녹처럼 우리 각사람이 "창세기 5:24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고 선언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는 것, 이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되는 것을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것은 불명예스러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짧은 시간을 빨리 살다가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은 영혼의 가장 높은 열망에 걸맞은 가장 높은 영예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경건하고 믿음이 깊은 사람의 기도 중에서 가장 숭고한 기도는 "주여, 저의 떠날 시간을 당겨 주시어 주와 함께 있게 하소서"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죄 없는 존재가 떠남을 생각하면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문은 지금처럼 철문이 아니라 진주와 상아로 된 것이었을 것이고, 강도 지금처럼 "죽음의 괴로움"과는 다른 단 약수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 얼마나 달라졌는지요! 죽음은 이제 죄의 형벌입니다. "창세기 2:17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아담의 죄로 인하여 우리 모두는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었고, 죽음이 형벌이 됨으로써 사망은 쏘는 것을 가진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사람, 가장 거룩한 그리스도인, 가장 성결한 지성인, 하나님과 가장 가깝고 친근한 교제를 나누는 영혼에게도 사망은 쏘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사망의 어미이기 때문입니다. 오 죄가 낳은 운명 같은 사망이여, 내가 너를 두려워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너의 부모는 죄이기 때문이다. 만약 죽음, 네가 영광스럽게도 나에게 온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요단강을 헤엄쳐 갈 수 있을 것이다. 내 주위로 거친 물결이 몰아치더라도 나는 그 가운데서 미소를 지을 것이다. 그리고 요단강의 울부짖음 가운데서 내 찬양 소리도 울려 퍼질 것이다. 물소리와 내 찬양소리가 하나가 되어서 울려 퍼질 것이다. "할렐루야! 영광의 땅으로 건너가는 것은 축복이로다" 이것이 사망의 쏘는 것이 죄인 한 이유입니다.
2. 그렇지만, 저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도 보게 됩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라는 말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사망을 사람에게 가장 끔찍하게 만드는 것은 죄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비록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정확한 의도가 아니더라도 제가 이 말씀에서 찾을 수 있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만약 저에게 죄가 무겁게 지워지고 용서받지 못한다면, 저의 죄과들이 용서받지 못한다면, 비록 제가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알고 즐거워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죄는 저에게 사망의 쏘는 것입니다.
임종 직전에 있는 한 남자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장면을 상상해 보겠습니다. 그 사람은 사망의 쏘는 것을 발견할 것이고 그 쏘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의 죄일 것입니다. 한 정복자의 임종을 상상해 보겠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혈기 왕성한 사람으로 막사에서 자란 그의 입술은 나팔과도 같았고 그의 손으로는 아주 어릴 적부터 북을 쳤습니다. 전사의 정신을 가졌고, 명성과 사람들에게 갈채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전장의 먼지와 피로 물든 갑옷을 사랑했습니다. 그야말로 사람들이 영광이라 부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도시들을 쓸어버렸고, 나라들을 정복했으며, 대륙을 황폐화시켰고 세계를 호령했습니다. 입구에 걸린 그의 깃발들과 영광스러운 장식들을 보십시오. 그는 지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전사 중의 한 명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의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앞두고 무엇이 그의 죽음을 두렵게 할까요? 그것은 그의 죄일 것입니다.
한 군주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누워있는 상태입니다. 그의 주위로 귀족들과 참모들도 있지만 다른 존재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의 바로 곁에는 죽은 자들의 나라, 하데스에서 온 한 영혼이 서 있습니다. 죽은 여성의 영혼입니다. 그 영혼이 그를 바라보며 "이 괴물아! 나의 남편은 너의 야망 때문에 전쟁에서 죽었어. 나는 과부가 되었고, 우리 가족은 굶주렸단 말이야."라고 말하고는 지나갑니다.
그녀의 남편이 오더니 피가 흥건한 상처를 활짝 제치며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한때는 내가 당신을 군주라고 불렀었지. 그러나, 당신은 악한 탐욕으로 부당한 전쟁을 일으켰어. 공성전에서 얻은 이 상처들을 봐라. 나는 당신을 위해서 제일 먼저 사다리를 걸고 올라갔고, 이 발로 성벽 위에 올라 승리의 검을 휘둘렀지. 그런데, 결국은 지옥의 고통가운데 눈을 뜬 거야. 이 나쁜 자식아, 너의 야망이 나를 그곳에 쳐 넣은 거야!"라며 그를 향해 눈을 부릅뜨면서 지나갑니다.
그다음에 다른 사람, 또 다른 사람, 또 다른 사람이 무덤에서 깨어나 그에게로 올라옵니다. 그의 침대 주위에 서서 그를 계속 괴롭힙니다. 죽어가는 폭군을 보는 끔찍한 행렬은 계속 이어집니다. 눈을 감아 보지만 그의 이마로 차갑고 앙상한 손이 느껴집니다. 그는 그의 마음속에 사망의 쏘는 것이 있어 떨고 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오 죽음이여! 이 거대한 땅, 이 위대한 왕국, 이 화려함과 권력을 떠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더 끔찍한 것은 저 남자들, 저 여자들 그리고 저 고아들이 나에게 '너도 우리처럼 되려느냐?'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 내가 폐한 왕들과 내가 무너뜨린 왕국들이 그들의 사슬을 덜그럭 거리며 '너는 우리의 파괴자였는데 어떻게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여! 어찌하여 너의 영광과 자랑이 한순간에 무너졌는가!' 하는 말을 듣는 것이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사망의 쏘는 것이 이 사람의 죄임을 볼 것입니다. 그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를 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죄를 지었다는 것, 그가 피를 흘리게 했던 사람이란 것, 그의 손이 엄청난 살인으로 붉었다는 것이 그를 쏘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러한 것들이 그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망의 쏘는 것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인물을 상상해 보겠습니다. 목사입니다. 그는 세상 앞에서 복음을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는 유명한 설교자였습니다. 대중들은 그의 입술을 주목했고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의 웅변 앞에 한 나라가 놀랐고, 수많은 사람들이 떨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설교는 끝났습니다. 그가 강단에 오를 수 있는 시간은 지나간 것입니다.
또 다른 대기 장소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과 그는 자신보다 더 나은 다른 설교자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거기에 그는 누워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책임에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리를 설교하고 사람들의 영혼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 철학을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침대에서 뒤척이자 최악의 상태인, 가장 저주받은 한 사람이 올라와서 그를 바라보면서 말합니다. 그 어떠한 사람도 그 사람보다 상태가 나쁠 수 없는 그러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나는 죄 때문에 떨며 당신에게 왔었지.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하면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지를 물었고, 당신은 이러저러한 착한 일을 하라고 말했지. 나는 그대로 했어, 그렇지만 나는 저주를 받았지. 당신은 나에게 진리가 아닌 것을 말했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않았어." 이런 말을 남기며 그는 사라지고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신앙이 없었던 사람으로 임종을 앞두고 누워있는 목사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아! 당신이군. 나는 당신의 교회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당신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설교를 하더군. 나는 잘 들어 보았어. 당신 입에서 나의 영혼을 태우고 나를 회개케 하는 어떤 진리를 들고 싶었거든. 그렇지만 나는 당신이 이야기하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이 신세가 되었지" 그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듣자 누워 있는 목사는 사시나무 떨듯 떱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는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교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는 흰머리의 노인부터 반짝이는 눈을 가진 젊은이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베개에 누운 상태로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가 들립니다. "가버려! 책임에 충실하지 않았던 사람아! 당신은 화려한 것과 폼나는 것을 버리지 못했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지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다시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오! 저 사역자가 자신의 책임을 방기한채 떠나는 것이나, 죽는 것은 그저 그런 일 일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악은 사망의 쏘는 것은 그의 죄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거칠고 투박한 억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어야 할 그때에 그는 거짓으로 그들을 속이고, 음악으로 매료시키며, 진리 대신에 평화가 없는 곳에서 평화, 평화 만을 말하는 거짓 선지자로 교인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교인들이 그를 따라 지옥을 향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그의 교인들이 한 무리로 그를 따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저런 사람에게 사망의 쏘는 것은 다른 이들을 속인 그의 가장 크고, 엄청난, 가증스러운 죄가 될 것이라는 것은 정말로 사실입니다.
제가 두 가지 사례를 보여 드렸지만, 사실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 해당하는 사례를 보여 드릴 수도 있습니다. 오 주정뱅이에 대해서는, 술잔이 텅 비어 버릴 때를 그릴 수 있고, 달콤하게 마시던 술이 더 이상 입맛에 맞지 않을 때를 그릴 수도 있고, 그동안 마시던 것들이 담즙보다 더 쓰게 느껴질 때를 그릴 수도 있으며, 여러분의 몸이 한 시간 안에 벌레들의 잔치상이 되는 순간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헛되어 보내 버린 삶을 돌아보도록 여러 사례를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 맹세자들이여, 저는 당신들의 맹세가 기억이 나며 당혹감으로 여러분에게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이는 듯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더럽히고 미혹하는 음란하고 사악한 자들이여, 저는 사망의 쏘는 것이 당신들에게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것인지 봅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것도, 고통에 시달리는 것도,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의 죄가 될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remorse, 후회"라는 단어의 스펠링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는 여러분이 이 단어의 끔찍한 의미를 모르시기를 기도합니다. 후회, 후회! 여러분은 이 단어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물다"입니다. 아! 지금 우리는 우리의 죄와 함께 춤을 추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와 함께 즐거운 삶을 살고 있지요. 정오의 태양 아래서 죄와 손을 잡고 즐깁니다, 죄와 함께 춤을 춥니다. 함께 춤을 추며 즐거운 삶을 삽니다. 그렇지만, 그러다가 그 죄들은 우리를 물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어루만지며 놀던 어린 사자가 우리를 물것입니다. 하늘색 빛깔로 우리를 즐겁게 했던 어린 살무사가 우리를 물것입니다. 회환이 우리의 영혼에 자리하게 될 때 우리를 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회환의 아찔한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하지 않겠습니다. 회한은 지옥의 첫 번째 고통이고 구렁텅이로 빠지는 시작입니다. 후회한다는 것은 솟아오르는 지옥불의 불꽃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회환을 느낀다는 것은 영혼 속에서 시작한 영원한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 회개하지 않은 죄가 될 것입니다.
3. 그런데, 과거의 죄가 사망의 쏘는 것이라면 미래의 죄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죄가 무엇이 될지 자주 잘 살펴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씨가 다음에 싹이 나고 다음에 이삭이 되고 그다음에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되는 것을 봅니다. 소망, 상상, 욕망, 시각, 촉각, 행동이죠. 그런데 그다음 단계에서 죄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죄가 자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산처럼 커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이었지만, 나중에는 온 하늘을 검게 덮고 거친 비를 내리는 먹구름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죄의 다음 상태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죽어도 죄는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어디에서 자랐는지 보았지만, 나중에는 어디에서 자랄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죽는다고 죄도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는 순간, 정의의 소리가 외칩니다 "피의 샘을 봉하고, 용서의 물줄기를 막으라. 거룩한 자는 거룩한 상태로 두고, 더러운 자는 그냥 더럽게 두라" 그리고 그 이후로 그 사람은 점점 더 더러워지고 있습니다. 그의 정욕은 스스로 확장해 가고, 그의 악은 더해집니다. 모든 악은 열 배나 더 강하게 불타오르고 그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서 은혜의 구속도 없고 전해지는 말씀도 없이 점점 더 나빠집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어디에서 커갈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종종 우리의 죽음의 시간을 유명한 그림인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에 비유하곤 합니다. 아마 국립 미술관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메두사의 머리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은 돌로 변하게 되지요. 손에 창을 든 한 전사가 있습니다. 손에 창을 쥔 상태로 돌로 변해 서 있습니다. 또 다른 전사는 그의 아래에서 단검으로 그를 막 찌르려는 모습이지만 이제는 움직임도 없는 차가운 암살자의 동상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전사는 매복하듯 살금살금 다가 가지만, 앞에 바위가 있어 머리를 드는 순간 메두사의 머리를 보고 돌이 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제가 죽음을 대면하게 하게 되었을 때 저의 앞에 놓인 것은 영원함이 될 것입니다. 제 영혼이 떠나갈 때, 주께서 제가 주를 찬양하는 것을 보신다면 저는 천국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제가 저주와 욕설을 쏟아내고 있는 것을 보신다면 저는 지옥에서 그렇게 하고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 떠나가면 심판이 찾아옵니다. 제가 죽으면 영원히 살 것입니다.
"급히 내려간 차가운 무덤에서
그냥 주어지는 속죄는 없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영원히, 영원히! 그런데 최근에 형벌이 짧다거나, 하나님께서 영혼을 얼마간 옮긴 다음에 죽게 내버려 두실 것이라고 설교하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대체 어디에서 그런 교리를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읽은 성경에서는 천사가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서서 부활하신 주님을 가리켜 맹세하되 시간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한 영혼이 일천 년이 지나면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백만 년이 걸려서 영혼이 사라질 수 있다면 어찌 되었든 시간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을 말하더라도 거기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천사가 "시간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영원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영혼은 축복 또는 저주를 끊임없이 이어갈 것입니다. 멈추는 시간이 없으므로 결코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멈춘다는 사실은 시간을 암시하지만 시간이 없어지므로 모든 것은 영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있을지 생각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 끝없는 두 개의 바다 사이에 있는 좁은 땅에 서서 떨고 있군요.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어느 쪽의 영원한 미래로 갈지를 말씀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그때가 오면 주께서 우리가 그때에 맞게 준비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때는 도적처럼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게 밤의 어두운 그림자를 통해 올 것입니다. 제가 지금은 이 자리에 서서 이 어두운 것들에 대하여 담대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때가 되면 아마도 놀라고 긴장해서 팔은 펴고 입은 멍해질 것입니다. 오!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영원한 왕이시여, 제가 좋지 않은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을 때 그때를 만나지 않게 하시고, 저의 위대한 창조주를 찬양하며 깊은 묵상 중에 있을 때 그때를 만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 삶의 마지막 순간에 제 영혼의 날개를 원래대로 회복하여 저 푸른 하늘을 올라가 영원히 주와 함께 거하게 하소서
"죄와 슬픔의 세상에서 떠나
영원히 주와 함께 거하네"
II.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저는 어떻게 이 괴물과 싸울지를 사망의 쏘는 것을 뽑아내고 부서뜨리는 것으로 보여드렸습니다. 저도 스스로 그 싸움을 준비합니다. 제가 죄를 지었고 그래서 사망의 쏘는 것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제가 노력할 때면 그 괴물은 면전에서 저를 비웃으며 이렇게 외칩니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다. 네가 죄를 파괴할 수 있기 이전에 너는 먼저 어떤 식으로든 율법을 지켜야만 하지. 네가 눈물을 흘린다고 해도, 좋은 행위를 한다고 해도 죄는 없어질 수 없어, 율법은 죄의 권능이기 때문이지. 네가 율법의 무게를 감당할 때까지, 네가 율법의 요구를 모두 지불할 때까지 나의 쏘는 것은 없어질 수가 없어 왜냐하면 죄의 바로 그 권능은 율법이기 때문이다" 이제, 저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는 이 교리를 설명해야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죄가 전혀 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죄를 많이 지을 수는 있죠. 그렇지만, 우리는 회개할 것이고, 남은 생은 점점 나아질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긍휼 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성직자들도 종종 죄를 사소한 것처럼 말하곤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볼까요? 거기에는 깊은 회개도 필요치 않고, 주의 은혜가 미치는 진정한 내적 역사도 없습니다.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피에 맡기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공의를 이루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어렴풋한 속죄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자유주의자처럼 우리의 죄와 그에 수반되는 실질적인 형벌의 고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그러한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 없이 우리가 어떻게 죄의 권능을 없앨 수 있을까요?
1.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는 것은 첫째로 율법은 영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 없이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율법이 육신적인 것이어서 단순히 몸에 관련된 것이라면, 단순히 공개적이고 명백한 행동에 관련된 것이라면, 저는 죄 없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십계명을 다시 꼼꼼히 읽어보면 "탐하지 마라"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마음속에서 바라는 것까지 연관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간음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또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생각을 말합니다.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바로 상상이 죄인 것입니다. 오, 그렇다면 죄인들이여, 여러분은 어떻게 죄를 없앨 수 있겠습니까? 바로 여러분의 생각,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범죄이고 절망적인 사악함입니다. 보십시오, 죄에게 권능이 없습니까? 율법이 능력을 부여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대담하게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이 모든 힘을 다해도, 여러분의 검은 죄악을 씻을 수 있다는 기대조차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권능 아닙니까?
2. 다음으로 율법은 그것의 엄격한 요구사항 중에서 하나도 감하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죄에게 능력을 부여합니다. 율법을 어기는 모든 사람에게 율법은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반드시 율법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율법 어디에서 자비를 만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계명들을 자세히 읽어 보시면 거기에는 계명에 따르는 저주가 있을 뿐 용서는 없습니다. 율법 자체로는 용서를 말하지 않습니다. 조금의 덜어냄도 없이 천둥같이 말합니다. "에스겔 18:20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만약 여러분 중에 그 누구라도 행위로 구원 얻기를 원한다면, 기억하십시오, 죄 하나가 여러분의 의를 망칠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쓸모없는 한 조각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손에서 원하시는 그 완전한 의의 아름다움을 망칠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면 여러분은 천사처럼 거룩해야 하고, 예수님처럼 순결하고 흠이 없어야만 합니다. 율법은 완전함을 요구하고 있고 거기에는 그 어떤 예외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완전한 순종을 가져올 수 없는 모든 이들을 주저함 없이 내려치실 것입니다. 제가 주의 보좌 앞에서 저의 완전한 의를 말씀드릴 수 없다면, 주께서는 "너는 나의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저주받은 자여, 떠나라! 너는 죄를 지었고 죽어야만 한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완전한 의를 가질 수가 있을까요?" 가질 수 있습니다. 제가 세 번째로 말씀드릴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석으로 신부를 꾸미고, 장식품으로 신랑을 준비하듯 그분의 피와 그분의 의로움으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그리스도께 감사를 올려 드립니다.
3. 또한, 죄를 지을 때마다 벌을 준다는 점에서 율법은 죄에게 능력을 부여합니다. 율법은 죄는 곧 형벌이라고 말하지, 결코 빚을 한 푼도 감하지 않습니다. 그 둘은 끊어지지 않는 금강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묶여서 결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율법은 죄와 긍휼을 동시에 말하지 않습니다. 긍휼은 복음에서 옵니다. 율법은 죄는 곧 죽음, 죄를 지으면 형벌을 받고, 죄는 곧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면 저는 완고한 심판장의 발 앞으로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장은 무심하게 저울을 잡을 것입니다. 제는 이럴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오! 심판장님, 한때 제가 거룩했던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여러 번 율법을 지켰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심판장이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한 것을 가지고 벌할 것이다. 네가 하지 않은 것을 벌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죄인 아 이 죄 기억하지?" 그러면서, 무거운 추를 하나 올립니다. 죄인이 벌벌 떨며 외칩니다. "하지만, 그 죄를 잊으시면 안 됩니까? 그것은 버려 주시면 안 됩니까?" 심판장은 "안되지"라고 말하며 또 다른 저울추를 올립니다. "죄인 아 이 죄도 기억나지?" 죄인은 "오! 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합니다. 심판장은 "긍휼은 나름의 궁전이 있지만, 여기는 용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긍휼은 그리스도께 속할 뿐이지. 만약 네가 의로움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너는 완전해야 된다. 만약 네가 구원을 위해 나에게 왔다면 나는 긍휼로 너를 도울 수 없다. 긍휼은 나와 상관이 없고, 나는 긍휼함 없이 홀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다시 심판장은 저울을 잡고 또 다른 부정, 또 다른 범죄, 또 다른 거대한 죄악을 담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사람은 그것이 그냥 지나가도록 간절히 매달립니다. 심판장이 말합니다 "절대 그럴 수 없다. 나는 정확하게 징벌해야만 한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맹세했고, 그렇게 할 것이다. 너를 대신할 것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긍휼을 베풀 수도 있어. 너를 대신할 것에도 동일하게 징벌할 것이고 일점일획까지도 정확하게 요구할 것이다. 나는 완고하고 단호한 하나님의 정의이므로 아무것도 감하지 않을 것이다. 징벌을 바꾸지 않을 것이고 징벌을 완화하기 않을 것이다" 심판장은 여전히 저울을 붙잡고 있고, 그 사람의 간청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심판장이 외칩니다 "나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피를 가져오라! 나에게 모든 값을 치러라! 죄인이여 그렇지 않으면 너는 죽을 것이다."
이제 제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율법의 영성과 율법이 요구하는 완벽함과 타협 없는 준엄함을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서 사망의 쏘는 것을 없앨 준비가 되셨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죄를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몇몇 의로운 행위로 여러분의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가십시오,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나가십시오!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없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보십시오. 가서, 여러분 자신의 모래 밧줄을 만들고, 허공에 피라미드를 세워 보십시오. 가서 거품으로 된 집을 짓고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렇지만, 아십시오. 그것은 끔찍하게 깨고 말 꿈이 될 것입니다. 꿈에서 깨면 스스로의 모습과 의를 경멸하게 될 것입니다.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
III. 그러나 이제 마지막으로 믿음의 승리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스스로는 할 수 없지만, 죽음의 용을 칠 수 있는 유일한 용사입니다. 죽음의 용을 이기면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 드립니다" 잠시 후 저는 여러분에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만족스럽게 죽음을 바라볼 수 있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제거하셨다는 면에서 죄의 권능을 없애셨습니다. 우리는 속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우리를 지시하는 원칙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원칙, 다시 말해서 "뭔가를 하면 벌을 받거나, 뭔가 하면 보상을 받는" 율법의 원칙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동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원칙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하셨는데, 나는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제거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율법을 완전히 충족시켰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은 완전한 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율법이여, 내가 완전한 의에 위배되었는지 찾아보시오. 내가 죄인들의 대속으로서 당신의 명령을 어긴 적이 있습니까? 당신의 계명들을 어긴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자여, 이리오라"라고 말씀하시고는 심판장에게 외치십니다. "이 사람에게서 문제를 찾아보십시오. 제 옷을 이 사람에게 입혔고, 제 피로 그를 씻겨서 죄로부터 깨끗하게 했습니다. 모든 과거는 사라졌습니다. 앞으로는 성화된 상태로 살 것이고 형벌은 제가 짊어질 것입니다. 한 모금의 큰 사랑으로 그의 파멸을 마셔버렸습니다. 그가 받아야 할 고통을 제가 짊어졌고, 그가 견뎌내야 할 어려움들을 제가 견뎌냈습니다. 심판장이여, 제가 당신을 만족시키지 못했나요? 제가 십자가에 달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말한 것과 맞지 않습니까? 이제 이 사람이 죽어 자신의 죄의 값을 치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제가 완전한 대속을 한 것이 아닙니까? 한때는 정죄를 받았으나 지금을 의롭게 된 이 불쌍한 영혼의 완전한 의를 제가 이루었는데, 아닙니까? 심판장이 말합니다. 아니다.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혹시 가능하다 할지라도 저 죄인이 자신의 흠 없는 의를 가져오는 것보다 훨씬 좋다."
그렇다면, 이제 이 이후로 그 그리스도인은 뭐라고 말할까요? 그는 사망의 세계로 담대하게 들어갑니다. 거기에 있는 문을 지나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로마서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오!" 그가 이렇게 말하자 괴물은 자신의 쏘는 것을 떨어뜨리고 무덤으로 내려갑니다. 마귀들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곳을 지납니다. 그는 그들을 묶어 놓은 쇠사슬과 그들이 갇혀있는 감옥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감옥문을 지나면서 "로마서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오!"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마귀들은 쇠사슬을 깨물으며 씩씩거리지만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그는 하늘 높이 올라갑니다. 그가 천국문에 다다르자 믿음은 여전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오?"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문 안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스도는 아니다, 그가 죽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아니다, 그가 의롭다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 받아들여진 믿음은 천국으로 들어와 다시 외칩니다. 비록 그곳에는 흠 없고 대속된 이들이 있었지만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오?"라고 외칩니다.
이제 율법은 충족되었고, 죄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괴물의 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도 바울이 했던 것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아름다운 시이지만 사도 자신도 자신의 말을 빌렸을 뿐이고 우리는 시구를 조금 바꿀 뿐일 것입니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늘밤 필요하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부활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수 있고 사망의 쏘는 것이 얼마나 제거되었는지도 말씀드릴 수 있지만, 저는 단순 명확한 사실들에만 집중할까 합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이고", "죄의 권능은 율법이며"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완전한 순종으로 쏘는 것을 없애고 죄의 권능을 제거함으로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에 계신 여러분 중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소망을 가진 분들이 몇이나 될까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여러분 각 사람에게 여러분의 피에 대한 가장 엄숙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제가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일까요? 제가 이곳에 서서 간절히 애원하는 이 마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죽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죄는 용서받으셨습니까? 율법은 충족시키셨습니까? 여러분은 저 흐르는 보혈을 보실 수 있습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주께서 주시는 확신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셨습니까?"
오! 여러분은 지금 한 손은 여러분의 가슴에 올리고, 다른 한 손은 성경에 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에 동의합니다. 여기저기에 있는 성령의 증거는 하나입니다. 저는 저의 죄를 버렸고, 악한 행위들을 그만두었습니다. 저의 의는 생각지도 않으며 예수께서 행하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그분을 의지합니다.
제 손에 가져온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분의 십자가를 붙들 뿐입니다."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죽더라도 갑작스러운 죽음은 갑작스러운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정직해야 할까요? 아니면 제 영혼을 속여야 할까요? 어느 쪽이어야 할까요?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영혼의 출발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나는 준비되었을까?" 묻고는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요? 오늘밤 제가 예언자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맞지 않나요? 제가 두려운 것은 여러분 중의 절반도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각 사람이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나의 창조주를 대면하여 만날 준비가 되었는가?" 오, 여러분, 자리에 앉으셔서 그 엄숙한 질문으로 여러분의 영혼과 문답을 해 보십시오. 각 사람이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준비가 되었는가, 나는 죽어야만 하는가?" 어떤 분이 확신 있게 "나는 나의 구주가 살아계신 것을 압니다"라고 하는 것을 들은 것 같네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또 다른 사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도 들리는 것 같네요,
"죄 많고 사악하며 벌레 같은 제가,
그리스도의 친절한 팔에 안깁니다;
주는 나의 힘과 의,
나의 예수님, 나의 전부"
그렇지요, 얼마나 감미로운 말들인지요! 저도 밀턴의 실낙원보다 이런 구절들을 쓰겠습니다. 믿는 영혼의 진정한 모습을 그리는 비할 데 없는 그런 그림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말도 들리는 것 같네요 "나는 그런 질문에 답하지 않겠소. 나는 오늘을 재미없게 만들지 않을 거란 말이오. 바깥 날씨가 흐릴 수도 있지만 나는 우울하게 만들고 싶지 않소"
젊은이들이여, 젊은이들이여, 당신들의 길을 가십시오. 젊은 날 마음껏 즐기십시오. 그렇지만, 이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여러분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가벼운 영혼들이여 친구들이 여러분을 버리고 여러분이 하나님과만 있게 된다면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젊은이들이여 지금 여러분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떨어지는 낙엽조차도 여러분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한 시간만 홀로 있어도 참을 수 없는 우울함에 빠져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홀로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원수로 하나님과만 있는 끔찍한 외로움이죠.
여러분은 요단강의 물결 속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혼의 때에 주께서 여러분에게 손을 내미시며 무엇을 했는지 물으신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너는 어릴 때 무엇을 했는가? 무엇을 하며 너 삶을 보내었지?" "성인이 되어서는 어디에 있었는가?"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이 헛되이 버린 안식일에 대해서 그리고 노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답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서있게 될 것입니다.
오, 간청드리기는 여러분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면 진짜 조심하셔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영원한 삶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렇게 진지해! 왜 그렇게 서둘러!"라고 하지 마십시오. 만약 제가 여러분이 잠자고 있는 집 아래쪽에서 불이 난 것을 보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두면 여러분은 약 5분 정도는 안전하게 잘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제 온 힘을 다하여 여러분을 침대에서 끌어내리거나, "불이야! 불이야! 빨리 나오세요!"라고 외칠 것입니다.
여러분 중 일부가 지옥 입구에서 잠을 자고 있고 멸망의 구덩이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그들을 깨우지 않겠습니까? 제가 성직자들이 하는 방식에 조금 벗어나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동료가 말하듯이 여러분에게 말하면 안 되겠습니까? 아! 만약 제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저는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 앞에 제 마음을 쏟아붓는 이유는 여러분의 영혼을 얻어 가능하다면 주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죄인들이여 여러분은 지옥 입구에 걸려있는 썩은 널판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덩이 위에 있는 줄 하나에 매달여 있는데 그 줄의 가닥이 끊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시칠리아 섬의 폭군 디오니시우스가 식탁 위에 한 가닥의 말총으로 매달아 놓은 칼 때문에 화려하게 차려 놓은 음식을 먹지 못했던 다모클레스의 상황이 바로 죄인인 여러분의 상황입니다. 잔도 채우시고 마음껏 기뻐하시고, 즐기십시오. 그런데, 머리 위에 매달린 칼이 보이십니까?
다음에 여러분이 극장에 앉게 되면 그 검을 올려다보십시오. 다음에 여러분이 술집에 있게 되면 그 검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일하실 때 하나님의 복음의 규칙을 무시하고 있는 현장이라면 그 검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그 검을 보지 않을지라도 그 검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가브리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아 저 사람이 자리에 앉아 듣고 있지만, 전혀 듣지 못하는 것처럼 검을 뽑아라. 그리고 번쩍이는 칼로 머리를 내려치고, 칼을 그에게 떨어뜨려 그의 영혼과 몸을 쪼개거라"
멈추세요! 가브리엘이여 멈추세요! 잠시만 그를 살려 주세요. 그가 회개할 수도 있으니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오, 그를 죽게 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여기에 여러 날 와서 눈물 없이 설교를 들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멈추세요, 혹시 지금이라도 회개할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께서 저의 간청을 뒷받침하시며 외치십니다. "내가 그의 주위를 파고 거름을 줄 때까지 1년만 더 남겨 두어라. 그가 지금은 단순히 땅을 막고 서 있지만 열매를 내서 찍혀 불에 던져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일은 저 사람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지만, 오늘밤에는 버리지 않으시겠군요.
여러분이 해가 지는 것을 보았을지라도 해가 뜨는 것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며"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누구든지 그에게 오는 자를 그는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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