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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자 : 1855년 4월 22일 주일 아침

■ 설교 장소 : 영국 런던 스트랜드(Strand) 북쪽에 있는 엑서터 홀(Exeter Hall)

■ 설교자 : THE REV. C. H. SPURGEON

■ 설교 제목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The Carnal Mind Enmity Against God

■ 본문 참조 사이트 : https://www.spurgeongems.org

■ 설교 내용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로마서 8:7"


이것은 육신의 생각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아주 엄숙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자로서 에덴동산을 거닐던 때를 생각해보면, 자신을 지으신 창조자의 형상 그대로 순수하고 흠 없고 티 없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과 대비하여 지금 인류로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지적을 보면 깊은 슬픔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그의 반항적인 피조물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에 시편 기자처럼 모든 슬픔으로 우리의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놓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에스겔 28:12-16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왔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네가 범죄 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우리 인류의 폐허를 보면 참으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자신들의 사랑하는 황폐한 도시를 밟는 카르타고인들이라면 로마인들이 쌓아 놓은 돌무더기를 보며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황량한 예루살렘의 거리를 걷는 유대인이라면 쟁기가 온 땅의 기쁨이었던 도시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상하게 하는 것에 한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쌓아 두신 훌륭한 건축물의 폐허를 볼 때, 우리 자신과 인류에 대해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훌륭한 건축물인 인간은 천사 다음으로 강력한 존재였고 비교 불가의 피조물이죠. 그런데, 그 존재가 "떨어졌도다, 떨어졌도다 그의 높은 지위에서 떨어졌도다" 그리고 폐허 가운데 놓여 있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별 하나가 아주 밝게 불타오르다가 곧 사라진 적이 있었습니다. 수천만 마일 떨어진 곳의 불로 밝혀졌는데 그 불빛이 우리에게 도달했던 것입니다. 소리 없는 빛의 사자는 먼 곳에 있는 이 지구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불타는 세계"의 경고를 준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하고 신성한 모든 것의 파멸, 인류의 타락에 비하면 먼 행성이 불탄 것이 무엇이며, 광대한 우주 가운데 아주 작은 것이 파괴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사실 우리는 한 가지에는 깊은 관심이 있지만 다른 것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거의 비교가 불가합니다.

아담의 타락은 우리의 타락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그와 함께 넘어졌습니다. 우리는 같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우리가 한탄하는 것은 우리 집의 폐허입니다. 한때는 거룩했지만 지금은 육신이 되어버린 그 생각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오해하기에는 너무도 단순하게 써져 있는 오늘 본문 앞에서 우리가 한탄하는 것은 우리 도시의 파괴입니다. 이 아침 주께서 제가 여러분 모두에게 이 지적하심을 엄숙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죄를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것에 어떤 어려움은 없습니다. 거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지요. 우리 모두는 "육신"이라는 단어가 육체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압니다. 옛 번역가들은 이 구절을 "육체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말인즉, 우리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영혼,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성하셨던 몸과 함께 태어난 그 자연적인 마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마음, 육신의 생각, 강한 욕망, 영혼의 정욕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그분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의 교리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사도가 이것을 얼마나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고 말합니다. 형용사를 사용하지 않고 명사를 사용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원수입니다. 검은색 같다가 아니라 암흑입니다. 반대편에 있다가 아니라 원수 그 자체입니다. 타락한이 아니라 타락 그 자체고 대적하는 것이 아니 대적 그 자체입니다. 사악한이 아니라 사악함 그 자체입니다. 비록 마음이 기만적이기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속이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악이고 본질적으로는 죄입니다. 사악한 모든 것의 정수이고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 자체이고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원수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는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 추가적인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여호와의 교리, 율법과 통치를 싫어한다는 정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고 확실한 타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머리를 때리는 수준이 아니라 마음을 꿰뚫는 것입니다. 도끼를 나무뿌리에 올려두고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성에 대하여, 주되심에 대하여,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에 대하여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그의 성경, 그의 복음과 원수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체, 그의 본질, 그의 존재, 그의 인격과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엄숙한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제 이 단어들의 무게를 가늠해 볼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연설의 대가인 바울에 의해 잘 작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마땅한 말을 주시는 성령님께서 지시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이미 우리에게 설명할 구절을 주신 것처럼 우리가 자세히 잘 풀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아침 우리가 주목할 것은 첫째로 이 주장의 진실성입니다. 두 번째는 여기서 말하는 악의 보편성입니다. 세 번째는 이 주제의 깊이를 좀 더 파고 들어가서 악의 거대함을 보여줌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그것을 새기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시간이 되면 일반적인 사실로부터 한 두 가지 교리를 따져보도록 하겠습니다.



I. 첫 번째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 위대한 말씀의 진실성을 다루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쓰였으므로 어떤 증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이 말씀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은 무한한 지혜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성이 계시의 근거를 확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더욱더 경건하게 그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라도 반대가 될 수는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고 하셨고 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증거가 필요하다면, 저는 고대의 나라들을 불러오겠습니다. 고대 역사의 기록을 펼치고 인류의 끔찍한 행위들을 말할 것입니다. 제가 이 인류가 스스로에게 행했던 것을 말한다면, 어떻게 전쟁으로 세상을 피 밭으로 만들었는지, 온갖 싸움과 살인으로 피가 넘치도록 했는지를 보여드린다면 저는 여러분의 영혼을 참혹함으로 이끌고 갈지도 모릅니다.

만약 제가 모든 나라에서 만연해 있는 악의 목록을 읽어야만 한다거나 가장 저명하다고 하는 철학자들의 행태를 여러분 앞에 가져와야만 한다면, 저는 그것들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얼굴을 붉힐 것이고 여러분은 그것을 들으시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명국의 세련된 주민으로서, 오늘날 완벽함의 전형이라고 여겨지는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죄악들을 듣기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제가 두려운 것은 만약 모든 사실이 기록되었다면 우리는 이 땅의 엄청난 영웅들과 자랑스러운 현인들의 삶을 읽다가는 일어나서 그들 모두에게 "로마서 3:12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이교도들의 망상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미신 속에 빠지게 하는 그들의 사제술을 말씀드리고 이교도들의 신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것입니다. 이교도에 빠진 이들이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끔찍한 외설과 악마적인 의식을 목격하게 할 것입니다.

그다음에 여러분이 인간의 자연 종교가 무엇인지를 들은 후에 과연 무종교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 지를 물을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헌신이라면 불신앙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만약 이것이 신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라면 미움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저는 여러분이 즉시로 인류가 어떠했는지 알았고, 죄가 명백하다는 것을 고백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주저함 없이 진실되게 "유죄"라고 외쳐야 할 것입니다.

제가 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최고의 사람들이 항상 자신들의 타락을 기꺼이 고백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불순함에서 자유로운 가장 거룩한 사람들이 항상 불순함을 가장 잘 느낍니다.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그 옷에 묻은 점을 가장 잘 인식할 것입니다. 가장 빛나는 왕관을 쓴 사람이 왕관의 보석이 없어진 때를 알 것입니다. 세상에 밝은 빛을 주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어두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그들의 얼굴을 가립니다. 그리고 이 땅의 하나님의 천사들인 주의 택하신 백성들은 자신들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할 때 항상 겸손으로 자신들의 얼굴을 가려야 합니다. 다윗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거룩한 본성이나 순수한 자질을 가졌다고 자랑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영감을 받아 쓰인 책들에 쓰인 거룩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깨끗하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을 확인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 한 사람이 이렇게 외쳤지요.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리고 더해서 저는 이 사실의 진실성을 위한 또 다른 증인을 소환할 것입니다. 이 증인이 질문을 결정할 것입니다. 그 증인은 바로 여러분의 양심입니다. 양심, 저는 이 아침 당신을 증인석에 넣고 심문할 것입니다. 양심, 진실하게 답하십시오!  자만에 취해있지 마시고 진실만을 말하십시오! 

여러분은 "나는 하나님이 없었으면 좋겠어"라고 하는 마음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종종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이 진실이 아니길 바라지 않습니까? 그들은 신에 대한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신성한 현실이 망상이나, 희극, 속임수로 밝혀지기를 바라지 않았습니까? 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요,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저는 그냥 어리석음에 빠지기를 바랐어요. 나를 얽어매는 법들이 없었으면 하고 바랐지요. 저는 어리석게도 하나님이 없었으면 했습니다"

"시편 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는 잘못 번역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아니다 하도다"라고 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아니야, 나는 어떠한 것도 원하지 않아, 아무것도 없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합니다. 우리 중에는 하나님이 없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없겠지요?

양심이여 이제 다른 질문에 답해 보시오! 당신은 종종 하나님의 없었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사람이 다른 이의 죽음을 바란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것은 그가 다른 이를 미워한다는 것은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맞아요.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죽어서 무덤에서 썩어지기를 바라거나 그의 부재를 바란다면 그것은 분명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사멸을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그런 바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바람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를 증명합니다. 

그렇지만, 양심이여 저는 또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분이 덜 거룩하시거나, 덜 순결하셨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없습니까? 지금은 큰 범죄로 간주되는 것을 경범죄나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하신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이런 죄들은 금지되지 않을 거야.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니 죗값을 치르게 하지 않고 지나가실 거야! 그분은 그분의 무결성을 그렇게 확고하게 지키려고 하거나, 그렇게 엄중하게 정의롭거나 그렇게 엄격하지는 않으실 거야!" 양심이여, 결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가?

양심은 틀림없이 그런 적이 있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꾸려는 그런 바람은 하늘과 땅의 하나님과의 사랑 가운데 있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비록 여러분이 자연 종교를 이야기하고 푸른 들판, 풀이 무성한 초원, 넘실대는 물결, 내려치는 천둥, 푸른 하늘, 별이 빛나는 밤, 그리고 거대한 우주의 신을 숭배한다고 자랑할지라도, 신에 대한 시적 이상향을 바랄지라도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의 본성을 바꾸기를 바랐고, 그것으로 여러분이 하나님가 원수 됨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양심이여 굳이 제가 이렇게 이것저것을 말해야만 할까요? 당신이 진실을 말한다면, 여기 있는 각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했음을 충실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주의 법을 어겼고, 그의 안식일을 범했으며, 그의 율법을 짓밟고, 그의 복음을 멸시했지요. 맞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확실한 사실입니다.

 

II. 이제 두 번째로 우리는 악의 보편성을 주목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얼마나 광범위한 선언인지요. 하나의 육신적인 생각도 아니고 어떤 부류의 품성도 아니고 "육신의 생각"입니다. 모든 개인을 포함하는 한정되지 않은 문장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감화되지 모든 생각은 육신적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고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우선 모든 사람들에 해당한다는 보편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을 적대시합니다. 이것은 어머님 품속에 있는 갓난아이 조차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실제 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으므로 무죄하다고 하지만, 한 시인은 이렇게 말했지요 "가장 어린아이의 가슴속에도 돌이 있다" 갓난아이에게 있는 육신적인 생각도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진전되지 않았지만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이 모방을 통해서 죄를 배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를 데려다가 가장 경건한 영향력 아래 두어 보십시오. 경건함으로 정화된 그런 공기를 드리 마시도록 해보십시오, 늘 거룩함을 마시도록 하십시오, 기도와 찬양 소리만을 듣게 하십시오, 귀가 항상 찬송가의 음표에 맞춰져 있도록 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여전히 가장 심한 범죄자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가는 바로 그 길에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구덩이로 빠지고 말 것입니다. 아! 가장 좋은 부모들 가운데서 가장 나쁜 자식들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지요. 많은 사람들이 가장 거룩한 환경 아래서, 경건함의 넘치는 분위기 가운데서 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느슨해지고 방탕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악한 것은 모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성에 의한 것입니다. 제가 아이가 육신적이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하는 본문을 말하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제가 듣기로는 악어 새끼는 알에서 나오자마자 마치 배우고 훈련받은 것처럼 입을 벌리고 공격 자세를 취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린 사자가 길들여지고 사육되더라도 여전히 들판의 다른 사자들 같은 야생성을 갖고 있으며 그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다른 사자처럼 맹렬하게 잡아먹을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을 교육이라는 나무줄기로 묶고 여러분이 원하시는 뭔가를 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마음을 바꿀 수 없으므로 육신의 생각은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그리고 지식과 재능을 비롯하여 줄 수 있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악하지 않더라도 다른 모든 아이들과 같은 죄성 속에 있을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이들에게 적용한다면 모든 부류의 사람들도 그 대상에 똑같이 포함됩니다. 이 세상에는 빛과 영광의 망토를 걸치고 마치 거인처럼 걷는 영웅호걸로 태어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로도스의 거상처럼 서있는 시인들인데 다른 별에서 온 것 같은 우리보다는 강한 사람들이지요.

과학의 신비를 탐구하며 세상의 창조 이래로 숨겨져 있던 것들을 발견하는 예리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리한 연구를 하는 사람들, 박학다식한 사람들 이러한 시인, 철학자, 형이상 학자, 위대한 발견자들도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훈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가 거의 천사 수준의 지성을 갖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수수께끼 같았던 일을 그의 손으로 한 번에 풀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가 영원한 언덕의 철의 비밀을 파악하고 그의 주먹으로 그것들을 갈아엎을 정도로 강력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바위 속과 산의 아주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눈을 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위대한 학자들을 괴롭혔던 거대한 스핑크스를 쓰러뜨릴 수 있는 그런 영혼을 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다 했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타락할 것이며 그의 육신적인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과 대적의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조금 더 한다면 여러분은 그를 교회로 데려갈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진득하게 앉아서 기름 부음이 수반되며 순결함으로 전해지는 은혜의 교리가 선포되는 명쾌한 말씀 설교를 듣게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기름 부음이 그에게 머물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가 성실하게 정기적으로 잘 참석하더라도, 경건한 교회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처럼 그는 여전히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이고 겉으로는 피상적인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육신적인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이제 이것은 제 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의 선언입니다. 만약 믿지 않으신다면 떠나셔야만 합니다. 저랑 싸우지 마십시오 이것은 우리 주님의 메시지이고 여러분 각 사람, 남성, 여성, 어린아이들 그리고 저까지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만일 우리가 거듭나 회심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육신의 생각은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주목할 것은 시간적 보편성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모든 시간에 항상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우리가 종종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맞아요.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하나님께 반항적일 때가 있기는 합니다. 때때로 제 열정이 저를 잘못 인도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친밀하고 참 헌신을 드리는 분명 다른 좋은 때가 있습니다. 저는 산꼭대기에 올라 제 온 영혼이 아래 펼쳐지는 광경으로 불이 켜지고 입술에 찬양이 울려 퍼질 때까지 서 있습니다."

"참 좋으신 주여, 이것들은 모두 주의 영광스러운 작품입니다,
전능하신 주여, 이 우주도 주의 작품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주님 자신은 얼마나 놀라우실지요!"

좋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날은 좋지만 다른 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늑대가 잠을 잘 수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늑대입니다. 푸른빛이 도는 뱀이 꽃 가운데 잠을 자고 아이는 잠자는 뱀을 만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뱀입니다. 휴면 상태일지라도 본성을 변하지 않습니다.

바다는 그것이 호수처럼 잔잔해 보여도 폭풍을 품고 있는 곳입니다. 천둥은 우리가 거의 듣지 못할 정도로 먼 곳에서 울리더라도 여전히 강력한 내리치는 천둥입니다. 그리고 심장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심장의 고동침을 거의 인식하지 않고, 용암을 분출하지 않으며, 뜨거운 돌을 내보내지 않더라도 심장은 여전히 무서운 화산입니다. 항상, 모든 시간, 모든 순간에 여러분이 육신적이라면 여러분 각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보편성과 관련된 또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마음 전체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 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 전체, 사람의 모든 부분, 모든 힘, 모든 열정을 말합니다. 많이 받는 질문인데 "타락으로 사람의 어떤 부분이 상한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타락은 감정에 의해서만 느껴질 뿐 지성은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인간이 이룩한 위대한 발견들 예를 들면 만유인력의 법칙, 증기 기관, 여러 과학들을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합니다. 저는 이런 것들은 앞으로 몇백 년 후에 올 것들과 비교하면 참으로 초라한 지혜의 과시라고 여깁니다. 인간의 지성이 원래 그대로의 상태로 지속되었을 때 이루었을 엄청난 결과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입니다.

저는 타락이 사람을 완전히 무너뜨렸다고 믿습니다. 비록 그 타락이 엄청난 산사태처럼 인간 본성의 거대한 신전을 덮쳤지만, 몇몇 줄기는 부서지지 않고 남아있던 것입니다. 전체 구조는 넘어졌지만 피리, 기둥 받침, 처마, 완전히 깨지지 않은 기둥 등 그 폐허들 가운데서 얼마를 찾은 것이지요. 가장 영광스러운 유물들은 먼지 속에 쌓여 있던 타락한 것들입니다. 인간 자체는 훼손되었습니다.

우리의 기억을 보죠, 기억도 타락한 것이 사실 아닙니까? 저는 경건의 즐거움보다 악한 것들을 훨씬 더 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야한 농담을 담은 노래를 듣습니다. 제가 백발이 되면 제 귓가에서 울려 퍼질 지옥의 음악 같은 것들이죠. 거룩한 찬양을 듣습니다. 그러나, 아! 이 찬양들은 잊혔군요. 우리의 기억은 악한 것은 강철손으로 붙잡지만 좋은 것은 약한 손가락으로 잡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레바논 숲의 영광스러운 나무들은 망각의 강으로 흘려버리고 타락의 도시 소돔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쓰레기들은 꽉 붙잡습니다. 악한 것은 가지고 좋은 것은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기억은 타락했습니다.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들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더 사랑합니다. 피조물에는 우리의 마음을 바로 주지만 창조주에는 거의 마음을 드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예수님께 드리더라도 이내 방황하고 맙니다. 우리의 상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오!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 있으면 상상은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요! 사람을 아편 같은 것으로 완전히 취하게 하면 그 사람의 상상은 기쁨으로 춤을 출 것입니다. 갇히지 않은 새처럼 독수리보다 더 높게 날아오를 것입니다. 그는 밤 그림자 속에서 조차 꿈꾸지 않은 것들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상상은 몸이 정상 상태에 있을 때, 건강할 때는 동작하지 않는 것일까요? 단순하게 그것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쁜 상태에서 들어가기 까지, 몸이 중독과 같은 것으로 떨리기 시작할 때까지는 그 공상은 축제를 벌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불타는 영의 저주받은 영향 아래 있을 때 그들이 쓸 수 있는 훌륭한 표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너무 타락해서 몸을 비정상 상태로 만드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상상 자체가 빗나갔다는 증거를 가지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저는 그것이 얼마나 나쁜지 증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양심을 돌아보며 양심이 얼마나 눈이 멀고, 가장 어리석은 일에도 눈을 감는지도 말씀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능력을 살펴보며 각각에 "하늘을 거스르는 반역자! 하나님에 대한 반역자!"라고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이제, 여러분 "오직 성경만이 개신교도들의 종교입니다" 그렇지만, 전적으로 제 개인 의견입니다만, 저는 성공회 형제들이 매우 존경하는 어떤 책을 찾을 때마다 저는 항상 그것들을 인용하는 것이 아주 기쁩니다. 여러분이 저를 어떤 조문으로 평가하면 이 세상에서 최고의 교인 중의 한 명이고, 다른 방식으로 평가하면 최악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성공회 조문으로 저를 평가해 보시면 저는 천국의 푸른 하늘 아래서 그 안에 담긴 복음을 전하는 데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훌륭한 복음의 전형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회 조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상한 교리를 보여드리겠습니다. 9조인데, 원죄에 대한 것입니다. "원죄, 즉 생득의 죄에 관하여 원죄는 (펠라기우스 파 사람들이 헛되이 말하듯이) 아담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인간의 본성에 있는 결함과 부패이다. 이것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며, 이 때문에 인간은 원래의 의로움과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본성상 악에 기우는 향이 있다. 그러므로 육은 항상 영에 거역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분노와 저주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본성의 오염은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에게도 남아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어로 '프로네마 사르코스'라고 하는 육의 욕망(어떤 이는 이를 육의 지혜로, 혹은 색욕, 애착, 욕망으로 해석한다)은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형벌이 없을 것이지만, 사도가 고백한 대로 색욕과 욕정은 그 자체로 죄의 본성이다." 저는 더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기도서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하는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III. 세 번째로 저는 이 죄의 엄청나게 거대함을 보여 드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우리가 우리의 상태를 생각할 때 우리의 죄악보다는 비참함을 더 자주 생각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저는 때때로 악에 대한 죄인의 성향에 대한 설교들을 읽습니다. 설교들은 아주 강력한 증명을 수반하기 때문에 인간 본성의 자만심은 확실히 겸손해지고 낮아집니다. 그런데, 항상 한 가지가 저를 괴롭게 합니다. 만약 그것을 빼버리면, 매우 큰 누락이 되는 것으로, 사람은 이 모든 일에 죄가 있다는 교리입니다. 만약 마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죄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만약 회개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유일한 이유가 죄라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모든 것이 죄며, 하나님을 멀리하는 한 죄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제가 두려운 것은 여기에 계신 많은 분들이 스스로의 양심으로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많은 문제가 있음을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나름의 만족감으로 앉아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범죄입니다. 큰 죄로 고백해야 하는 범죄인 것입니다. 만약 제가 복음 사역자로서 그것이 죄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 다면 저는 바로 그것의 균이 무엇인지를 놓치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이 죄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 다면 가장 핵심을 빼버리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죄란 무엇인가요! 이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생각해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제가 이 두 가지를 말씀드린 다음에,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죄임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그는 천지의 창조주이십니다. 우주의 기둥을 붙들고 계시고 그의 숨결은 꽃들에게 향기를 주고, 그의 연필은 꽃들을 그려 냅니다. 그는 이 공정한 창조의 저자입니다. "시편 100:3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를 지으신 분 그리고 창조주라는 관계이십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그분은 우리의 왕이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법을 만들고 세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죄에 죄를 더하고 있지만 그분은 섭리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날마다 우리를 지키시는 분은 그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콧속의 숨을 유지시켜 주시고 핏줄을 따라 피가 흐르게 하십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보호하시고 생명으로 붙들어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 우리의 왕, 우리를 지켜 주시는 분, 우리의 후원자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저는 묻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규모의 죄 아닙니까? 천국 황제에 대한 큰 반역 아닙니까? 우리의 모든 판단으로는 그 깊이를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끔찍한 죄가 아닙니까? 그분의 피조물이고 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야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면 죄는 더 나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 각각에게 질문하는 방식으로 호소를 드릴까 합니다. 그만큼 무게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여! 왜 당신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그의 피조물에게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자비의 사랑으로 당신을 대하십니다. 바로 오늘 그의 태양은 당신을 비추었습니다. 이 아침 당신은 음식을 먹고, 의복을 챙겨 입고 건강하고 힘 있게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이유입니까?

당신의 온 평생에 그분의 손에서 받은 수많은 자비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몸 어디가 상해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웬만큼 건강합니다. 당신은 여러 번 아프다가 회복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누워 있을 때 그분의 팔은 파멸의 마지막 단계로부터 당신의 영혼을 지켜주셨습니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그분의 한없는 긍휼로 당신의 생명을 살려주신 것 때문에 그분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당신 앞에 펼쳐놓으신 그의 선하심을 보십시오. 그분은 당신을 지옥으로 보내실 수도 있었지만, 당신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살려주신 것 때문에 그분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오, 왜 당신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겁니까? 저의 동료 피조물이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자신의 품에서 보내시고 그를 나무에 달리게 하셨으며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위해, 죄인들을 위해 죽는 고통을 받게 하신 것을 아십니까?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오, 죄인이여 이것이 당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유입니까? 너무 관계가 소원해져서 사랑에 대해 대적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호의로 감싸시고, 긍휼로 띠 띠우며, 인자로 두르실 때에 이것 때문에 그분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요 10:32 그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냐"라고 하신 것처럼 이 일들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미워하는 것이냐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의 은인이 당신을 먹여 살렸다면 당신은 그를 미워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당신을 입혔다면 그의 면전에서 욕을 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당신에게 재능을 주었다면 그 능력으로 그를 대적하겠습니까? 아! 말해보십시오! 쇠를 다듬어서 단검을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의 가슴에 박겠습니까? 무릎으로 당신을 보살폈던 어머니를 미워합니까? 그렇게 현명하게 당신을 바라보시던 아버지를 저주합니까? 아니지요, 당신은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혈육에게 얼마간 감사를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전히 하나님을 멸시할 수 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당신의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오! 사악한 범죄여! 오! 사탄의 거대함이여! 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죄악이여! 모든 좋은 것을 미워하는 것이고 본질적인 선을 경멸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긍휼을 거부하는 것이고 영원한 호의를 배척하는 것이며 친절하고 은혜로운 것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위해 죽임을 당하도록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아!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는 우리를 흔들 수 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더욱 강력하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만이 여러분에게 이 끔찍한 마음의 상태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 깨닫게 하실 수 있습니다.



IV.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따라가려는 한두 가지 교리가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까? 그렇다면 구원은 우리의 공로로 될 수 없고 은혜로만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면 우리에 무슨 공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미워하는 존재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아담만큼 순결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어떤 공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담이 그의 창조주 앞에서 어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주의 모든 법을 지켰다 하더라도 그는 무익한 종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해야 할 것을 한 것뿐이지 그 이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초과한 것도 남음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적이 되었는데 행위로 구원을 얼마나 바랄 수 있을까요! 오,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성경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끊임없이 믿음으로 얻는 구원만을 설교했다고 선언했었습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잊어버릴 것이므로 그것이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도록 저는 제 성경을 그들의 머리를 향하여 두드려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은혜로만 얻는다는 것을 끊임없이 잊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공로를 조금 넣으려고 합니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매튜 윌키스가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여러분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고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종이배를 타고 미국으로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고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오 아닙니다. 불쌍한 율법주의자들은 끊임없이 맷돌을 돌리는 눈 가린 말과 같고 계속해서 계단을 오르는 것 같지만 결국은 제자리인 답 차를 밟는 죄수와 같습니다. 그들은 확고한 확신도 없고, 의지할 든든한 기반도 없습니다. 충분히 행하지 못했지만, 결코 충분할 수 없습니다. 양심은 항상 "이건 완벽하지 않아, 더 잘해야만 해!"라고 말합니다. 원수의 구원은 대사로, 구속으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찾은 또 다른 교리는 우리 본성의 완전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본성이 변해야만 한다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요! 그렇지만 이것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죽으면 거짓으로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어도 바로 천국으로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잠시 불가능한 경우를 가정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의 변화 없이 천국에 들어갔다고 상상해 보겠습니다. 천국 문에 들어서자, 노랫소리가 들립니다. 그가 움직입니다. 그 노래는 그의 원수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영광스러운 분을 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의 원수입니다. 그가 금으로 된 거리를 걷지만 그 거리 또한 그의 원수의 것입니다. 천사의 무리를 보지만 그 무리 또한 원수의 종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 그는 원수의 집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노래를 모르니 함께 노래를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개의 천둥보다도 큰 소리로 말씀하실 때까지 움직임도 없이 조용히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너는 여기서 뭐하는 것이냐? 혼인 잔치에 원수가 있는 것이냐? 주의 백성의 집에 원수가 있는 것이냐? 천국에 원수가 있는 것이냐? 가라! 저주받은 자여, 지옥의 영원한 불속으로 떠나라!" 하실 것입니다.

오! 여러분! 만약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 저는 자주 반복되는 휫필드의 말을 다시 한번 말씀드릴까 합니다. 그는 천국에서는 너무 불행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지옥에서 피난처를 구할 수 있도록 내려가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미래를 생각하신다면 변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어떻게 어린양의 잔치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결론적으로 다시 말씀드리자면, 결국 오늘 본문에 있지만 이 변화는 여러분 자신을 초월한 어떤 힘에 의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적은 자신을 친구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원수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적이 되는 것이 단지 본성의 부수적인 것이라면 자신을 친구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원수 됨이 자신의 존재의 본질 자체라면 적극적인 적개심, 원수 됨은 스스로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뭔가가 수행되어야만 합니다.

요즘은 거의 잊혔지만 우리가 더 많은 전도 사역을 하려면 우리는 성령을 더욱더 전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제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스스로를 바꾸고 더 좋게 만들려고 수많은 노력을 하더라도 여러분은 결코 천국에 합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손을 얹으실 때까지,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영혼을 깨끗하게 하실 때까지, 성령께서 온 영혼을 변화시키셔서 새사람으로 만드실 때까지 그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 사람은 얼마나 진지하게 이것을 생각해야 될까요! 죽을 수밖에 없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 하루살이와 같은 존재가 바로 저입니다! 지금 제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면 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 묻는 것이 나의 의무이자 행복이 아닐까요?

오! 불쌍한 죄의 종들이여, 당신들이 가는 길은 어리석은 길이 아닙니까? 오 나의 동료 피조물들이여 당신들의 창조주를 미워하는 것이 지혜입니까? 그분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지혜입니까?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경멸하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까? 그것이 지혜라면 그것은 지옥의 지혜입니다. 그것이 지혜라면 그것은 하나님께 어리석은 지혜입니다.

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허락하시길 바랍니다. 그분은 대사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피로 화목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비록 여러분이 하나님의 원수로 이곳에 왔을지라도 들려진 놋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친구로 저문을 나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 중 몇몇은 성령으로 죄를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제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떨며 참회하는 이들이여 이것이 여러분의 구원을 위한 방법입니다. 갈보리 산 너머로 눈물 젖은 여러분의 눈을 들어보십시오. 의의 희생양, 여러분의 죄악을 위한 속죄의 제물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을 구하시려 피를 흘리며 고통 중에 계신 구세주, 여러분 대신 받는 형벌로 극심한 고통 중에 계신 구세주를 보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죄를 고백한다면 그분은 여러분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오 오십시오, 죽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여. 이처럼 여러분의 눈을 드시면 여러분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보십시오!, 보기만 하면 됩니다! 단순히 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만 볼 수 있다면 여러분은 안전할 것입니다. 구세주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이사야 45:22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오, 죄인들이여 보십시오! 보십시오! 보십시오! 

"그분을 따르라, 온전히 그분만을 따르라,
다른 어떤 것도 틈타지 않게 하라;
예수님만이 할 수 있다
무익한 죄인으로서는 할 수 없다."

축복의 주님이 여러분을 그분께로 오게 하여 주시고 여러분을 그의 아들, 예수께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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