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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자 : 1855년 4월 15일 주일 아침

■ 설교 장소 : 영국 런던 스트랜드(Strand) 북쪽에 있는 엑서터 홀(Exeter Hall)

■ 설교자 : THE REV. C. H. SPURGEON

■ 설교 제목 : 다윗의 마지막 노래, David's Dying Song

■ 본문 참조 사이트 : https://www.spurgeongems.org

■ 설교 내용 :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사무엘하 23:5
"

우리가 사무엘하 23장 시작 부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이 말씀은 다윗의 마지막 노래입니다. 그의 영감 받은 입술에서는 귀중한 말들이 수없이 흘러나왔었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수금을 치며 만들어 내는 소리는 그야말로 천사의 음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감미로운 음성은 죽음 가운데 멈추고 이 이새의 아들은 그의 조상들처럼 잠들고 있습니다. 분명 죽어가는 군주의 마지막 증언을 듣기 위해 침대 주위로 둘러 섰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사들도 이 죽어가는 권위자의 방을 방문하여 그의 마지막 노래를 들으려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떠나가는 성도의 말을 듣는 것은 언제나 축복입니다. 의롭고, 사랑하던 분의 침실에서 우리가 대했던 생각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가 언젠가 임종의 자리에서 얻었던 생각 하나가 기억납니다. 죽어 가시던 그분은 시편을 읽어주기를 바라셨고 시편 17장이 선택되었고 6절에서 멈추었습니다.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그리고 희미하게 속삭이며 말했습니다. "오 주여, 저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귀를 기울여 주소서, 귀를 제 입에 대고 제 말을 들으소서" 생명이 급격히 사그라들고 있는 약하고 죽어가는 사람 외에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단강 강둑에 서있는, 천국에 가까이 있는 성도들의 말을 듣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조금 특별합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말 이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께서 그를 통해 말씀하셨으며 그의 혀에 주의 말씀이 있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그의 마지막 당부입니다. 그는 하늘의 합창단에 함께하려고 이 말을 읊조리며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말을 시작했고 천국에서 그 말을 끝냈습니다.

그는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라고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로 날아 오르면서 여전히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그리고, 주의 보좌 앞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이 아침 이 구절을 함께 했으면 좋겠고,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순례를 마칠 때 우리의 입술로 이런 고백을 하기를 원하시길 바랍니다. 

저희는 우선 시편 기자가 자신의 집에 대한 걱정이 있음에 주목할 것입니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 두 번째로,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그는 언약을 신뢰했습니다. 세 번째로,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그는 마음으로 만족함이 있었습니다.

 

I. 시편 기자는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라며 자신의 집에 근심이 있음을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역사를 기록한다고 할 때 "비록~이기는 하지만"이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성경에 기록된 어떤 사람의 전기를 읽으신다면, 항상 "그러나" 또는 "비록~이기는 하지만"과 같은 단어를 만날 것입니다.

나아만은 큰 용사였고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둥병자였습니다. 모든 삶에는 불행이 있기 마련이고, 대리석 기둥에 있는 어두운 색, 여름 하늘의 구름, 음악의 어떤 불협화음, 순금 안의 불순물처럼 모든 상황에는 "그러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양무리 가운데서 올려진 위대한 전사, 거인을 이긴 정복자, 열방을 다스린 왕이었나 그 또한 "그러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러나"는 그의 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우리 집안에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문제들입니다. 우리는 멀리 있는 사악한 짐승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집 주위를 배회하거나 집 안마당을 부서뜨리는 사자를 가장 싫어합니다. 가시가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킬 때는 그 가시가 우리의 침대에 있거나, 베개에서 가시가 있음을 느낄 때입니다. 내전은 항상 치열한 법입니다. "마태복음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제 생각에 다윗이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라고 말할 때 그는 그의 일을 부분적으로 말하며 주께 간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다윗의 나라를 본다면 "다윗의 나라는 탁월함의 본이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의 집은 아주 잘 정돈되어 있어서 그의 신하 중에서 그에 대하여 투덜거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에게는 일반 사람들보다 더 크고 예리한 안목이 있음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왕국과 집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집"이란 단어는 종종 우리의 사업, 일, 거래를 의미합니다. ("이사야 38:1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비록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집이 잘 정돈되고 포장된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그렇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중에는 이웃들 앞에서 죄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며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과감히 거부합니다. "하나님! 주께서는 제가 사악하지 않다는 것을 아시지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패역한 세대 앞에서 떳떳합니다. 세상 가운데서 사람들 가운데 빛으로 다니며 주의 도우심으로 큰 죄악으로부터 깨끗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특성에 대한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의 은혜로 범죄 하는 것으로부터 지켜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눈에 비추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마귀는 우리를 손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무죄의 확신, 우리의 이웃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그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시선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얼마나 달라지는 지요! 아,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주께서는 제가 사악하지 않다는 것을 아시지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부정합니다, 부정합니다, 부정합니다."라고 울 뿐입니다. 그리고 문둥병자가 깊은 골짜기에서 흐르는 시원한 물에 그의 뜨거워진 이마를 식히는 것처럼 우리는 실로아 냇물에 우리의 몸을 씻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오는 물과 피로 우리를 씻으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우리 집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죄로부터 자유하고 천사만큼 희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만으로 하나님 앞에 선다면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정직하게 고백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와 같이 청렴하고, 사람들 앞에서는 공정하고 거룩해도 우리의 집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윗이 이 말을 한 주요 대상은 그의 가족, 특히 그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그의 자녀들에 대해서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괜찮은 사람들이 그들의 아들, 딸과 관련하여 큰 곤란을 겪는 일은 종종 있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평화와 행복의 바로 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가정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가정에서는 부모는 함께 무릎을 꿇고 가정 기도를 드리며 아이들이 많든 적든 대부분이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저는 사막과 같은 이 세상에서 푸른 오아시스와 같은 한 가정을 알고 있습니다. 그 가정에는 하나님의 복음 전하는 아들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도록 양육받은 딸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가정은 이 광야와 같은 삶을 순례하는 지친 영혼에게 참으로 즐거운 쉼터입니다. 오! 하나님이 축복하신 가정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자식들이 부모의 시련이 되는 다른 가정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아버지들이 "비록 저의 집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지 않지만" 이라며 걱정 가운데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경건한 어머니들은 "비록 저의 집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지 않지만" 이라며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을지 모릅니다. 자신들의 자랑이었던 그들의 장남은 그들의 불명예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오! 자식들의 배은망덕은 화살이 되어 여러분의 영혼을 꿰뚫지 않았습니까? 이 순간 여러분은 그 자식들이 지금까지 하던 대로 살아서 여러분의 불행과 눈물이 되는 것보다 아예 태어나지 않았었으면 하고 생각하시지는 않는지요?

오 경건하지도 않고 제멋대로이며, 동성애에 빠져있고 방탕한 자식들이여, 당신들은 분명 경건한 어머니들의 눈물을 모를 것입니다. 만약 알았다면 여러분의 죄를 멈추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청년 여러분, 여러분이 아무리 죄를 사랑한다고 해도 당신들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머니들의 간청 앞에 멈추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어머니를 짓밟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지옥으로 가는 경주를 하고 있지만 어머니의 눈물의 간구는 그 미친 경주를 멈추도록 할 수 없습니까?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고 가슴에 품으며 아껴주시던 그분을 슬프게 하실 것입니까? 여러분은 분명 눈물에 잠긴 어머니의 백발이 무덤에 가기까지 긴 논쟁을 하고 말 것입니다. 아니면, 죄가 여러분을 잔인하게 만들었습니까? 여러분은 돌보다 나쁩니까? 자연스러운 감정은 사라지고 없습니까? 사탄이 여러분의 주인입니까? 그 사탄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따스한 모든 동정심을 말려 버렸습니까? 멈추십시오! 젊은 탕자들이여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렇지만, 크리스천들이여, 이 경우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가족 문제가 있다면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브라임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에브라임이 수만 족속으로 번성하리라고 약속하셨지만, 역대상 7:20-22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의 아들은 수델라요 그 아들은 베렛이요 그 아들은 다핫이요 그 아들은 엘르아다요 그 아들은 다핫이요 그 아들은 사밧이요 그 아들은 수델라며 저가 또 에셀과 엘르앗을 낳았더니 저희가 가드 토인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내려가서 가드 사람의 짐승을 빼앗고자 하였음이라 그 아비 에브라임이 위하여 여러 날 슬퍼하므로 그 형제가 와서 위로하였더라"

아브라함에게도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지요. 대제사장으로 섬겼던 엘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백성들은 다스릴 수 있었지만, 그의 아들들은 다스릴 수 없었고 거기에 그의 큰 슬픔이 있었습니다. 아! 복음 안에 있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이 아침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오늘 말씀을 깊고 엄숙한 어조로 말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를 크고 진하게 쓰실 것입니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라는 집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 주제를 끝내기 전에 가정과 재산 문제로 시련과 괴로움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까요? 형제자매 여러분에게 먼저 말씀드릴 것은 여러분은 "그러나"를 가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아마도 푹신한 둥지를 짓고 거기에 누워 잠을 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이 노래할 수 있도록 둥지에 가시를 넣으신 것입니다.

옛 작가들은 나이팅게일은 가시나무 사이에 있을 때 가장 감미롭게 노래한다고 합니다. 가시가 가슴을 쿡쿡 찌르면서 노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종달새처럼 둥지에서 잠을 잡니다. 어떤 시련들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여러분을 놀라게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날개를 쭉 펴고 노래를 부르면서 해를 맞으러 일어납니다. 

시련들은 여러분을 세상서 떼어 놓으려고 보내집니다. 여러분의 음료에 쓴 것이 들어간 이유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늘의 이슬에 기대어 사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음식에는 쓸개가 섞여 있으므로 여러분은 오로지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에서만 진정한 음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시련이 없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어떤 물결이나 움직임도 없어 썩고 악취 나는 바다와 같이 될 것입니다. 콜리지가 놀라운 고요 후의 바다를 표현한 것처럼 영혼도 온갖 병과 죽음을 낳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오 자녀들로 인하여 시험을 받고 있는 여러분, 기도는 여러분의 문제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가족 안에서 고통받고 있는 경건한 아버지나 어머니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시험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만큼이나 전능합니다. 믿음은 별을 이끄는 팔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응답 없이 오랫동안 자녀를 위해 기도하셨습니까? 그런데, "내가 애쓰면 애쓸수록, 애들은 더 나빠지고, 나는 더 시험을 받는다. 그러므로 나는 기도를 그만할 것이다."라고 하시지는 않으셨는지요? 지쳐버린 관찰자여, 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약속은 지체할지라도 꼭 옵니다. 계속 씨를 심으십시오, 그리고 씨를 심을 때마다 씨 한알에 간절한 눈물을 담아 같이 심으십시오.

간절함의 눈물 속에 여러분의 씨앗을 담그십시오, 그러면 그 씨앗은 흙 속에 썩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영혼을 살리는 세례를 받았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이 빛의 상속자가 된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이 죽고, 뼈가 무덤에 묻힌 후라도 그들은 회심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잠시 여러분을 욕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혼자 생각에 잠길 때면 그들의 기억 속에 있는 더 멋진 순간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분의 기도, 여러분의 눈물, 여러분의 간절함을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충고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들이 죄 가운데 살고 있다면 그 충고가 살아나 영의 세계에서 간절한 음성으로 들릴 것이고, 방탕함에 젖은 그를 깨울 것이며, "영광을 따라가라, 그것은 너의 부모가 너를 위해 기도했던 곳이야" 라며 천사의 속사임처럼 그를 하늘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제 집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지 못하지만, 아직일 수 있습니다" 회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저는 여전히 기다릴 것입니다. 존 뉴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심지어 노예 상인이었지만, 다시 돌아왔습니다. 소망을 품으세요, 결코 실망하지 마세요. 약한 마음은 결코 사람들의 영혼을 얻을 수 없지만, 견고한 믿음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십시오. 

"마가복음 13: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시편 기자가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라고 노래할 때와 같은 시련의 바다에서 떠온 한 컵의 시련이 여러분에게도 있습니다.

 

II. 그러나 두 번째로 다윗은 언약을 신뢰했습니다. 

오! 이 땅의 삭막함 가운데서 천국의 찬란함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지요! 세상 풍파에 시달리며 울부짖던 이 세상을 벗어나 언약의 대지 위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요. 다윗이 그랬습니다. "비록~할지라도"라 했으나 그는 그다음에 "아직"을 넣었습니다. 오! 보석들과 함께한 "아직"입니다.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이제 말씀에 있는 단어들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우선 다윗은 언약을 즐거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그분은 위대한 단어이죠. 그분은 누구입니까?  나와 언약을 맺은 분은 나의 늙으신 부모님이 아닙니다. 말도 안 됩니다. 사람이 나를 위해 맺거나 나와 함께 맺은 언약이 아닙니다. 바로 그분이 저와 함께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 기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크리스천이 의지하는 언약은 갓난아기가 뿌리는 언약이 아닙니다. 그런 언약이라면 수십 번 완전히 깨져버렸을 것입니다. 이 악한 세상의 허망한 꿈들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고, 모든 육체의 정욕을 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며, 예복을 입은 성직자가 뿌리는 성수를 얼굴을 맞더라도 거듭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의지하고 굳게 서있는 언약은 하나님이 그와 맺으신 언약입니다. 

멈추어라 나의 영혼아!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너와 언약을 맺으셨다. 맞다, 깊은 어둠 속에 거하시며 홀로 보좌에 앉으셔서 영원히 다스리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치 아틀라스가 어깨에 지구를 메고 있듯 세상을 붙들고 계시며, 그의 손가락에 모든 피조물의 운명을 쥐고 계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보좌에서 몸을 굽히셔서 너의 손을 잡으시고 너와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오! 우리가 정말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영원히 빼앗을 만한 놀라운 낮아지심 아닙니까?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오! 엄청난 깊이의 말씀입니다. 어떤 왕이 나와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왕국이 나와 협정을 맺은 것도 아닙니다. 모든 왕 중의 왕, 엘 샤다이, 모든 육체의 주, 모든 세대의 여호와, 영원하신 엘로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그 기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얼마다 큰 축복인가요?

그런데, 이 말씀의 특별한 적용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여기에는 개인적으로 저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혼을 살리는 피,
오 그 피를 보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주의 은총으로 
그분은 나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네."


그분이 세상과 화목하셨다는 것은 제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그분이 저와 화목하게 되었는지 여부입니다. 그분은 언약을 거의 맺지 않으므로 제가 알고 싶은 것은 그분이 저와 언약을 맺었는지 그 여부입니다. 다윗은 손을 가슴에 얹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저는 제가 이 시대에 유행하는 종교를 비판하는 일이 잘못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군중에 속한 종교이지 개인이 향유하는 개인적인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실 것입니다. "음, 저는 칭의 교리를 믿습니다. 저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셨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우리가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좋습니다. 모두 좋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셨습니까?

기억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개인적인 경건에 대하여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한다면 여러분은 항상 지나치다고 평가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정한 마음으로 "저는 제가 용서받은 것을 압니다. 제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물론 이 말은 모든 크리스천이 때때로 할 수 있는 말이고, 불신앙이 아니라면 항상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는 제가 누구를 믿고 있는지 압니다. 저는 이제 검은 두루마리에 적힌 죄가 없다는 것도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용서하시는 피를 통해서 한 번도 죄를 범한 적이 없는 것처럼 죄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지나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지나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넘치는 것이고 저는 우리 중의 더 많은 사람이 그 거룩하고 축복스런 지나침에 빠지기를 주께 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한한 자원이 있을 때 사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물을 결코 고갈시킬 수 없음을 알면 우리는 팍팍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오!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여러분이 저에게 저의 형제가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하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제 친구가 영광을 얻는다면 정말 기쁠 것이고, 여러분 모두를 만나는 것도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거기에 있을까요?"라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그들 가운데 서서
그의 미소를 보겠는가?"

크리스천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이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언약은 여러분 각 사람과 맺어진 것입니다. 눈을 열어 보십시오. 언약에 여러분의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적혀 있습니까? 아마도 평범한 이름일 것입니다. 이름에 어떠한 직함과 존칭도 붙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언약에는 여러분의 이름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천국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용 성서를 가져올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 명부에서 여러분의 이름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생각인지요! 나의 이름입니다. 다른 이의 이름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니라 바로 이 눈으로 그분을 볼 것입니다. 크리스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이것은 개인적인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더욱이 이 언약은 그 기원이 하나님께로서 온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유효기간도 영원한 것입니다. 저는 제 설교를 들은 익명의 사람들로부터 아주 예쁜 편지들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이름도 적지 못하는 겁쟁이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받을 운명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합당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그 편지들을 잘라서 불에 던져버렸습니다. 저는 그 익명의 사람들이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들 중 몇몇은 제가 영원한 복음을 설교했다고 저와 싸우려 듭니다. 저는 감히 다른 것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다른 것이 제게 주어졌다면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복음은 제가 영원하신 하나님께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저는 복음은 영원히 살아야 할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영원한 언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시작도 없고 결코, 결코 끝나지 않는 언약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의 백성에 대한 사랑의 영원성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때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사랑하기 시작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아르미니안 친구들이여, 여러분은 모임에서 그 구절을 노래하셨지요? 당연히 부르셨을 것입니다.


"오 그렇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분께서 저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죠"

우리는 저 찬송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영광스러운 찬양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예수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예수님이 먼저 여러분을 사랑하셨다면 그분이 항상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왜 믿지 못하실까요? 게다가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일까요? 주께는 시간과 같은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분께 과거는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분은 지금 나를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그분은 과거에도 나를 사랑하셨고, 미래에도 나를 사랑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는 현재만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영원한 선택과 같은 것을 두고 논쟁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선택하셨다면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분이 지금 그들을 택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저는 그분이 그 일을 만 년 전에 하셨는지, 천 년 전에 하셨는지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과거와 같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께는 모든 것이 현재입니다. 그분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보십니다. 그분은 지금 저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전에서 현재는 영원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지금 저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분이 항상 용서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행위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 영원한 언약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저는 저의 복음을 수만의 다른 복음과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확실한 구원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것을 처음 들었을 때, 제가 믿었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제 평생을 지켜주실 것이며, 결코 저를 지옥에 가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저를 흠 없는 성품으로 지킬 것이고, 순결하고 거룩한 성도들 사이를 걸어갈 것이며 "이것은 나를 위한 복음이며 영원한 복음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떠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하는 모래 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복음입니다. 만약 제가 그것을 믿었다면 그 복음을 설교했을 것이고 주일에는 거룩하게 되었다가 월요일에는 떠났다가 화요일에는 다시 크리스천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는 은혜에서 떠나갔다가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제 참 칼빈주의 크리스천으로서 저 스스로도,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일관성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많은 말씀 앞에서 떠나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보호 장치입니다. 내 안에 있어 결코 꺼지지 않는 것이고, 결코 떠날 수 없는 군대에 입대하는 것이며, 한 번도 이름이 올려진 적이 없다는 증명 없이는 떠날 수 없는 그러한 것입니다. 오! 이것은 저를 저의 하나님 곁에 단단히 붙들어 줍니다.

그렇지만, 만약 제가 그 복음을 의심하게 만든다면 여러분은 해 아래서 가장 사악한 모습의 저를 보시게 될 것입니다. 만약 저에게서 영원한 복음을 빼앗아 간다면 저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와트 윌킨슨은 요셉 아이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영원한 언약을 말씀하시는 설교를 들려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아 그래요"라고 대답했더니 "그런데, 만약 그것을 설교하지 않는다면 복음에 다른 것이 또 뭐가 있을까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다른 것이 또 뭐가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영원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복음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불확실한 것은 그 어떤 곳에서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성경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끝까지 견디리라
간절한 만큼 확실하다;
더 행복하다고 더 확실한 것은 아니다,
영화롭게 된 영혼들은 하늘에 있다"

그러나, 다음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너무 좋은 것이므로 우리는 한 부분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질서는 천국의 첫 번째 법칙"이며 하나님은 무질서한 언약을 갖지 않으십니다. 언약은 질서 정연한 것입니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나님께서 언약을 계획하셨을 때 모든 것은 잘 정돈되었습니다. 그분은 공의가 완전히 충족되면서도 긍휼 하심이 긴밀하게 연결되도록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작은 것까지도 형벌을 받도록 하시면서도 긍휼로 죄인을 구원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속죄로 그것을 확증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모든 것을 구비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한 방울의 피까지 모두 지불하셨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몸값을 한 푼도 남기지 않으셨고 모든 것을 구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는 항상 질서 있게 역사하십니다. 모든 것을 구비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이런 질서를 깨닫게 하시지만 만약 우리가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잘 구비된 언약임을 확신하십시오.

땅을 산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남자는 계약할 때 자신이 변호사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변호사는 의뢰인만큼 어리석다는 말을 아실 것입니다. 이 경우 그 남자는 의뢰인만큼 어리석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남자는 계약서를 나쁘게 작성했고, 몇 년 가지 않아 그 계약은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 나고 그 남자는 모든 재산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언약은 아주 엄격한 의의 규칙에 따라 작성되었고 그래서 모든 것이 잘 구비되어 있습니다. 지옥에서 마귀들이 어떤 흠을 찾으려고 한다 해도 주의 언약에서는 그 어떤 흠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천국 법정의 중요 요소들이 있습니다. 하단에는 천국의 국새가 찍혀 있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피로 쓴 서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모든 것을 잘 구비한 언약입니다.

만사라는 단어는 원어 성경에는 없는 것으로 모든 것, 모든 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구비되었으니 라는 것입니다. 그 언약에 이름이 올라있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구비되어 있으니 그들은 약속을 따라올 것입니다.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오 사랑하는 크리스천 여러분, 잠시 이 약속을 집중하십시오. 왜냐하면 이 약속은 여러분의 갈증을 해소하고 피로를 풀어주는 귀중한 물이 있는 축복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만사가 구비되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만사가 구비되었습니다" 구속의 은혜가 필요하십니까? "만사가 구비되었습니다" 기도의 영을 더 구하고 계십니까? "만사가 구비되었습니다" 믿음 더 간구하고 계십니까? "만사가 구비되었습니다" 끝까지 견디지 못하실까 봐 두렵습니까? "만사가 구비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영접의 은혜, 용서의 은혜, 칭의의 은혜, 성화의 은혜, 인내의 은혜가 있습니다.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올 때면 언제든지 모든 것이 천국의 질서대로 잘 구비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명한 의사인 갈렌은 우리의 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뼈들은 워낙 적재적소에 잘 배치되고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한 부분을 손댄다면 그 조화와 아름다음을 망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가장 이상적인 사람을 그린다고 한다면 우리의 모든 지식과 솜씨로도 있는 그대로의 인간보다 더 훌륭하게 그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언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언약을 바꾸려고 한다 해도 더 좋은 쪽으로 바꿀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언약의 모든 부분은 아름답게 조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복음 언약을 설교할 때면 저는 항상 제가 안전하다 하는 것을 느낍니다. 만약 제가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는 다양한 공격에 노출되는 취약성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단단한 기반에 서 있으면 제가 모든 진리를 의지하고 있는 한 저는 강한 성에 있음을 느낍니다. 지옥의 악마가 제 성을 폭풍우로 공격하는 것조차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복음을 믿는 사람이 안전한 것이며 어떠한 논리도 그것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저희 설교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영원한 복음 만을 전하게 하시면 사람들은 소가 물을 마시듯 복음을 마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복음이 제한되고 촛불을 곡물 더미 아래 두는 한 우리는 사람들의 영혼으로 하여금 진리를 사랑하도록 이끄는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저는 주님께 그 촛불이 곡식 더미를 태워버리고 빛을 비추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 언약에 대한 저희의 설명을 마무리하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부자라면 제가 원하는 것은 한 가지였을 것입니다. 원하는 모든 부를 만들고 그것을 확실하게 지키는 것이지요. 부라는 것은 종종 날개를 달고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죠. 건강도 큰 축복이죠,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가장 큰 축복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 위에다가 "확실하다"는 단어를 쓰고 싶어 합니다. 우리에게는 친척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죠, 아! 만약 우리 그 위에 "확실하다"는 단어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우리는 이 땅 위의 그 어떤 것에도 "확실하다"라고 쓸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한 군데, 주님의 언약에만 쓸 수 있습니다.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이 아침 지금 이곳에는 자신들의 언약을 잃어버린 불쌍한 형제들이 있습니다. 아! 여러분은 한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평화로운 시간과 축복의 기쁨을 누리셨지만 이제는 우울함과 의심 속에 계십니다. 여러분의 계약서를 잃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좋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비록 여러분이 계약서를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사본만 가졌을 뿐이지 진짜 언약을 여러분의 손에 가져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증서의 제목을 분명히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증서 자체를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사본만 가졌었고 그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언약은 어디에 있을까요? 언약은 하나님의 보좌 아래 있습니다. 천국 창고의 언약궤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슴, 그분의 손,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오! 만약 하나님께서 제 구원을 제 손에 두셨다면 저는 아마도 십 분도 못 가서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구원은 제 손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손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존 뉴턴의 유명한 꿈 이야기를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그는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 있었다고 합니다. 밝은 천사들이 내려와 그에게 반지를 보여주며 "이 반지를 끼고 있는 한 너는 행복할 것이고, 네 영혼은 안전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며 반지가 자신의 것이 된 것에 행복해했습니다.

얼마 후 아주 깊은 곳에서 한 영이 와서 그에게 "그 반지는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온갖 감언이설로 그가 반지를 빼도록 설득합니다. 결국 그는 반지를 바다에 던져버리고 맙니다. 그러자 깊은 곳에서는 사나운 것들이 올라오고 산들은 굉음을 내며 화산 용암을 뿜어 냅니다. 모든 땅은 불타고 그의 영혼은 가장 큰 환난에 처하게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천사가 왔습니다.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반지를 꺼내오더니 그에게 그것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반지를 찾았으므로 이제 너는 안전하다" 존 뉴턴은 이렇게 말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럼 그것을 제 손가락에 다시 끼워주세요". 그러자, 천사는 "아니다. 아니야, 너는 너 스스로 그것을 관리할 수 없다."라며 반지와 그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제 그는 안전하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반지는 천국에 올라왔기 때문에 지옥의 그 어떤 감언이설도 그에게서 반지를 다시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습니다. 만약 저의 영적인 삶이 저의 소유로 있었다면, 저는 곧 자살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소유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것처럼, 크리스천으로서, 저 스스로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생명은 언약으로 감싸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생명은 하늘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습니다. 오! 얼마나 영광스럽고 귀중한 언약인지요! 

 

III. 이제 설교를 끝내면서 다룰 점은 시편 기자는 마음에 만족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말을 타고 참 만족이 있는 세상 사람을 찾으러 나간다면 저는 분명히 아파서 쓰러질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찾을 때까지 견딜 수 있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백발이 되어도 그런 행복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한 군데 예외가 있습니다. 바로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하시는 그분과 맺은 언약을 가진 사람의 마음입니다.

궁전으로 가보십시오. 거기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오두막으로 가보십시오. 시인은 아름다운 은퇴와 만족을 찬양할지 모르지만 거기에도 만족은 없습니다. 유일하고 확실한 만족은 입에 좋은 것이 넘치는 참 신자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신으로 만족하며 언약으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의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내 구원이라면, 나는 확신한다. 내 소원이라면, 나는 만족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내 모든 구원이고 내 모든 소원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구원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도덕주의자를 불러오십시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 온갖 고역과 일을 해왔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글쎄요, 다른 사람들만큼 착하게 살아왔고, 감히 말하건대, 죽기 전에는 더 종교적으로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저희의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종교적인 사람을 데려오십시오. 단지 외적으로 종교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에게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글쎄요, 저는 정기적으로 교회에 가고 예배도 출석합니다만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셨으니"라고 말하는 가식을 떨 수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저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여러 명 소개할 수 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이것이 나의 모든 구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뭔가를 더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에 뭔가를 더 하려고 합니다.

옛 유대 랍비는 모든 사람은 죽기 전에 적어도 하루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날을 모르므로 바로 오늘 회개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알기 원합니다. 그것을 알면 죽기 직전에 분명히 회개하고 회심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만약 다음 주일 12시 20분에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아마도 다음 주일 12시 정각까지는 죄 가운데 살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직 20분이나 더 남았다. 시간은 충분해!" 그리고 그 20분이 지나가면 그 영혼은 영원한 불 가운데 떨어지는 것입니다. 질질 끌다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을 도둑질 맞은 것입니다. 생명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죽을 때 안다면 그 준비를 미룰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실 수 있습니까? 크리스천은 말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도 콜레라와 역병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질병들은 자신을 치는 화살이라 여기며 죽음은 그에게 생명의 입구가 될 것입니다. 그도 자리에 누워 슬퍼할 수 있지만 죽음의 문턱에 가까워졌을 뿐입니다. 그는 그의 모든 구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천국에서 밝게 빛날 그의 보석은 그의 가슴에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그의 모든 소원을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에 삼각형을 하나 만들어 두셨습니다.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그 삼각형을 채우려고 노력해 왔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옛 시인 퀄즈가 잘 말한 것처럼 오로지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삼각형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천국, 영광, 그리고 언약을 얻는 방법 외에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언약이라는 이 단어는 모든 것을 내포합니다. 시편 기자는 "내 모든 소원"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내 구세주의 사랑 안에 있는 행복뿐이다"


저는 그 어떤 욕심도 없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와 함께하며 평생을 행복하게 살고 이후에는 천국으로 올라가 주의 임재 안에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그곳은 이런 곳이지요


"수백만 년 경이로운 눈으로
내 구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네,
그리고, 나는 영원히 찬양하리라
놀라운 그의 사랑을."


교리에 있어 저에게 동의하지 않는 분들에게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신념이 저와 반대인 사람이라도 저는 그분들을 저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저 그분들이 저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제가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허용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저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제가 계속할 것이라는 점을 그분들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영원한 언약에 대한 생각을 받지 못하는 분들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 생각을 바꾸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그 생각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라는 말씀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만약 성경을 읽는다면 성경 곳곳에서 여러분에게 걸림이 되는 구절들이 있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가진 성경에서 그 부분을 없앨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신성한 진리에서 그 부분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은 아시지요? 그분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하고 있으므로 그 점을 꼭 아셔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품 같은 주석은 더 이상 읽지 마시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경 속에서 영원한 사랑을 보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눈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저에게 올 것이 아니라 안과로 가야 하는 경우입니다.

여러분이 성경 속에서 영원한 사랑과 평안, 피로 사신 의를 볼 수 없다면, 여전히 편견 속에서 성경을 읽고 있다면 저는 여러분이 진리로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교계에서 복음의 오랜 교리가 더욱 부각될 수 있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저는 형제님들이 서재 책장에 꽂아 놓은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으로 만든 퀴퀴하고 오래된 책들을 좋아합니다. 새 책들은 남들에게 맡깁니다.

오! 우리가 청교도적 복음을 위해서 훌륭한 목사님들이 있었던 청교도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요!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졸고 있는 청중도, 텅 빈 예배당도, 지루한 설교자도, 진리를 말하지 못하는 입에 발린 소리만 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대신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집에 가셔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제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직접 성경을 읽고 검색하셔서 오류를 찾아보십시오.

지금까지 이 길에 대하여 아무 관계도 없고 분깃 없는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크리스천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에스겔 33:11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자는 결코 내어 쫓지 않을 것이라고 은혜롭게 약속하셨습니다. 공기가  숨 쉴 수 있는 생명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유롭게 들이쉴 수 있는 것처럼 복음도 원하는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로 자신의 죄를 깨닫는 가련한 영혼들은 누구나 그리스도께 올 수 있습니다.

"양심이 너희를 망설이게 하지 말며,
어리석게 적합한 조건을 꿈꾸지도 말지어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여러분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께 오시면, 믿기만 하면 여러분을 영원히 안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의 붕괴, 세상의 충돌, 우주의 폭발과 모든 것의 파괴 가운데서도 여러분의 영혼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언약으로 영원히 안전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지금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양자가 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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