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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자 : 1855년 3월 25일 주일 아침
■ 설교 장소 : 영국 런던 스트랜드(Strand) 북쪽에 있는 엑서터 홀(Exeter Hall)
■ 설교자 : THE REV. C. H. SPURGEON
■ 설교 제목 : 바울의 첫 기도, Paul's First Player
■ 본문 참조 사이트 : https://www.spurgeongems.org
■ 설교 내용 :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사도행전 9:11"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박해를 막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가 대적들에게 상처 받거나, 압제당하도록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악인들의 길을 돌이키거나 뒤집을 수 있는 수단이 부족하시지도 않습니다. 보통 두 가지 방법으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는데, 어떤 때는 박해자에게 혼란을 주시기도 하고 다른 때는 좀 더 축복된 방법인 그를 회심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때때로 주님은 그의 대적들을 헷갈리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십니다. 그들을 정신 나가게 만드십니다. 주를 대적하는 이들을 완전한 파멸로 이끄십니다. 그들이 자신의 멸망으로 나아가도록 허락하십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엄청나게 조롱했던 길에서 돌아서게 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오늘 본문과 같이 주님은 박해자를 변화시키십니다. 대적에서 친구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항하던 전사에서 복음을 위한 군병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게 하신 것이고, 굶주림에서 벗어나 꿀을 얻게 하신 것이며, 돌과 같은 마음을 벗고 아브라함과 같은 자녀로 키우시는 것입니다.
사울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상상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불같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스데반의 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의 잔혹함과 위세가 얼마나 강하던지 사람들은 증거로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살면서 가말리엘의 문하에 있었는데 나사렛 사람의 제자들과 끊임없이 접촉했었습니다. 그들을 비웃었고, 그들이 길을 지날 때면 그들에게 욕을 퍼부었습니다. 제자들을 핍박하는 공문을 청해서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절정으로 치달아, 피맛을 본 이 늑대인간은 완전히 미쳐버려서 다메섹으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곳에서 스스로를 사람들이 흘린 피에 젖게 할 수도 있고, 크리스천들을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그들의 고대 종교에서 벗어났다는 죄목으로 처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 하나님의 능력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예수님은 이 사람의 미친 짓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마치 긴 창을 든 기사처럼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돌진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만나 주셨고,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러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물으셨지요 "사도행전 9:4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러자, 그에게서 반항적인 마음이 은혜롭게 제거되었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마음과 바른 영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다메섹을 향해 가던 그의 목표와 목적도 바뀌었습니다. 그는 3일 밤낮을 엎드려 식음을 전폐하고 그의 귀에 들리는 신비한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의 온 영혼이 불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3일째 되던 날 사울은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때에 예수님은 아나니아를 환상 중에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오늘 본문은 첫째 발표 또는 선언이었고, 둘째 주장 또는 근거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두 가지를 다루고 끝으로 오늘 본문이 여러분의 마음에 적용되도록 할 것입니다. 물론 적용은 하나님께서 홀로 하시는 일이지만 이 아침, 말씀이 전해지는 동안에 그 적용을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I. 첫 번째로 "가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이 말씀에는 선언이 있습니다.
어떠한 전제도 없이 말한다면 이것은 하늘에서 울려 퍼진 한 사실에 대한 발표였습니다. 천사들에게는 기쁜 것이었고, 아나니아에게는 놀라움이었으며 사울 자신에게는 새롭고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인식하셨다는 사실을 발표하신 것이었습니다. 불쌍한 사울은 주의 자비를 구하며 엎드렸고, 기도하기 시작했으며, 하나님은 듣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본문을 읽으시면서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울을 어떻게 주목하셨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라" 주님은 사울이 사는 곳을 아셨습니다. "유다 집에서 찾으라" 주님은 사울이 머무는 집도 아셨습니다.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주님은 사울의 이름도 아셨고, 그가 어디서 왔는지도 아셨습니다.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가 기도 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오!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었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요. 마음이 상한 이 불쌍한 죄인은 그의 방으로 기어 올라가 무릎을 꿇지만 그의 울부짖음은 그저 한숨과 눈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 신음은 천국의 모든 수금을 울려 퍼지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눈물을 보시고 영원히 보존되도록 천국의 눈물 단지에 넣으셨습니다.
경외심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는 오로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지만 "기도는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눈물은 천국의 다이아몬드이고 탄식은 여호와의 보좌에 울리는 음악의 일부입니다. 비록 기도가
"갓난아기가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말"
이라도,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높은 곳에 계신 주께 이르는
가장 숭고한 힘."
이 생각을 잠시 넓혀보겠습니다. 기도는 하늘에서 주목받습니다. 오! 저는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이런 생각하고 계심을 압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서고, 그를 찾는다니, 나는 너무 하찮은 존재이고, 죄 많고, 사악해서 그분께서 나를 주목하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조차 없어"
형제자매 여러분, 그런 불신자 같은 생각을 품지 마십시오. 우리의 하나님은 한낮 꿈에 머무는 하나님도 아니시고, 볼 수 없는 짙은 어둠으로 스스로를 가리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듣지도 못하는 바알과 같지도 않으십니다. 진실로 그분은 전쟁을 고려하지 않으실 수도 있고, 왕들의 장엄함과 화려함도 관심 없으시고, 군악의 웅장함도 듣지 않으시며, 사람들의 자랑과 성취에도 괘념치 않으시지만, 큰 슬픔으로 가득한 마음이 있는 곳, 눈물이 고인 눈이 있는 곳, 고뇌로 떨리는 입술이 있는 곳, 깊은 탄식과 참회의 한숨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여호와의 귀는 활짝 열려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들을 그분의 기억에 적어 두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마치 장미 꽃잎을 보관하듯 그의 기억의 책 사이에 보관해 두십니다. 그래서 그 책이 열릴 때면 거기에서는 아주 귀중한 향기가 피어오를 것입니다.
오! 가장 어둡고, 가장 사악한 모습의 불쌍한 죄인이여, 당신의 기도를 들으셨고 주께서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디였을까요 헛간? 아니면 옷장? 이 아침 침대 옆이었을까요? 아니면 여기 이 홀일까요? 이제 여러분의 눈은 하늘을 바라보십니까? 말씀하십시오. 여러분의 입술이 지금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시는 것을 제가 들었을까요?
죄인인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전보를 능가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우리가 짧은 순간에 메시지를 보내고, 답을 받을 수 있음을 아십니다. 그런데, 저는 성경에서 전보보다 빠른 것이 있음을 읽었습니다. "이사야 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그렇습니다. 불쌍한 죄인들이여 주께서 여러분을 주목하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그분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다시 한번 이것은 천국의 기쁨이 되는 사실의 선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우리의 구주께서도 기쁨으로 여기신다는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늘을 바라보시며 미소 지으신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외치셨지요. "마태복음 11:25-26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우리 영혼의 목자께서는 그의 양들이 안전하게 우리에 있는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방황하던 이를 집으로 데려오실 때 정말로 기뻐하십니다. 그분이 이 말들을 아나니아에게 하셨을 때 그분의 눈에서는 천국 낙원의 미소가 비쳤을 것입니다. "보아라" 나는 내 대적의 마음을 얻었다. 나는 나를 박해하던 이를 구속했고 그는 지금도 내 발아래 무릎을 꿇고 있다. "보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 예수께서는 직접 노래를 인도하셨고, 새로운 개종자를 인하여 노래하며 기뻐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길을 잃지 않은 99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으로 인하여 더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들도 또한 기뻐했습니다. 왜 그렇까요? 주께서 택하신 자가 태어날 때면 천사들은 요람 주위로 둘러섭니다. 아기는 성장하고 죄에 빠집니다. 천사들은 그를 따라가며 그의 길을 추적하고 수많은 방황을 눈물로 바라봅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눈물을 흘립니다. 이제 이 사람은 복음의 소리 아래로 왔습니다. 천사는 말합니다 "보라, 그가 듣기 시작한다" 잠시 후 말씀은 그의 마음에 스며들고, 눈물은 그의 뺨을 타고 흐릅니다. 결국 그는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소리로 외칩니다. "주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보십시오! 천사가 날개를 치며 하늘로 올라가 말합니다. "천사 형제들이여, 제 말을 들어보세요, 저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천국 종을 울리고 영광 가운데 즐거워합니다. 다시 그들은 기쁜 소리로 외칩니다. 진정으로 말씀드립니다. "누가복음 15:10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천사들은 우리가 기도할 때까지 지켜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면 "보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고 천국에는 천사 외에도 이를 기뻐하는 또 다른 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보다 먼저 간 우리의 형제자매들입니다. 저는 천국에 많은 친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아주 사랑하는 한 분이 계십니다. 저를 위해 자주 기도해주신 분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저를 보살펴 주시고 키워 주셨지만 이제는 영광의 보좌 앞에 앉아 계신 분입니다. 갑자기 데려가셨지요.
저는 그분이 그분의 사랑하시는 손자를 바라보셨던 것을 상상해 봅니다. 할머니는 손자가 죄와 악 가운데 그리고 어리석음 가운데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보실 수는 없으셨을 것입니다. 영광스럽게 되신 분들의 눈에는 눈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한에 쌓여 보실 수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그런 감정은 느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 그 순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저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완전히 혼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할 때 "보라, 그가 기도한다. 보라, 그가 기도한다"하시는 할머니를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오! 할머니의 표정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그분이 "보라, 그가 기도한다." 말씀하실 때, 그분은 두 개의 천국, 두배의 행복을 가진 듯 보였습니다. 그분 자신에게 있는 천국, 그리고 제 안에 천국 말입니다.
아! 젊은이들이여 당신들의 어머니께서는 황금길을 걷고 계시며 이 시각에도 여러분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아기였을 때 품에 안고 키우셨으며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께 봉헌하셨던 바로 그분입니다. 그분은 천국에서 행복한 만큼 조마조마하게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이 아침에도 여전히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어떠십니까, 젊은이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나에게로 오라"라고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회개의 눈물을 흘리십니까? 그렇다면 제 생각에 여러분의 어머님은 "보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외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오 은혜로운 주여, 세상에서 저의 자녀로 주셨던 그를 이제는 당신의 빛의 자녀로 삼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죄인의 회심에 대하여 천국에서 그 누구보다 더 크게 기뻐할 사람은 바로 사역자입니다. 주의 참된 사역자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오, 여러분, 여러분은 주의 참된 사역자들이 여러분의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거의 생각지 않으십니다. 아마도 여기에 서서 설교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게 전부라면 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때, 여러분의 구원과 저주가 저희가 말하는 것에 어느 정도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저희가 충실하지 못한 파수꾼임이 밝혀질 때 주께서는 여러분의 피값을 저희 손에 청구하실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제 평생,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천번 설교를 할 텐데, 하지 말아야 할 수많은 말들을 했음이 밝혀질 것을 생각하면 저는 깜짝깜짝 놀라고, 두렵고 떨립니다. 루터가 말하기를 자신은 적들과 맞설 수 있지만, 무릎을 꿇지 않고서는 강단에 오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설교는 아이들 놀이가 아닙니다. 노고와 열망 없이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엄숙한 일이지요. 여러분이 설교를 영원과 관련지어 보신다면, 설교는 정말 굉장한 일입니다.
아! 주의 사역자들이 여러분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는지요! 만약 여러분이 그가 기도하는 방 창문 아래에서 그의 기도를 들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매 주일 밤 그날 했던 설교에 대해 좀 더 잘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주여 누가 믿었나이까?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나셨습니까?" 하며 주께 간구하는 것을 들으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천국에 가서 여러분을 바라보다가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그는 얼마나 기뻐할까요? 그는 손뼉 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께서 제게 주신 자녀입니다. 보십시오, 저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이 주를 알도록 이끄는 것은 빠져 죽던 이를 구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물에 빠진 불쌍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점점 가라앉고 있습니다. 그를 구해야만 합니다. 저는 물에 뛰어들어 그를 단단히 붙잡고 해변으로 끌고 나와서 땅에 그를 눕힙니다. 의사가 옵니다. 의사는 그 사람 위에 손을 얹고 "이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겠네요"라고 말합니다. 저희는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합니다. 저는 마치 그 사람의 구원자가 된 것처럼 느끼면서 엎드려 제 귀를 그 사람의 입에 가져다 댑니다. 마침내 저는 "숨을 쉽니다! 숨을 쉽니다!"라고 외칩니다. 여기에 참 기쁨이 있습니다! 그가 숨을 쉬고 아직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을 보게 되면 우리는 외칩니다. 그가 숨을 쉰다. 죽지 않았다. 살아있다! 사람이 기도하는 동안에는 그는 죄와 허물로 죽지 않고 대신 생명을 얻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함을 입는 것입니다. "보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목하신 일일 뿐만 아니라 천국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장소에서 이것은 사람들을 아주 놀라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나니아는 놀라서 두 손을 들고 말합니다. "오 주여, 저는 그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다른 사역자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때때로 교인들 중에 그런 분들을 보게 되는데,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좋습니다. 아주 희망적입니다. 저는 그분들을 얻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확신하며, 곧, 주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 하신 일들을 그들로부터 들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곧 저는 그들 중에 아무도 보지 못하고 그들 모두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하신 주님은 대신에 아무런 희망도 없는 왕따, 알코올 중독자, 타락에 빠진 사람과 같은 이들을 주의 은혜를 찬양하도록 저에게 보내주십니다. 그러면 저는 놀라서 손을 들며 이렇게 생각하지요 "나는 저들이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했어야 했어"
얼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순 정도 되시는 한 가난한 남성분이셨습니다. 거친 선원이었고, 마을에서는 최악의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습관적으로 술을 마셨고, 저주를 퍼붓거나 욕할 때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그가 안식일에 교회에 왔는데 때마침 저와 가까운 분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며 우시는 본문으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난한 남성은 생각했습니다. "이거 뭐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같이 악마 같은 인간 때문에 우셨다고?"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돌아보시기에는 너무 나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분은 목사님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지난 60년간 악마의 깃발 아래에서 항해해 왔었습니다. 이제는 새 주인을 모셔야 할 때입니다. 옛날의 배는 침몰시키고, 모든 것을 가라앉혀 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저는 새로운 배로 임마누엘 왕자의 깃발 아래에서 항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이후로 그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고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러분이 생각했을 마지막 사람이었습니다. 왠지 하나님께서는 그 마지막 사람들을 택하십니다. 주님은 다이아몬드는 거들떠 보시지도 않으시고 자갈을 집으십니다. "마태복음 3:9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주님은 화학자보다 지혜로우십니다. 그분은 금을 정련하실 뿐만 아니라 일반 금속을 귀중한 보석으로 변화시키십니다. 그분은 가장 추악하고 사악한 이를 데려다가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드십니다. 이전에는 죄인이 있고, 거룩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성도로 만드십니다.
사울의 회심은 별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크리스천이 된 것보다 더 별난 일이었을까요? 몇 년 전, 누군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교회에 속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대해 물었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말했을 까요?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네! 나는 당신들 같은 감리교인도 아니고, 앞으로 종교를 가질 생각도 없어. 나는 내가 좋아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여러분이나 저나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 땅에서 여기에 오게 되었을까요? 우리를 거쳐간 변화를 보면 마치 꿈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보다 나은 사람들을 우리의 가족들 가운데 많이 남겨 두셨습니다. 왜 우리를 택하셨을까요? 정말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아나니아가 그랬던 것처럼 놀람 가운데 우리의 손을 들고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보라, 보라, 보라, 이 땅에서는 기적이요, 천국에서는 놀라움일세"
제가 이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라는 이 사실은 사울 자신에게도 새로운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무엇이 새로운 것이었을까요? 사울은 하루에 두 번 기도 시간이면 성전에 올라가곤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와 동행할 수 있었다면 그가 다음과 같이 고상하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오! 아마 여러분은 그가 주의 보좌 앞에서 일장 연설을 쏟아 놓는 장면을 보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입니까? 이게 뭐죠? 그는 그전에 결코 기도한 적이 없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없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가 했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한 노인분께서 어렸을 적 배우신 기도 방법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축복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을 배우셨고 이와 같은 기도를 그분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을 때까지 70년을 지속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무한하신 하나님의 긍휼로 주께서 그분의 마음을 만져주셨고 그분은 그분이 꾸준하게 기도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전혀 기도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셨다고 합니다. 자주 기도의 말을 했지만 전혀 기도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울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그는 수많은 고상한 말들을 내뱉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가식으로 긴 기도를 했지만 모두가 실패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진실한 기도가 온 것입니다. "보아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어떤 사람이 창조주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전능자의 보좌 앞에서 그는 라틴어로 무운시를 읊고 있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으시고 고요한 무관심 속에 앉아 계십니다. 이후에 그 사람은 다른 방식을 시도하는데, 책을 찾아서 오래된 최고의 기도를 무릎을 꿇고 즐거움 가운데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존하신 하나님은 그의 공허한 형식에 개의치 않으십니다.
결국 그 불쌍한 피조물은 자신의 책과 무운시를 던져 버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여, 들으소서, 제발 들어주소서"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저의 말을 들어라, 나는 저의 말을 들었다" 여러분이 찾으셨던 주의 자비입니다. 하나의 진정한 기도가 수천의 형식보다 낫습니다. 영혼에서 나오는 한마디의 기도가 수많은 건조한 기도문 읽기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은 입과 머리에서만 나오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그분은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기도를 좋아하십니다. 만일 제가 자신의 인생 중에서 제대로 된 기도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오늘 아침 여기에 있다고 하면 참으로 무례한 일이 되겠지만, 여러분 중에 몇몇 분은 제대로 된 기도를 한 적이 없습니다. 어떤 젊은이는 부모님을 떠날 때 부모님으로부터 아침, 저녁으로 기도해야만 한다고 들었지만, 그걸 창피해하고 하지 않습니다.
오 청년들이여, 여러분이 죽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죽음의 표식을 갖게 될까요? 아니면 기도로 천국에 들어가게 될까요? 아닙니다. 여러분은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나 버림받을 것입니다.
II. 두 번째로 오늘 본문에는 논거가 있습니다.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아나니아의 안전을 위한 하나의 논거였습니다. 불쌍한 아나니아는 사울에게로 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마치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의 집에 들어간다면, 그가 나를 보면 나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이니까 나를 바로 예루살렘으로 끌고 갈 거야, 나는 갈 수가 없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께서 "보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말씀하시니 아나니아는 "그렇군요, 그렇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저를 상하게 하지는 않겠지요. 그가 진정으로 기도하는 하는 사람이라면 저는 안전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항상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도 신실한 크리스천에게는 경의를 표합니다. 주인은 결국 기도하는 하인을 두기를 좋아합니다. 굳이 종교를 들먹이지 않아도 독실한 하인을 두기 원하고 다른 이들보다 그를 더 신뢰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자칭 타칭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불려지는 사람들 중에는 기도를 조금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기도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셔도 좋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 기도한다면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은밀히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이라면 공적인 신뢰도 받을만합니다. 저도 하나님의 보좌에 다녀오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항상 평안함을 느낍니다.
저는 두 남자가 스위스 어딘가를 함께 했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숲의 한 복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 이야기가 사람들이 머물 곳을 이야기하는 슬픈 이야기이고 그것에 머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지도 아실 것입니다. 한 사람은 불신자이고 한 사람은 크리스천입니다. 불신자가 크리스천에게 "나는 여기에 전혀 머물고 싶지 않아, 너무 위험해!"라고 말하자, 크리스천은 "그래요, 그래도 찾아봅시다"라고 답합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한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집이 너무 꺼림칙해서 둘 다 그 집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영국 집에 있는 것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집주인 말합니다. "손님들, 저는 잠자기 전에 저희 가족과 함께 항상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밤에도 저희가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두 남자는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세요"라고 대답합니다. 두 사람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불신자가 말합니다. "나는 이제 전혀 두렵지 않아", 크리스천은 "왜?"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불신자는 "우리의 집주인께서 기도를 하셨기 때문이지"라고 말합니다. 크리스천은 "오, 사람이 기도를 해서 네가 이 집에서 잠을 잘 수 있다니, 결국 네가 종교적인 뭔가를 생각하는 것으로 보이는구나"라고 말합니다.
두 남자가 잠을 잘 수 있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그들은 단꿈을 꾸었습니다. 기도의 지붕이 얹어지고 예배의 벽으로 둘러진 집이었으니 그 안에 사는 사람은 그 누구도 그들을 해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아나니아가 사울의 집에 안전하게 갈 수 있었던 근거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한 것은, 여기에 바울의 진정성에 대한 근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은밀한 기도는 진실한 신앙을 알아보는 최고의 시험 중 하나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아나니아에게 "보라, 저가 전도하고 있다"라고 하셨다면 아나니아는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는 여전히 속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아나니아에게 "그가 교회 모임에 갔다"라고 하셨다면 아나니아는 "양의 옷을 입은 늑대로 갔을 수 있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보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하셨고,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한 청년이 제게 와서 그가 느끼고 있는 것과 하고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야기 끝에 저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낫겠어요"라고 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당신은 하실 겁니다"라고 말해줍니다. 그 청년은 결국 무릎을 꿇고, 말을 잃습니다. 그는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고 여전히 무릎을 꿇은 상태로 더듬거리며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좀 더 만족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당신의 모든 말에 신경 쓰지 않았고, 당신의 기도를 원했었습니다" 그러나 오! 만약 제가 그가 집에 가는 것을 쫓아갈 수 있다면, 집에 가서 혼자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저는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기도하는 사람이 진짜 크리스천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매일 성경 읽기에 매진하는 것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혼자서 은밀히 기도한다면 여러분은 참된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작은 신앙이라도 그것이 신실하기만 하다면 산과 같은 겉치레보다 훨씬 낫습니다. 가정에서의 경건이 최고의 경건입니다. 기도는 여러분이 죄에서 떠나도록 만들지만 죄는 여러분이 기도에서 떠나도록 만들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실제로 회심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사람은 진실할 수도 있지만 완전히 틀릴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진심으로 옳았습니다.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라는 이 말씀은 그의 신앙이 진심이라는 최상의 근거였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한마디로 정리해 보라고 한다면 저는 "기도"라는 단어에 있다고 답할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의 모든 경험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냐"라고 묻는다면 저는 "기도"라고 답할 것입니다. 사람은 기도할 수 있으려면 그전에 반드시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할 수 있으려면 그전에 반드시 그를 향한 주의 긍휼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모든 미덕은 바로 기도라는 단어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본인이 기도의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신다면 저는 바로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 신앙의 실재와 진실성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사람의 택함 받음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저는 종종 선택설에 관한 교리를 어려워하는 분들을 만나곤 합니다. 이따금씩 저에게 선택설을 설교해 달라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때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있습니다. 가셔서 제 주인에게 왜 그것을 그곳에 두셨는지 여쭈어 보십시오. 저는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섬기는 사람으로 위에서 주신 메시지를 전할 뿐입니다. 제가 하인이라면 문 앞에서 제 주인의 메시지를 바꾸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우연히 하늘나라의 대사가 되었고, 제가 받은 메시지를 감히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것이 틀렸다면, 본부로 올려 보내십시오. 그것은 거기에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택하심을 받은 건지 어떻게 알 수 있죠? 저는 제가 택하심 받은 것이 아닐까 봐 두렵습니다" 여러분은 기도하십니까? "보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할 수 있다면 "보라, 저는 내가 택한 그릇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택함 받은 것입니다. 이것들이 택함 받은 증표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에 속했다고 볼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갈망이 있으십니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으십니까? 그리스도께 나아오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리고 이런 소망들이 진짜이며 여러분을 마음을 다하는 눈물의 간구로 이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택함 받지 못함에 대해서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주께서 "에베소서 1: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III. 이제 적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아침 여러분을 돌려보내드리기 이전에 몇 말씀드릴까 합니다. 제가 이 주제에 대하여 좀 더 잘 들어갈 수 없었음이 안타깝지만, 영광스러운 주께서는 저희에게 저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저희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따라서 요구하십니다. 저는 제가 가정에 진리가 세워지도록 촉구하는데 실패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역도 주께 있으며, 나의 판단도 주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영혼에 대한 진실한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 판단에 있는 오류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씀드릴까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보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수록,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는 더욱 명확 해진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 아니겠습니까?
오늘 아침 여러분은 여러분의 증거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여러분의 확신을 잃어버린 장소를 장소를 말씀드릴까요? 그곳은 바로 여러분의 옷장입니다. 크리스천은 뒤로 물러날 때마다 그의 방황을 바로 옷장에서 시작합니다. 제가 느끼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도 종종 하나님을 떠났었습니다. 물론 완전히 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누렸던 주의 사랑의 달콤한 맛을 종종 잃어버렸던 것이지요. 저는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때 내가 즐겼던 평화로운 시간들.
여전히 달콤한 그때의 기억!
하지만, 그것들은 안타까운 공허함만 남기네!
세상은 결코 채워줄 수 없어."
저는 열정도 에너지도 없이 설교하러 교회에 온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었지만 깨달음을 주는 빛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모든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말씀드릴까요? 그것은 바로 제 옷장입니다. 제가 기도하는 것을 어느 정도 중단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제 잘못을 고백합니다. 이제 저는 압니다. 제가 하나님을 떠날 때면 그곳에 문제가 있고 문제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 그리스도인들이여, 행복하고 싶습니까? 그럼 더욱 기도하십시오. 승리하고 싶으십니까? 그럼 더욱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막으면, 우리는 전투를 중단한다;
기도는 크리스천의 갑옷을 더욱 빛나게 한다"
베리 여사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천하를 주어도 제 옷장에 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제이 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열두 사도가 여러분 근처에 살고 있었고, 여러분이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면, 이 만남이 여러분을 옷장에서 끄집어냈다면, 그들은 여러분 영혼의 진짜 상처를 드러낼 것입니다" 기도는 가장 귀중한 물건을 집으로 가져오는 배입니다. 기도는 가장 풍성한 수확을 산출하는 토양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면 여러분의 일로 너무 분주합니다. 한두 마디의 급한 말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리고는 밤에는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하루의 끝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바로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참 신앙을 더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날 기도하지 않는 교회들을 보면 그리 탐탁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저는 이 대도시에 있는 이 교회, 저 교회도 가보고, 아주 좋은 집회에도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평일 저녁에 있는 그들의 기도 모임에 가보면 십여 명뿐이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수 있으실까요?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실까요? 물론 그분은 하실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분의 섭리에 따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분은 "이사야 66:8 그러나 시온은 구로 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더 기도하기를 원한다는 바로 이 생각으로 여러분의 교회와 예배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아침 여기에 계신 많은 분은 저희 교회 성도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예배 처소에 계셔야만 합니다. 저는 다른 교회의 성도들을 훔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것만 아니라면 오늘 저의 메시지를 들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이 아침 여러분이 그러셨더라도, 여기 계신 동안에는 여러분에게 가능한 최대한의 유익이 되도록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집으로 돌아가시면 여러분의 사역자에게 "목사님, 우리는 기도를 더 해야만 합니다"라고 말씀드리십시오. 사람들로 하여금 더 기도하게 하십시오. 여러분 혼자여도 좋으니 기도 모임을 가지십시오. 얼마나 모였냐고 물으면 여러분은 넷이라고 답하시면 됩니다. "넷이라고요? 어떻게 요?"라고 물으면 "그건, 저 자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주 풍성하고 참된 교제를 가졌습니다"라고 답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기도의 헌신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우리의 교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 주여 저희를 깨어 주시고, 저희가 기도의 자리에 나가도록 인도하소서, 저희가 기도할 때 저희는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 저는 삼손이 여우에게 했던 것처럼 여러분에게 기도의 불덩이를 매달아 옥수수 단을 모두 태워 버릴 때까지 그 사이로 보내고 싶습니다. 저는 제 말로 큰 불을 일으켜 모든 교회를 마치 희생제물처럼 모두 태워 주의 보좌 앞에 올려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신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크리스천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을수록 여러분의 신앙을 믿을만한 증거도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있다면 숨 쉬는 것을 멈춘 것이고 여러분이 전혀 숨 쉰 적이 없다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아직 믿음이 없으신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오 여러분, 저는 여기만 아니라면 저만을 위할 수도 있습니다. 믿는 분들에게 말하는 것이 엄숙한 일일진대, 제가 여러분을 대하는 것은 얼마나 더 할까요? 저희는 한편으로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힘을 신뢰하도록 만드는 말을 하지는 않을까 두렵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분을 나태와 안정의 잠에 빠지게 하지는 않을까 떨립니다.
저는 저희 대부분이 여러분에게 어떤 방식으로 설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가에 대해서 약간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믿습니다. 저희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희의 바람은 저희가 여러분의 영혼을 얻을 수 있도록 그렇게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마치 도시를 지키면서 잠에 짓눌려 있는 파수꾼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스스로 잠들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하지만 연약함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책임에 생각은 그를 일어서게 합니다. 의지가 약한 것이 아니라 힘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바라기를 주의 모든 파수꾼들이 신실하게 되기를 열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들이 완전할 수 없음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에디스톤 등대의 늙은 등대지기처럼 느낄 것입니다. 인생은 빠르게 쇠락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등대지기는 그의 온 힘을 짜내어 그가 죽기 전에 불을 밝히려 다시 한번 등대를 기어 올라갑니다. 오 성령이시여 우리로 하여금 등대불을 지키게 하셔서 사람들 주위에 있는 암초나 모래톱, 위험한 해안을 알릴 수 있게 하시고 사람들을 자유의지나 피조물의 공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게 하소서.
만약 제 친구들이 죄인들에게 설교하는 중요한 일에 있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얼마나 간절히 구하는지 알았다면, 제가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때 그들 중의 일부처럼 느끼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하고 싶습니다. 만약 주께서 저에게 마른 뼈에게 그들이 살 것이라고 말하라고 하시면 비록 그것이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이라도 저는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는 제 양심과 하나님께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이제 저는 최고의 엄숙함과 진지함으로 말씀드립니다. 기도 없는 영혼은 그리스도가 없는 영혼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고 이방인일 뿐입니다. 탄식과 신음, 눈물을 모르는 사람들은 꼭 필요한 경건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상태에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멀어져 있고,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진노하십니다.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 이시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오! 죄인들이여 눈을 들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표정을 바라보시오. 주님은 바로 당신에게 진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만큼 제가 여러분에 간청드리는 말씀은 한순간이라도 여러분이 지금 살고 계신 그대로 결국 기도 없이 죽게 된다면 스스로는 과연 어떻게 될지 심사숙고해보시라는 것입니다. 임종의 자리에서 하는 한 번의 기도가 여러분을 구원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임종의 자리에서 하는 기도는 일반적으로 임종의 연극일 뿐이며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을 울릴 수 없는 동전이고, 위선과 허위로 새겨진 동전일 뿐입니다.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한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한 번도 기도한 적이 없으시다면 앞으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차라리 죽음이 영원히 잠이라면 여러분에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옥으로 간다면, 오, 그 형벌과 고통을 어찌 감당할까요!
그러나, 저는 그것들을 묘사해서 여러분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주께서 여러분이 잃어버린 자들의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다만, 불속에서 "누가복음 16:24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불쌍한 죄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 헐어버린 두 입술에서 그의 혀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마치 불덩이처럼 얼마나 그의 입천장이 벗겨지고 불타고 있는지요. 한 방울의 물을 애타게 갈구하는 그 사람을 보십시오.
그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저 지옥 중의 지옥이 죄인들에게 임할 것이고 그것은 영원할 것이라는 말을 전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게 될 것이고, 그 보좌에는 "영원히"라고 적혀 있을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들의 불타는 고통의 쇠사슬 소리가 울릴 때면 그들은 "영원히"라며 울부짖을 것이고, 그 "영원히"하는 울부짖음이 메아리쳐 울릴 것입니다.
"그들의 형벌대에 '영원히'가 적혀있고,
그들의 사슬에도 '영원히'가 적혀있다;
'영원히'가 불속에서 타오르고,
'영원히'가 영원히 지배한다.”
"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정말로 행복할 텐데. 구원의 희망이 있다면 정말로 평안할 텐데. 그러나, 나는 영원히 있어야 하는구나!" 이런 것은 한심한 생각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영원한 형벌에서 나올 수 있고, 축복받은 자들 가운데 있을 수 있는, 천국으로 가는 길은 오직 기도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 성령님을 통한 기도, 하나님의 보좌를 향한 간구 밖에 없습니다.
"에스겔 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시편 145:8 여호와는 은혜 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자 우리 모두 그분께로 가서 이렇게 말씀드리십시다. "주께서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우리의 패역을 고치실 것이며, 우리를 즐거이 사랑하실 것이며, 우리를 은혜로 용서하실 것입니다."
오! 오늘 만약 제가 한 영혼이라고 얻을 수 있다면 저는 만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만약 스무 명을 얻는 다면 정말 기뻐하겠지요. 더 많은 영혼을 얻을수록 저는 더 많은 상을 얻을 것입니다. 더 많이! 그러나, 아닙니다. 저는 그 모든 상을 즉시로 예수님의 발 앞에 내려놓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모든 영광을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영원히"
기도는 주시기로 작정된 것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신 축복;
살아있는 한 크리스천은 기도해야 해,
그들은 오로지 기도할 때만 살아있기 때문이야.
당신은 여전히 침묵의 거짓에 있을 건가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기도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의 영혼아, 너는 높은 곳에 친구가 있구나,
일어나 그곳을 바라보아라.
기도는 연약한 영혼을 돕는다
비록 생각은 흩어지고 말은 어눌할 지라도;
말을 할 수 있어도, 말을 할 수 없어도 기도하세요
단, 예수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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