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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자 : 1855년 3월 11일 주일 아침

■ 설교 장소 : 영국 런던 스트랜드(Strand) 북쪽에 있는 엑서터 홀(Exeter Hall)

■ 설교자 : THE REV. C. H. SPURGEON

■ 설교 제목 : 영적 고통에 비례하는 위로, Consolation Proportionate to Spiritual Suffering

■ 본문 참조 사이트 : https://www.spurgeongems.org

■ 설교 내용 :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린도후서 1:5"

고난에서 쉬기를 구하십시오, 여러분은 슬픔과 비통함의 자녀입니까? 이곳은 여러분의 짐을 가볍게 하고 문제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오, 고통과 비참함의 자녀들이여 잠시라도 여러분의 고통과 슬픔을 잊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곳은 긍휼의 공간인 베데스다입니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하고, 결코 멈추지 않는 여러분의 고난의 길을 잠시 머물게 하기 위해 만드신 공간입니다. 그는 그의 자녀들이 이곳에 있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왜냐하면 그의 자녀들은 이곳에서 고난 중에 있는 위안, 슬픔 가운데 있는 기쁨, 고통 안에 있는 위로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조차도 신성한 성경과 거룩한 우리의 종교 안에 뭔가 지극한 위로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 논리를 따라가며 기독교가 사실이 아님을 증명했고 이제 기독교는 망했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자신들의 생각이 엄청난 망상이었고 오류였음을 떠올리며 주저앉아 울었다는 것입니다.

아, 여러분,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울 수도 있습니다. 만약 성경이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 하신 자리로 모일 수 없다면 여러분은 마치 고역 속에 있는 것처럼 손을 허리에 얹고 걸어 다녀야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땅에서 여러분의 논리나 잠깐의 세상 즐거움 말고는 가진 것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 하늘 너머의 소망, 분명 이 땅의 것보다 좋을 피난처, 분명 세상 것보다 좋을 구원이 없다면 여러분은 울 수도 있습니다. 아! 가슴이 찢어지듯이 우십시오, 온몸을 한줄기 눈물에 흘려보내십시오. 여러분의 슬픔은 자연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물 같은 것이 필요할 것이므로 두 눈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로 강을 이루고 구름에게 머리를 쉬게 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는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의 기쁨이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온 땅을 헤집고 다녀 보았지만 그 어떤 보물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타락한 세상을 수천번 뒤집어 보았지만 귀한 것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바로 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예수의 기독교 안에서 우리는 위로와 기쁨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고린도후서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네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두 번째는 그 고난이 다르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넘치는 비례의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영광을 얻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I. 첫 번째는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의 갑옷을 입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사병을 모으는 군인은 종종 어리석은 젊은이들에게 돈을 쥐어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폐하를 모시는 것은 참 좋은 일이며, 화려한 색의 옷을 입고 걸어 다닐 뿐 별로 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상 힘든 일은 없을 것이며, 특별한 일은 없고 군인이 되어 영광을 향해 가는 것만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종은 십자가의 군병을 모을 때 그렇게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직접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좋은 군사로 함께 고난을 받기를" 원하셨고, 모든 길을 갈 준비가 된 제자를 원하셨습니다. 

저는 가끔 종교가 화려하게 묘사되는 것을 듣곤 하는데 저는 참 불쾌합니다. "잠언 3:17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에게는 슬픔도 고난도 없을 거라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주 큰 슬픔과 시련 없이 즐겁고 밝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고난을 막아줄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우리는 다르게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리스도의 군병이라면 여러분은 어려운 싸움을 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푹신한 침대도 없고, 천국까지 타고 갈 마차도 없습니다. 거친 길을 걸어야만 하고, 산들을 올라야 하며, 강을 건너야 하고, 용과 싸우고, 거인들을 죽여야 하며, 많은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큰 시험들을 견뎌내야 합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이미 길을 떠나셨고, 몇 걸음 가지 않아 이것이 힘든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신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길은 기쁜 길이고, 모든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길이지만, 이 길 자체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길이 기쁜 길인 단 한 가지 이유는 동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고, 이 넓고 거친 광야의 가시밭길을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우리의 사랑하시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크리스천은 문제를 예상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주의 자녀인 만큼 여러분의 구주께서는 여러분에게 그의 유산을 남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저는 제게 고난이 없었다면 제가 주의 가족중의 하나라고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기 시련을 결코 겪지 않았다면 제가 천국의 상속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의 막대기를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부모는 자녀를 버릴 수도 있지만, 하늘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주의 백성들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고 크리스천은 그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것을 믿고 기대하십시오. 그래서 그것이 오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오, 고통아! 나는 너를 예상하고 있었다. 너는 이상한 것이 아니다. 나는 네가 올 것을 늘 기대하고 있었다" 여러분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기다리고 있다면 그 시련을 얼마나 가볍게 할지는 굳이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하루를 쉽게 지냈다면, 놀라워하십시오. 여러분의 일주일에 박해가 없었다면,  엄청난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가슴 깊이 한숨을 쉬지 않고 한 달을 산다면 기적 중의 기적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렇지만, 고난이 오면 이렇게 말하십시오 "내가 기다리던 것이 왔군! 천국으로 가는 지도에 표시해 놓았고, 문제없어! 나는 확신 있게 계속 나아갈 것이야. 내 주인께서는 나를 결코 속이지 않으셨어" 

"왜 나는 원망이나 불평 속에 있어야만 하는가 
시험인가 고통인가? 그가 말씀하신 것인데"

그렇지만, 왜 크리스천은 고난을 예상해야만 할까요? 왜 그리스도의 고난이 나에게 넘칠 것을 예상해야만 할까요? 형제자매 여러분, 잠시 여기서 제가 여러분에게 왜 시련을 견뎌야만 하는지를 네 가지 이유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우선 위를 보시고, 아래를 보시고, 주위를 돌아 보신 다음에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시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왜 나에게 넘치는지 그 네 가지 이유를 보시게 될 것입니다.

위를 보십시오. 순수하고 거룩하시며 힘없이 정의롭고 완전하신 하늘 아버지를 보십니까? 여러분도 언젠가 그분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쉽게 그분의 형상처럼 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많은 풀무질, 더 많은 연단, 수많은 고통을 부수어 내며, 더 많은 고난의 바퀴에 밟혀야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처럼 순결해지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자신 가운데 있는 타락함을 모두 없애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되는 것이 그렇게 빨리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눈을 들어 보십시오. 설화 석고보다도 더 순수하며 백색 대리석보다도 더 깨끗한 밝은 빛의 흰옷을 입은 영혼들을 알아보시겠습니까? 영광 가운데 있는 그들을 주목하시면서, 언제 영광을 얻었는지 물어보십시오. 몇몇은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보혈의 바다를 건너왔노라고. 불에 그을린 그들의 눈썹을 보십시오. 그들 중 일부는 손들을 들며 이렇게 말해 줄 것입니다. 우리 중에 불에 태움을 받은 이들도 있고, 칼에 죽임을 당한 이들도 있으며, 짐승들에게 찢긴 이들도 있으며, 가난에 찌들었고, 고난을 받았으며, 박해 속에 있었습니다. 오, 고귀한 순교자들이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군대여. 여러분이 보혈의 바다를 건너야만 하는데, 제가 모피와 털을 입고 천국에 가는 것을 바랄까요? 여러분이 고통을 견디셨는데 제가 이 세상의 것들로 훼방받을까요? 여러분이 싸워 이기셨는데, 제가 싸움 없이 누릴 수밖에 없을까요? 오, 아니지요. 주의 도우심으로 저도 여러분 받으셨던 고통을 그대로 받을 것입니다. 꼭 그럴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수많은 환난을 겪으면서 천국에 들어가셨지만, 저도 그럴 것입니다. 

다음으로 크리스천 여러분 눈을 아래로 내려보십시오. 여러분의 발아래에 있는 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거기에는 지옥과 여러분을 대적하는 사자들이 있습니다. 한때 여러분은 사탄의 종이 었고 충실한 그 신하였습니다. 과연 사탄은 지금의 여러분을 좋아할까요? 여러분이 자신이 속한 나라를 바꾸었는데 말입니다. 예전에는 악마의 종이 었지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었으니 악마가 여러분을 좋아하겠습니까? 저는 결코 아니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거듭나는 순간에 사탄을 보았었다면 아마도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온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리는 순간, 사탄은 박쥐 같은 날개를 펴고 지옥으로 내려가서 그의 무리를 모으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지옥의 자식들이여, 진정한 어둠의 상속자들이여! 너희는 한때 빛 가운데 있었지만, 나와 함께 이곳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오늘 나의 종 하나가 나를 버렸다. 나의 가족 중 하나를 잃었다. 만군의 하나님 편으로 가버렸다. 오 나의 동료들이여, 어둠의 조력자들이여, 그에게 마음껏 돌을 던져라. 너희 들의 모든 욕과 분노를 그에게 쏟아라. 그를 괴롭히고, 지옥의 개가 그를 향해 짓게 하고, 악마들이 그를 둘러싸게 해라. 그가 쉬지 못하게 하고, 죽을 때까지 괴롭혀라. 타락과 불타는 호수의 냄새를 끊임없이 일으켜라. 배신자인 그를 핍박하고 그가 평화를 누리지 못하게 하라. 그 사람을 여기에 꼼짝 못 하도록 묶어서 고문하고 괴롭혔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므로 그가 죽는 날까지 너희들이 할 수 있는 한 그에게 울부짖어라. 그 비열한 놈이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으므로 그놈이 강을 건널 때까지 계속 괴롭히고, 슬프게 만들고, 핍박해라." 여러분이 주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바로 그날, 지옥에서 벌어질 수도 있는 장면입니다. 사탄이 여러분이 지금 보다 더 좋아할까요? 아! 결코 아니지요. "베드로전서 5:8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사탄은 늘 여러분을 대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이여 여러분의 아래를 보시고 고난이 올 것을 생각하십시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여러분의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졸지 마시고 눈을 열어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은 친구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대적의 나라에 계십니다. 이 세상은 악합니다. 제 생각에 사람들의 절반은 종교가 없다고 하고 신앙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종종 그렇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17:5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예레미야 17:7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시편 62:9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사람들의 소리는 간직할 것이 못되고 높은 이들의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신뢰할 것도 아니고 의지할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좋고 위대하다고 하는 것들을 자신의 발아래 두고 걷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가끔은 강하고 용감한 선한 양심을 볼 것입니다. 가끔은 성실하고 정직한 참 영혼을 볼 것입니다. 가끔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도 볼 것입니다. 그렇지만, 빛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이 한 명의 진실한 사람을 만난다면, 또한 스무 명의 위선자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람을 만나는 곳에서 여러분을 지옥으로 떠미는 사람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친구들의 땅이 아니라 대적의 땅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선하다고 결코 믿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붙잡다가 손을 뎁니다. 세상은 방울뱀의 둥지와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자는 방울뱀의 화려한 색상을 안전한 것이라 생각하고 손을 넣다가 해를 입습니다. 

오 크리스천들이여! 세상은 여러분의 친구가 아닙니다. 만약 세상이 여러분의 친구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친구가 아닙니다. 세상이 친구라면 하나님의 적이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는 사람이라면 종종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대적의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예상하십시오. "시편 41: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하는 것을 예상하십시오.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계가 소원해질 것을 예상하십시오. 여러분은 대적의 땅에 살고 있으므로 어디를 가든 대적과 만날 수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잠에 들 때도 전쟁터에서 자고 있음을 생각하시고, 걸을 때도 곳곳에 대적들이 매복해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오! 조심하십시오, 정말, 조심하십시오. 이 세상은 여러분이 눈을 감고 있어도 되는 좋은 세상이 아닙니다. 망루에 오른다면 주위를 둘러보시고 고난이 온다는 것을 꼭 예상하십시오. 

그다음에는 여러분의 마음속을 보십시오. 그 안에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기에 충분한 작은 세계가 있습니다. 한 로마인은 모든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마음의 창을 가지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런 창을 말입니다. 저는 제가 그런 창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런 창이 있다면 저는 앱슬리 하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창을 모두 닫을 것입니다. 모든 창이 잘 닫혀 있는지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런 창이 있다면 꽉 닫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잠시 여러분 마음에 있는 그 창을 살짝 열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는 죄가 있습니다. 원죄와 타락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아가 여전히 그 안에 있습니다. 아! 만약 여러분을 유혹하는 악마가 없다면 여러분이 자신을 유혹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싸우는 대적이 없다면, 여러분 자신이 최악의 대적이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부패한 세상이 없어도 여러분 자신만으로도 충분히 나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여 여러분 마음속을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 암덩어리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불꽃같은 유혹에도 터질 수 있는 폭탄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뙤리를 틀고 있는 뱀처럼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악한 것이 언제든지 여러분을 고난, 고통, 비참함 속으로 끌고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이여 여러분의 마음을 잘 살피십시오. 슬픔이나 고난, 걱정이 오면 마음을 살피면서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를 끌어가려는 악한 불신의 마음을 안다. 참으로 나는 이것을 잘 견뎌낼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아시겠습니까? 고난에서 벗어날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난에서 벗어날 기회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고통과 고난을 견뎌야만 합니다. 기쁨으로 그것들을 견디어 냅시다. 우리 중 몇몇은 하나님 군대의 지휘관이고 우리는 모든 대적들의 과녁일 것입니다. 담대하게 앞으로 나갑시다. 우리는 모든 총탄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나님의 군병은 전투에서 한 사람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들을 지켜주십니다. 빠르게 화살이 날아와도 믿음의 방패가 그것들을 모두 막아버립니다. 그리하여 대적들이 가장 화가 나있다면, 그 순간 하나님께서도 가장 기뻐하십니다. 세상은 여전할 것이고, 악마가 모욕할 수도 있습니다. 육체적인 것이 다시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첫 번째는 고난을 예상하라는 것입니다. 

 

II. 두 번째는 그 고난에 주목해야 할 차이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고통 그 자체는 신앙의 증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서도 시험과 고난을 받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가난한 이들이 와서 한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압니다. 저는 빚지고 가난하며 고난 가운데 있기 때문이죠." 정말 그럴까요? 저는 비슷한 상태에 있는 수많은 악당들을 압니다. 그리고, 가난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저는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은 하나님 가족 만의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경험만이 크리스천의 소망의 배경이라면 저는 사실상 아주 가난한 배경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들은 과연 그리스도의 고난입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닙니까? 사람이 정직하지 않으면 감옥으로 갑니다. 사람이 비겁하면 사람들은 그에 대해 수군거립니다. 신뢰가 없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은 그를 피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은 자신이 박해를 받았다고 합니다. 참! 박해라니요!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 사람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행한 반응을 보일 때면 그런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피하니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이야!"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마땅히 해야 할 바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의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고난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고난이라면 여러분에게 위안은 없을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일 때만 우리는 참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를 비롯해서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러 구절에서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종종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모든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골로새서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느 정도의 고난을 감당하셨으므로, 이제 그 몸도 어느 정도의 짐을 져야 합니다. 우리의 고난은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고난이고, 그리스도의 몸의 고난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의 고난입니다. 만약 사람이 머리가 하늘 끝에 닿고 발이 바다 밑바닥에 미칠 만큼 키가 크다면, 한 몸으로서 발의 고통을 머리도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이 하늘에 계시고 저는 땅이 있을 지라도, 내 슬픔은 그리스도의 슬픔이고, 제가 받는 시험은 그리스도의 시험이며, 제가 고난 속에 있으면 그도 아파하신다는 것입니다.

"너의 한숨과 신음이 내 마음 깊이 들어온다
내가, 나의 몸과 뼈가 너와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이지
네 모든 고난 속에서, 고통을 느끼겠지만
그 모든 것은 필요한 것이란다. 그 어떤 것도 헛된 것이 아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시험들은 갈보리와 같은 그리스도의 고난만큼이나 큰 고통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여러분은 "우리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인지 알고 싶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리를 위하여 참혹함을 견디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만약 여러분 자신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여러분의 죄로 인한 징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견디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어떤 분들은 "요즘에 무슨 박해가 있습니까? 지금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받아야만 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오호! 그렇습니다. 저는 이 아침 그 사실을 밝힐 수도 있습니다. 과장하지 않더라도 지금은 마리아의 때만큼이나 심한 박해가 있습니다. 우리의 대적들만 그들 나름의 힘과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는 저같이 하찮고 시끄러운 젊은이의 이야기를 와서 듣겠다고 선택한 단순한 사실 만으로도 세상의 낙오자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 오시는 많은 분들은 단순히 저에게 진리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으로 비참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분들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분들은 여기에 와서 말씀을 들으십니다. 확신하건대 제 앞에 있는 많은 분들은 제가 그분들의 이야기를 말하면 눈물을 떨구실 수밖에 없는 분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 사정을 개인적으로 전해주신 그분들은 그분들이 누구를 기쁘시게 하는지를 듣고자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은 그분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그러한 때가 아닙니까? 제가 다른 사역자들이 하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고 제가 원하는 대로 설교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까? 제게 그런 권리가 없더라도 저는 제 설교를 할 것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어떤 분들은 영주나 통치자에게 제가 진짜 성직자인지 여부를 확인받지 않으면 저의 설교를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자유! 자유! 사람들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이야기는 전체적이지는 않지만 영국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그래요, 제 영은 유익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뜻하는 바를 말하게 하십시오. 저는 진리와 제 영을 새롭게 하는 말씀을 듣는 그 장소를 굳건하게 붙잡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계속해서 전진해 갑시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통을 받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단순히 뭔가 이득을 취하기 때문에 이곳에 왔었다면 여러분의 고통은 여러분 자신의 것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영혼의 유익 외에는 취할 것이 없으므로 하시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무슨 말을 하던 여러분의 박해는 여러분에게 영광 가운데서 더 밝은 면류관을 얻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아! 이것은 우리를 고귀하게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를 자랑스럽고 행복하게 만듭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웰링턴 공작 곁에서 함께 싸웠던 한 노병의 영예와 같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이럴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훌륭한 공작님 아래서 싸우고 있다. 그가 승리하면 그 영예의 일부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은 예수님 곁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모든 공격은 그리스도에 대한 공격이며, 모든 비방은 그리스도에 대한 비방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승리 또한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승리할 것입니다! 

수많은 전투에 승리를 거두었던 한 장군의 이야기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그가 군대를 이끌고 한 계곡으로 들어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군대는 수많은 적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아침에 전투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의 사기가 꺾였는지 아닌지, 마음의 상태는 어떤지 알아보려 병사들의 텐트를 돌아다녔습니다. 한 텐트에 이르러 한 병사가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 장군님은 아주 용감한 분이지만, 이번에는 잘못된 결정을 했어. 그는 우리를 사지로 끌고 왔어. 적의 기병과 보병이 너무 많아" 자신의 시각에서 모든 군대를 파악하고 너무 많다는 결론만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장군은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 그 텐트를 조심스럽게 열면서 말했습니다. "자네는 나를 몇 명으로 계산했는가? 자네가 기병과 보병의 수를 가늠한 모양인데,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던 자네의 강력한 대장인 나는 대체 몇 명으로 계산했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여러분, 여러분은 대체 그리스도를 몇 명으로 계산하십니까? 주님을 무시하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그분을 한 명의 병사로만 생각하셨습니까? 그분은 한병의 병사도 천명도 아닌 "만군의 주" 이시며, 그보다 더하신 분입니다. 오! 그분은 전부이십니다. 그분을 높이 받드시고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도우심과 능력을 세어보십시오. 그분 안에서 승리는 분명하며 확실합니다. 

 

III. 세 번째는 비례하는 경험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그리스도의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 여기에 축복의 비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균형을 유지하십니다. 주께서 그의 백성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는 그 안에 그만큼의 위로도 같이 두십니다. 고난의 분량이 거의 없다면 거의 같은 수준의 위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양이 크다면 그만큼 큰 위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그리스도의 위로도 우리에게 넘칠 것입니다. 이것은 순수한 경험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런 것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분들은 크리스천이 아니거나, 거듭나지 않았거나, 믿음이 없으시거나, 회심하여 삶이 바뀌지 않으신 분들이므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위안의 놀라운 비례를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오! 검은 먹구름이 몰려올수록 우리 안에 있는 빛은 더욱 밝아진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지요! 밤이 깊어지고 폭풍이 몰려올 때면 천국 선장님은 항상 그의 선원들과 더욱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가장 깊은 낙담 속에 있을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위로로 가장 높이 들려진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이제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말씀드릴까 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고난은 위로를 위한 더 많은 공간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큰 고난만큼 사람으로 하여금 큰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제가 항상 확인하는 것은 겨자씨 한 알 같은, 작고 보잘것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만큼 마음을 쓴 일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안타까움이 없고 다른 사람들의 슬픔에 같이 울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걱정 없이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큰 마음은 큰 고난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고난의 삽은 위로의 공간을 더 깊게 파고, 그만큼 위로의 공간이 더 만들어집니다. 주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면, 이것 저것으로 채워져 있는 우리의 마음을 보실 것입니다. 주님은 그 마음의 안락함으로 부수기 시작하시고 깨끗하게 비우십니다. 그러면 그곳에는 은혜를 위한 더 넓은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겸손할수록 항상 더 많은 위안을 얻을 것입니다. 어느 날 한 농부와 걷던 것이 생각납니다. 농부지만 학식이 깊으신 분으로 정말 많은 대학 교수들보다 좋은 설교자를 만들 수 있는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형제님, 이건 확실합니다. 형제님이나 제가 땅에서 1인치만큼 올라가면, 우리는 그만큼 너무 높이 올라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낮게 엎드릴수록 우리는 땅에 가까우므로 우리의 고난이 클수록 우리를 더 겸손하게 하고 위로를 받기에 더 알맞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가 위로를 받기에 가장 적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위로를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난에 비례하여 위로가 커지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은 우리의 은혜를 실제화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실제화는 우리를 더 행복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이 가장 많이 떨어진 곳의 풀이 가장 푸른 법입니다. 제 생각에 "에메랄드 섬"을 만든 것은 아일랜드의 물안개이지 않나 싶습니다. 커다란 고난과 슬픔의 물안개가 있는 곳에서는 항상 에메랄드 빛의 푸르른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위로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아름답고 싱그러운 초목으로 가득 찬 그런 곳입니다. 오 크리스천들이여 이렇게 말하고 있지 마십시오 "제비는 어디로 갔는가? 가버렸군. 모두 죽었어!" 제비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랏빛 바다를 스치듯 날아서 먼 땅으로 갔을 뿐이고 머지않아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꽃들이 죽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겨울이 꽃들을 죽였고, 꽃들은 떠나 버렸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겨울은 눈으로 꽃들을 덮고 있지만, 머지않아 꽃들은 그들의 머리를 삐죽 내밀고 생생하게 살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구름이 해를 가렸다고 해서 해가 꺼져버렸다고 하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해는 뒤에서 여름을 준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해가 돌아오면 구름으로 하여금 4월의 소나기로 내리게 하고, 아름다운 5월의 꽃들이 피도록 하는 근원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가리신다고 그가 여러분을 잊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여러분이 그를 더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 잠시 지체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리고 그가 오시면 여러분은 주안에서 즐거워할 것이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기다림은 우리의 은혜를 실제화합니다. 기다림은 우리의 믿음을 발휘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소망 안에서 기다리십시오. 약속은 지체될지언정 너무 늦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종종 우리의 고난 가운데서 가장 행복한 다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교제를 하기 때문입니다. 제 진심과 실제 경험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란 가운데 있을 때만큼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운 교제를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창고가 가득히 차면 사람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지갑이 금으로 넘쳐나면 우리는 그렇게 많은 기도 없이도 어떻게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보호막이 걷히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집에서 우상들을 걷어 내면 여호와께로 가서 그를 경배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여러분이 마땅히 해야 할 기도의 절반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회초리가 따를 것이고, 회초리를 맞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버지께로 달려갈 것입니다. 날씨 좋은 날, 한 아이가 아버지 앞에서 씩씩하게 걸어갑니다. 그러다 길에서 사자를 만나면 그 아이는 돌아와 아버지의 손을 붙잡습니다. 모든 것이 좋고 문제가 없을 때, 아이는 아버지보다 몇백 미터 앞서 달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자를 만나면 "아버지! 아버지!" 하며 최대한 가까이 아버지에게 달려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리스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는 하나님을 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뚱뚱해지고 하나님을 걷어 차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기대와 즐거움들이 날아가고, 아이를 관에 누이며, 곡식들이 없어지고, 마구간에서 가축들이 달아나 버리며, 남편의 넓은 어깨를 무덤에 놓고 아이들이 아빠 없는 신세가 되면 그제야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오! 저를 벗기소서. 제게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저를 가난하게 거지로, 무일푼으로 만드소서. 저 수조를 부수고, 희망을 조각내소서, 별들도 달도 가리고, 태양도 끄소서, 그리하여 친구도 아무 도움도 없이 홀로 있게 하소서 "시편 130:1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하게 하소서. 산 밑바닥에서 외치는 소리만큼 좋은 외침은 없습니다. 깊은 고난과 시련을 통한 영혼의 깊은 곳에서 기도만큼 진정한 기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시련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행복하게 되는 길이고 하나님과 가까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넘치면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위로가 넘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무게 추라고 부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큰 돛을 달고 바람을 맞는 배는 바닥짐이 필요합니다. 고난은 믿는 자에게 바닥짐과 같습니다. 눈은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배 바닥에 차있는 물을 발견해서 퍼올리는 영혼의 펌프입니다. 고난이 무게 추라면 제가 행복한 비밀을 하나 말씀드릴까 합니다. 무게추가 여러분을 끌어올리게 하는 그러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 제가 무게추에 묶여 있다면 무게추는 제가 꼼짝 못 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르래와 몇 가지 도구가 있다면 무게 추는 저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저를 천국으로 끌어올리는 그러한 것이 있습니다. 한 신사가 아름다운 말에 말굽을 채워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왜 저렇게 고귀한 동물을 막고 있는 거냐?" 그러자 그 친구는 "이보게, 저 말은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 있네, 그러니 나는 말을 잃기보다는 말이 도망가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막을 걸세."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막으시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백성을 잃으시기보다는 차라리 막으실 것입니다. 그가 그의 백성들을 막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멀리 가버릴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길을 잃지 않도록 묶을 밧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의 백성들을 고난으로 묶어 그와 가까이 있게 하시고, 보호하시며 그의 임재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우리의 고난이 넘치는 만큼 우리에게 또한 위로가 넘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IV. 이제 마지막 주제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조금 더 말씀을 드릴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 주제는 영광을 얻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깊은 고통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들을 감옥 속에 집어넣어도 그들은 여전히 찬양을 멈추지 않을 것이란 것도 사실입니다. 마치 많은 새처럼 새장 속에서도 찬양할 것입니다. 파도가 그들을 덮쳐도 그들의 영혼은 결코 가라앉지 않을 것이란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은 부력이 있어서 항상 머리가 가라앉지 않게 하고 "주께서 여전히 나와 함께하신다"며 암흑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음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에게 이 영광을 올릴까요? 누구에게 영광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제가 크리스천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 항상 위로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제게 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제가 방에 앓아누워 있을 때는 그리스도께서 계단을 올라오시어 제 침대 곁에 앉으셔서 위로의 말씀을 건네주십니다. 제가 죽어 갈 때, 요단강의 아주 차가운 물이 제 발을 적시고 피가 멈추고 굳어가는 것을 느끼는 죽을 수밖에 없는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팔로 저를 감싸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두려워 마라. 죽는 것은 축복이 될 것이다. 죽음의 강은 그 원천을 천국에 두고 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므로 쓰지 않고 꿀처럼 달다." 물을 헤치며 걸으니 물결이 제 주위로 몰려들고 가슴과 몸이 빠져드는 것을 느낍니다. 다시 같은 음성이 들립니다. "두려워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놀라지 마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이제 저는 그 누구도 돌아갈 수 없는 미지의 그 나라 경계에 와 있습니다. 그 미지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서 있습니다. 그때 다시 부드러운 음성이 드립니다. "나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할 것이며, 네가 음부에 자리를 펴더라도 너와 함께할 것이다" 저는 계속 갑니다. 죽어도 좋습니다. 예수께서 저를 응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저의 위로이시며 저의 소망이십니다. 

아! 언제나 멜로디를 줄 수 있는 가장 달콤한 음표이며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이름인 예수를 모르는 이들이여! 아! 예수라는 단어에 "나는 너를 평안케 한다"라는 의미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 단어에 포함된 귀중한 운율에 빠져본 적도 없는 이들이여! 그대들은 삶의 참 기쁨과 안락함을 잃고 비참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실 것이며 항상 그와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두 마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선 고난을 예상하고 그것들을 미리 바라보며 아주 슬퍼하시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리에 도착하기 전에 결코 그것을 건너지 마라"는 일반 사람들의 충고를 따르십시오. 여러분의 고난을 원래 있던 곳보다 더 가까이 가져가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 고난은 곧 여러분에게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충고를 잊지 마세요. 많은 분들이 시련이 다가오기 전에 그것들로 인해 조마조마해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렇게 하면 무엇이 좋을까요? 고난을 두려워하는 분들은 왜 그래야만 할까요? 시련은 결코 여러분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시련이 온다면, 그것을 이길 능력도 함께 옵니다. 그러므로 일어나십시오. 왜 짐작 때문에 신음하며 주저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까? 

"신앙이 존재하는 이유가 
우리의 즐거움을 줄이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나오십시오!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왜 앉아서 얼어 죽으려고 하십니까? 고난이 오면 용감하게 맞서 싸우십시오. 강물에 뛰어들어 미리 수영을 준비한 사람처럼 헤엄쳐 건너시면 됩니다. 그렇지만 오! 그 고난이 아직 오지 않았다면 그 전에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지금 고난 속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형제자매님들은 고난 속에 있습니다. 고통의 물결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그 고난이 이상한 것이 아닌 거 맞으십니까? 이전에도 많이 겪으셨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아, 이번에는 제가 겪어본 것 중에 최악입니다. 오늘 아침 제 목에 맷돌을 하나 걸치고 이곳에 온 것 같습니다. 마음에는 납덩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비참하고 불행하며 참으로 낙담한 상태입니다" 그렇군요, 형제님. 그러나, 형제님의 고난이 넘치는 만큼 위로도 넘칠 것입니다. 형제님 형제님의 하프를 나무에 걸어 놓으셨습니까? 그것을 완전히 부수지 않으신 것은 정말 다행입니다. 하프를 부수어 버리는 것보다는 나무에 걸어 놓는 게 낫습니다. 결코 부수지 마십시오. 겪으시는 고난에 괴로워하기보다는 그것을 즐기십시오. 그러시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게 되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게 될 것입니다. 깊은 고난 중에서도 찬양을 올리신다면 불신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행복할 수 있지! 결국 신앙 속에 뭔가가 있음이 틀림없어" 여러분은 불신자들을 예수께로 데려올 것입니다. 

거의 절망에 빠져 있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아침 할 수만 있다면 그분들의 손을 잡아 드리고 싶습니다. 설교자는 그리스 신화의 머리가 50개이고 팔이 100개인 브리아레오스처럼 되어 각 청중에게 일대일로 손을 내밀어 이야기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는 거의 모든 소망이 사라져 버려 절망 가운데 계신 분이 계십니다. 형제여 무엇을 할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형제님은 배에서 떨어졌고, 바다 한가운데서 파도에 휩싸여 있습니다. 소망은 거의 없어 보이고,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는 심정으로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이제 형제님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무언가를 한다? 고난의 바다에 누워, 떠있으면 안 됩니까? 가만히 계세요.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결코 형제님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마세요. 발버둥 칠수록 점점 더 깊이 빠져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누워 계시면, 보세요, 구명보트가 옵니다. 그리스도께서 형제님을 돕기 위해 오고 계십니다. 주님은 곧 형제님을 모든 문제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 중에는 이런 설교에 전혀 흥미가 없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제 설교가 제말을 듣는 모든 이에게 해당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서로 다른 성품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보면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제 시각에 그리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모든 사람은 같습니다. 귀족적인 사람, 평범한 사람의 구분을 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몸과 피로 만들어졌고, 자기로 만든 신사나 토기로 만든 가난 쟁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단 한 가지 구분이 있다면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거나 아니면 사탄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거듭났거나 아니면 불법과 죄 가운데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귀에 이 질문이 들리게 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나는 이디에 있는가? 저기 불타는 검을 들고 있는 어둠의 폭군이 나의 왕인가? 아니면 나는 여호와 예수를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구주로 삼고 있는가?" 저는 여러분에게 대답을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것에 대한 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여러분 스스로 대답하세요.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단지 이 질문을 하시도록 제안하는 것뿐입니다. 주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만져 주셔서 주의 손길이 여러분의 가슴에 꽂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예수는 나의 구주! 나는 이제 예비되었네,
가장 힘들다 생각한 것을 만남으로;
그래, 고난의 바람아 불어라,
그러면 안락함은 눈처럼 녹아내리고,
상한 나무도 망가진 곡식도 없으며,
내 영원한 소망을 방해할 수도 있다.
피조물은 변하나 주님은 동일하셔
그렇다면 그의 이름으로 승리를 거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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