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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특별한 잠, The Peculiar Sleep of the Beloved - 스펄전 목사 설교 번역 12
야라바 2020. 11. 12. 10:06■ 설교 일자 : 1855년 3월 4일 주일 아침
■ 설교 장소 : 영국 런던 스트랜드(Strand) 북쪽에 있는 엑서터 홀(Exeter Hall)
■ 설교자 : THE REV. C. H. SPURGEON
■ 설교 제목 :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특별한 잠, The Peculiar Sleep of the Beloved
■ 본문 참조 사이트 : https://www.spurgeongems.org
■ 설교 내용 :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편 127:2"
우리 몸의 잠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호메로스는 구름에서 내려와 트로이 전사들을 잠들게 하는 것으로 묘사했고, 베르길리우스는 뱃머리에 있다가 잠에 빠져 떨어지는 팔리누루스를 노래했습니다. 잠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머리를 베개에 누이면 몸이 평화로운 상태가 되므로 우리는 잠을 자연스럽고 그리고 필연적으로 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잠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손가락을 사람의 눈꺼풀에 대지 않으신다면, 주께서 생각을 고요하게 달래는 부드럽고 온화한 기운을 보내셔서 우리가 잠이라 부르는 행복한 상태로 만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사람은 결코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사람을 거의 죽은 것같이 만들 수 있는 수면제나 마취제와 같은 것들도 있고 이것도 잠이라 부리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건강한 몸의 수면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잠을 주시고 매일 밤 우리를 위해서 요람을 흔드십니다. 어둠의 커튼을 치십니다. 태양으로 하여금 강렬하게 타는 눈을 닫게 하시고 오셔서 속삭이십니다 "잘 자라, 잘 자라 우리 아가. 내가 너에게 잠을 주노라"
여러분은 가끔씩 다리오 왕이 "그 앞에 오락을 그치고 잠자기를 마다하니라" 한것처럼 침대에 누워 잠에 들려고 노력한 적이 없으십니까? 아마도 그래 보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잘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건강한 수면을 갖는 것은 여러분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어떤 것에 마음을 집중시키면 잠에 들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됩니다. 마치 온 세상이 내 앞에서 요동치는 것처럼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돌아다닙니다. 온갖 것들이 눈앞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눈을 감아도 여전히 보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잠을 들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귀와 머리와 뇌에 남아 있습니다. 선원의 눈을 아찔한 돛대에 봉인하는 것처럼 만드시는 분, 군주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모든 기구와 도움이 될만한 어떤 수단으로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참 쉼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망각의 상태에 잠기게 하고 우리를 잠들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몸을 새롭게 하고, 내일의 수고를 위하여 힘을 모으며 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잠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해야만 하는지요! 잠은 제가 아는 한 최고의 의사입니다. 잠은 지구 상의 가장 저명한 의사보다도 지친 몸의 고통들을 더 잘 치유합니다. 잠은 온갖 이름을 가진 수많은 약들 중에 최고의 치료약입니다. 잠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잠을 모든 이가 똑같이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나님은 잠을 부자들의 몫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고관대작들이나 부자들이 단순히 그들의 사치로 간직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만 잠을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주셨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일하는 사람의 잠은 그가 적게 먹든, 많이 먹든 달콤하다는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수고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재웁니다. 일하지 않으며 사치 속에 사는 유약한 이들은 부드러운 침대 속에서 이리저리 뒤척여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지만, 자신의 몸으로 피곤하여 지칠 때까지 힘들게 일한 사람들은 딱딱한 바닥에 몸을 던져 잠에 들어도 아침이면 몸을 회복시켜 주심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 드립니다. 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밤에 잠이 들도록 해주신 것에 대하여 얼마나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는지 모르실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내고 있다면, 잠의 축복을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수주 동안 침대에서 뒤척이느라 지쳐있다면, 잠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잠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가장 귀중한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잠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감사해야 할 만큼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스스로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어떤 이익이나 야망을 위해서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중에도 현재 그와 같은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식을 쌓기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두꺼운 책을 열기도 했습니다. 등잔불이 다 타버리고 태양이 뜰 때까지 밤부터 그렇게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눈이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은 요동치면서 말입니다. 기진맥진해버립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그렇게 해서 눈물의 빵을 먹게 됩니다. 여러분 중에 일하고 계신 많은 분들이 이런 방식으로 수고하고 계십니다. 저희는 이런 문제로 여러분을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는 것을 금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시 127: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이 아침 여러분에 드리고 싶은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 잠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특별하게 주시는 잠입니다. 주께서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성경에서는 때때로 잠을 육체적이거나 세상적인 사람을 표현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지혜롭지 못한 아들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렇게 육체적 안락함과 게으름을 쫓는 잠을 잡니다. 그리고 여름이 가고 추수 때가 지나면 그들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잠은 종종 게으름, 죽음, 무관심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모든 경건치 않은 사람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11 자다가 깰 때가 되었으니" "데살로니가전서 5:6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나태함에 취해 게으름뱅이의 잠을 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놀라서 깰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들의 좋았던 시간이 버려졌음을, 인생의 황금 모래들이 모래시계에서 의미 없이 떨어졌음을, 그리고, 그들이 발을 들여놓은 곳은 어떤 용서도, 희망도, 피난처도 구원도 없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잠을 육체적인 안전을 나타내는 모습으로 많이들 사용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 시니이다" 했지만, 그와 다르게 육신의 안전 속에서 잠든 사울을 보십시오. 아브넬과 모든 군대가 사울 주위에 누워 있었지만, 아브넬도 사울도 잠에 빠졌습니다. 그렇지만, 아비새가 사울의 머리맡에 있었고, 창을 들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 26:8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사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여전히 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많은 분들이 이런 모습처럼 여러분의 영혼이 위험한 상태로 잠을 자고 있습니다. 사탄이 서 있고, 율법은 준비되어 있으며, 엄청난 보응이 기다리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 사람을 칠까요? 제가 한 번만 쳐도, 이 사람은 결코 깨지 못할 것입니다" 이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멈추어라, 보응을 멈추어라". 창을 막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멈추어라, 그가 죄의 긴 잠에서 깰 수도 있으니 몇 년간 더 시간을 주어라." 믿지 않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시스라처럼 죽음의 장막에서 자고 있는 것입니다. 화려한 접시에 있는 버터와 꿀을 먹었을지는 몰라도 여러분은 지옥의 문지방에서 자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대적은 망치를 들고 말뚝으로 여러분을 땅에 박으려 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영원한 고통의 죽음 속에서 누워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다음에 성경에서는 삼손이 힘의 비밀을 잃어버렸을 때와 같은 욕망의 잠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죄에 푹 빠져 잠을 자고, 깨어나면 벗겨지고, 잃어버리고, 망가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러한 잠입니다. 또, "마태복음 25: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 했던 처녀들과 같이 태만의 잠도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덮었던 슬픔의 잠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잠들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한 본성과 연관된 일입니다. 이런 잠들이 우리에게 오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조상의 자손이기 때문에 이런 잠들이 우리를 엄습하는 것입니다. 이런 잠들은 하나님의 축복도 아니고, 하나님은 이런 잠들을 그의 사랑하는 자들에 주시지도 않습니다. 저희는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러한 잠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I. 첫째로 지금은 주시지 않지만 가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셨던 기적적인 잠이 있습니다.
그런 기적적인 잠, 또는 오히려 가수면 상태라 할수 있는 것을 알아보겠습니다. 아담은 홀로 슬픔 가운데 잠이 들었지만, 잠에서 깬 이후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셨던 최고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잠을 아브람도 가졌었습니다. 그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입니다. 그가 누웠을 때 연기 나는 용광로와 불타는 등불을 보았고 그에게 전해지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창세기 15:1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런 신성한 잠은 야곱에게도 있었습니다. 돌을 베개 삼고, 울타리를 커튼으로 하늘을 지붕으로 들판의 짐승들을 종으로 삼아 누워 잠에 들었던 때입니다. 꿈속에서 하늘까지 닿은 사다리를 보았고 그 사다리 위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잠을 요셉도 가졌었는데 꿈속에서 다른 짚단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고 태양과 달과 일곱 별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다윗도 종종 그런 잠을 잤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처럼 그에게는 달콤한 잠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도 그런 잠을 가졌었습니다. "다니엘 10:9~11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 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내게 이르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그리고 이런 잠은 우리 주님의 부친의 꿈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밤의 환상 가운데서 천사가 그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마태복음 2:13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이런 잠들은 모두 기적과 같은 잠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잠의 마술봉으로 주의 종들을 치면 그들은 단순히 우리가 자는 것과 같은 잠이 아니라 놀라운 잠을 자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깊은 수면에 뛰어들어, 잠의 바다에 푹 빠져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미지의 존재와 이야기를 나누며, 신비하고 놀라운 소리를 듣습니다. 깨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레미야 31:26 내가 깨어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 "시편 127: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잠들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주 놀라운 꿈을 꾸지만 대부분은 말도 안 되는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꿈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지금도 여전히 꿈과 환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를 주신다고 믿습니다. 저는 주께서 그러신다고 확신합니다. 그렇지만, 꿈속에서 받은 경고나 유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꿈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롤런드 힐이 이런저런 꿈을 꾸었다는 한 크리스천 여성에게 한말을 들어 보십시오. "사모님, 사모님이 잠자고 있을 때 했던 일들은 신경 쓰지 마시고, 사모님이 깨어 있을 때 하실 일들을 살펴보세요." 이것이 꿈에 대한 제 의견입니다. 단순히 자신이 꿈을 꾸어서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사람을 저는 결코 믿지 않습니다. 꿈꾸는 종교는 사람의 온 생애를 몽상가로 만들 것이고, 그들이 믿는 것이 그것들이 전부라면 그런 몽상가들은 결국 끔찍하게 깨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II. 두번째로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평온한 양심의 잠을 주십니다.
제 생각에 여러분 중에 많은 분들이 왕립 미술 협회의 전시회에 걸렸던 "아가일의 마지막 잠"이라는 작품을 보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처형되는 날 그 아침 아가일이 침대에 누워 잠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지요. 한 귀족이 죄책감을 가진 시선으로 그를 바로 보고 있고, 간수는 흔들리는 열쇠를 들고 서 있습니다. 자신의 머리가 잘려서 누군가 그의 머리를 들고 "반역자의 머리다"라고 외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가일은 평온하게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평온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평온하게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살펴 볼까요? 여러분은 헤롯이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고 그를 감시하도록 두 명의 경비병을 붙여 놓았던 성경의 한 장면을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경비병들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천사가 그를 쳐서 깨우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경비병들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던 베드로는 다음날이면 십자가에 처형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처지였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의 마음은 깨끗했고 괘념치 않았습니다. 죄악을 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옳은지, 사람을 섬기는 것이 옳은지 너희가 판단하라"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누워서 잠을 잤던 것입니다. 오! 여러분은 평온한 양심의 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모든 사람에게 공격당하는 중상모략의 대상이 된 적이 있으십니까?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술주정뱅이들의 가십거리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순수해서 그런 것들은 괘념치 않고 잠에 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리스도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을까 싶습니다. 베갯속에서 죄가 꾹꾹 찌를 텐데 말입니다. 죄는 침대의 칼이 되어 이리로 누워도 저리로 누워도 죄인을 꾹꾹 찌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평온한 양심은 영혼을 잠으로 채울 수 있는 감미로운 음악입니다. 쉬지 못하게 하는 마귀는 평온한 양심을 가진 사람의 침대로는 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나 자신, 그리고 너를 대하여
잠들기 전, 내게는 평화가 있을 거야"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십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분들에게 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의 택함 받음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 구주의 보혈에 의한 속량에 대한 신뢰가 없으신 분들, 성령의 부르심을 받은 적도 없고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도 없으셨던, 이런 잠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양심이 평온하다고 말하실 수도 있고, 잘못한 것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서 설명할 것도 거의 없다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죄를 지었고, 여러분의 선한 행위나 도덕이 여러분의 죄악을 속량 할 수 없음을 아실 것입니다. 죄를 지은 영혼, 단 한 번만이라도 죄를 지은 영혼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단 하나의 작은 결함이라도 있다면, 그 그림은 완벽한 작품이 될 수 없습니다. 단 한 가지의 죄라도 그것을 속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다면 여러분은 그것으로 인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잠을 모르시지만 크리스천은 구약에 나오는 속죄양의 머리에 자신의 모든 죄를 대신 지도록 했기 때문에 이 잠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크든 작든 그의 모든 죄를 위해 죽으셨고, 이제 하나님의 책에는 그의 죄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므로" 이제 여러분은 이 잠을 잘 수 있습니다.
III. 그리고, 크리스천이 즐기는 만족의 잠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면 천 파운드의 상금을 주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 그 상금을 받으러 온다면 너무나 쉽게 그의 불만족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소간 우리의 것에 불만족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인류의 대부분은 항상 이리저리 옮겨 다닙니다. 결코 정착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둥지를 짓기 위하여 나무에 불은 밝히지 않고 언제나 이 나무 저 나무로 날아다닙니다. 이 나무는 잎이 푸르지 않고, 저 나무는 높지가 않아서 싫습니다. 이 나무는 충분히 아름답지가 않고, 저 나무는 한 폭의 그림이 되기에는 모자랍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로운 둥지를 전혀 짓지 않고 늘 이리 저리로 날아다닙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의 둥지를 짓습니다. 루터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무에 있는 저 새처럼, 그는 오늘 밤에는 식사를 했지만, 내일 아침에 먹을 식사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에 앉아서 눈을 감고, 머리는 날개 속에 파묻으며 잠에 듭니다. 그리고 아침에 깨어나면 이렇게 노래를 합니다.
‘수고와 슬픔은 물러가고;
주님은 내일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네.’”
만족의 축복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적은지요! 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나는 다른 것을 원치 않아요, 이승에서는 원하는 것이 거의 없지요. 그래요 나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어요. 나는 만족하고 충분해요." 여러분은 방금 아름다운 찬양을 불렀지만 아마도 여러분 중의 많은 분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저는 모든 것을 놓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청이 있어요.
삶과 죽음 모두를 아우르는
당신의 특별한 사랑"
여러분은 이 땅에서 예수님을 제외한 그 어떠한 것도 원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실 수 있습니까? 완전히 만족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만족의 잠을 잤다는 의미인데 맞습니까? 아, 아닐 겁니다. 여러분은 수습생이라면 장인이 될 때까지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장인이라면 명인이 될 때까지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명인들은 자신의 일에서 손을 놓을 때를 바라고, 막상 일에서 손을 놓으면 자식들이 각자의 삶에서 잘 정착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항상 아직 닿지 못한 저 너머의 것을 찾습니다. 결코 닿지 않는 항구를 향하는 뱃사람이고, 결코 닿지 않는 과격을 향하는 화살입니다. 아! 크리스천에게는 잠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저는 공상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느라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구절을 만나고 깊이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제 공상은 꿈의 경계에 있었습니다. 저는 한 성에 있었는데, 거대한 성벽 주위로 깊은 해자가 흐르고 있었고, 경비병들이 밤낮으로 성벽 주위를 돌고 있었습니다. 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훌륭한 유서 깊은 요새였지만 저는 그곳에서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침대에 누워도 "전투 준비! 전투 준비!" 하는 트럼펫 소리에 눈을 거의 감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위험이 지나가면 다시 눕는 것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전투 준비! 전투 준비!" 하는 소리가 들리면 같은 행동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결코 휴식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갑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갑옷을 입은 채로 끊임없이 움직였는데, 시간마다 요새의 꼭대기로 올라갔고, 때마다 새로운 경보에 깨어야 했습니다. 적들은 어떤 때는 서쪽에서, 어떤 때는 동쪽에서 왔습니다. 성 깊은 곳에 보물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저는 그것을 지키는데 제 모든 주의를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빼앗길까 두려워했고, 무서워 떨고 있었습니다. 제가 몽상에서 깬 다음에 생각해 보니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하더라도 그런 성에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불만족의 성이었고, 사람이 결코 쉴 수 없는 야망의 성이었습니다. 항상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전투 준비!"가 울려 퍼지고 적들이 여기저기로 몰려오는 그러한 곳입니다. 성의 소중한 보물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므로 잠은 불만족의 성으로 들어가는 도개교를 결코 건너가지 않습니다.
또 다른 공상이 있었는데, 한 오두막이었습니다. 시인들이 아름답고 즐거운 곳이라 노래할만한 장소였지만 저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가슴에 있는 반짝이는 단 하나의 보석 외에는 세상에서 아무런 보석이 없었습니다. 저는 제 손을 가슴에 얹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 햇살이 비추일 때까지 깨지 않았습니다. 그 보석은 바로 평온한 양심과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저는 자족의 집에서 제가 가진 것에 만족하며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잘 수 있었습니다. 끝없는 욕심에 붙들려 있는 분들은 가십시오! 야망에 사로잡혀 있는 분들도 가십시오! 저는 당신들의 근심 어린 삶이 부럽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의 잠도 깨지고, 구두쇠들의 꿈은 항상 악합니다. 이익을 좇는 사람들의 잠은 결코 따뜻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만족의 잠을 주십니다.
IV.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에게 미래에 대한 영혼의 고요한 잠을 주십니다.
오 저 암담한 앞날이여! 참으로 암담하고, 암담하도다! 지금은 괜찮지만 아! 다음 불어올 바람은 모든 꽃들을 시들게 할 텐데 과연 나는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돈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잠언 23:5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아이에 붙들린 엄마라면 아이를 가슴에 꼭 안아야 할 것입니다. 죽음의 거친 손이 그 아이를 빼앗아 갈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명성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오! 야망에 붙들린 이들이여! 아주 가벼운 이야기 조차 여러분의 가슴 깊이 상하게 할 것이며 예전에 대중으로부터 높여진 만큼 떨어지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오 미래여! 크리스천이 아니라면 누구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한 행복한 잠을 주십니다.
"장차 내 분복은 무엇일까?
내 마음은 높고 낮음에 없네;
내 마음을 쉬게하는 단 한 가지,
내 주께서 정하신 것이 최고라네."
사는지 죽는지는 제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물의 찌끼"같은 사람이 될지 아니면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될지는 제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두에게 똑같은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여러분 중에 얼마나 많은 분이 자신에 대한 소원이 전혀 없는 그러한 행복한 지점에 도달했을까요? 한 가지 소원을 갖는다는 것은 달콤하기는 하지만 소원을 전혀 갖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복락을 누리고 장래에 그분을 뵈올 것을 바라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오 나의 영혼이여! 내게 그리스도가 없다면 과연 미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씁쓸하고 암담한 미래라면 과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 성령께서 여전히 용기와 힘과 능력을 주시겠습니까? 다음의 글과 같이 귀용 부인처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것입니다.
"내 사랑이 누구인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아
삶인지 아니면 죽음인지, 고통인지 아니면 안락일까;
영혼은 고통 가운데서 진짜 병을 알지 못하고
안락과 건강 가운데서 진짜 좋은 것을 보지 못하네.
간절히 바라는 단 한 가지의 좋은 것,
이기적인 마음을 벗어버리고 당신의 뜻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왕좌 보다는 오두막을 좋아하는 것,
그리고 당신이 기뻐하신다면 편안함보다는 슬픔을 좋아하는 것.
당신의 명령은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라는 것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말고 세상에 대해 죽으라는 것.
무뢰한 아래서도 흔들림 없이 견디어 내고
난파선에서 탈출하여 안전한 해안에 닿은 것처럼 기뻐하는 것."
그런 지점에 도달하는 것은 정말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아! 만약 여러분이 마음의 의지가 있다면 하나님께 그것을 뽑아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자기 사랑이 있으십니까? 성령님께 그것을 밝혀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의 의지가 항상 주님의 뜻에 맞게 행하게 되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행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두막에서 한 조각의 빵과 약간의 물 밖에 없었던 할머니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두 손을 들고 축복 기도를 올립니다. "아! 저희에게는 이것이 전부이고 그리스도뿐입니다" "저희의 받을 자격에 비하면 이것이 전부입니다" 어떤 죽어가는 분에게 살고 싶은지 아니면 죽고 싶은지 묻는 그런 글을 읽은 적도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되든 아무런 바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뭔가를 바란다면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택하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뭘 택할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신 선택해달고 간청할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정말 행복한 상태 아닙니까? 완벽하게 되려면......
"그의 손에 온전히 나를 맡겨,
그의 뜻 외에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V. 다섯 번째로 안전한 잠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침대 주변으로 군인들이 호위한 상태로 잠을 잤습니다. 사실 안전하게 졸은 것이지요. 그러나,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은 성벽과 해자로 둘러쳐진 궁이 아니라 맨바닥에서 잠을 잤지만 솔로몬처럼 아주 안전하게 잠을 잤습니다. 이렇게 고백했지요 "시편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안전함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추측 건데 제 청중의 절반 정도는 그렇게 느끼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이런 노래를 외쳐 부른다고 가정해 보시지요
"나는 끝까지 견딜 것이고,
틀림없이 진심은 전해 질 거야;
더 행복하지만 더 안전하지는 않아,
영광의 영은 하늘에 있을 거야"
여러분은 너무 수준이 높은 거 아니야!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이야기가 여러분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이고 제게는 잘 맞는 이야기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하심을 따라 예정된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그의 아들의 핏값으로 사신바 되었다면 저는 분명히 구원받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존재를 잃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제가 버려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이 하신 일들은 헛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선한 일을 시작하신 그곳에서 그의 일을 완료하실 것입니다. 저는 제가 버림받거나 길을 잃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유일한 두려움은 처음에 길을 잘못 들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맞다면, 제가 진짜 하나님의 자녀라면 태양이 술 취한 사람처럼 광기에 휩싸여 우주를 헤집고 다닌다는 것을 믿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별들이 지금처럼 정해진 경로를 도는 것이 아니라 경로를 벗어나 박커스의 춤처럼 들쑥날쑥한 경로를 돈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순간의 거품이 파도 속에 가라앉는 것처럼, 이 거대한 우주가 하나님 안에서 가라앉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논리와 근거, 종교도 저로 하여금 저를 멸망에 빠뜨릴 수 있는 죄의 유혹으로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확신을 가지고 이 땅을 걸어갑니다.
한 아르메니아인과 잠시 논쟁을 나누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행복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천국에 있는 것처럼 안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일상의 걱정과 환란을 넘어서서 밤낮으로 행복의 노래를 불러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도우실 것이고요" "그가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것은 비밀입니다. 제가 죽었을 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아는 것은 제가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랑하시며 한번 사랑하신 이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존재인 만큼 확실합니다. 제가 천국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릴 수밖에 없음을 아는 것은 모든 짐을 가볍게 하고 높은 자리에 설 수도 있는 것에 비할바가 아닙니다. 참으로 안전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그리고, 형제자매 여러분 이 땅에서 큰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누릴 수 있는 안전한 잠이 있습니다. 에스겔서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에스겔 34:25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 찌라" "수풀 가운데"는 잠자기에는 조금 이상한 장소지요. 저너머 어딘가에 늑대가 있을 것입니다. 정글에는 호랑이가 하늘에는 독수리가 날아나니는 곳입니다. 숲 어두운 곳에서는 도둑떼가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신경 쓰지 마세요!"
"하나님으로 자신의 피난처를 삼은 사람은
가장 안전한 거할 곳을 찾을 것이다;
온종일 그의 그늘 아래서 걸을 것이며,
밤이면 그의 머리를 누이며 쉴 것이다"
저는 마르틴 루터를 존경하지만 가끔씩 그의 평정심에 대하여 놀라곤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비난할 때 그가 말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시편을 보면 "시편 46:1-2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좀 더 내려간다면 마르틴 루터의 위치로 내려갈 뿐만 아니라 중상모략의 대상과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제가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하는 고요한 시간을 누리는 동안에는 저의 영혼을 깨지도 못했고 앞으로 깨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를 비방하거나 비난하는 이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지칠 때까지 계속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것입니다. 제 모토는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이의 사랑도 구하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도 제 사역에 동참에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원할 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을 설교했습니다. 낙담하고 괴로워했지만 오! 무릎을 꿇고 내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방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했던지요!
"당신의 귀한 이름을 대한다면,
저는 부끄러움과 나무람을 만날 수밖에 없어요;
기꺼이 나무람을 듣고 부끄러움을 당할 것에요,
당신이 저를 기억하실 것이기 때문이죠."
VI.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마지막 잠은 행복한 마무리의 잠입니다. 저는 많은 하나님 종들의 무덤에 갔었었고, 이 땅의 몇몇 훌륭한 이들의 장례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관속에 잠들어 있는 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할 때면 저는 보통 이렇게 말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예수의 종들이여! 그들에게 제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 정말 행복한 잠입니다. 이 세상은 이리저리 혼란스럽지만, 그들은 무덤에서 편안히 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눈물도, 한숨도 없습니다. 불멸의 존재들이 부르는 노래와 어울릴 신음도 없습니다. 사실 저는 죽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여, 형제는 종종 이 세상의 싸움을 싸웠습니다. 나름의 문제와 시험들, 고난들도 겪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떠났습니다. 알지 못하는 세계로가 아니라 빛과 영광의 땅 너머로 갔습니다. 형제여! 잘 자시오! 몸은 자지만, 당신은 천국에 있으므로 영혼은 자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그대를 마지막 잠자리에 눕게 했습니다. 그 잠자리는 차가울 수 있지만 성화되고, 그 잠자리가 축축할 수 있지만, 안전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아침에 천사장이 그의 나팔을 불면 그대는 일어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내 형제여 언젠가 영광 가운데 부활할 것이므로 무덤에서 편안히 주무시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여러분 중 일부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실만한 이유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죽음은 슬픔의 시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전제라면 여러분은 "요한계시록 9:12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하는 종말 때 듣게 될 천사의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거듭나지 않고 구원받지 않은 상태로 죽는다면 "히브리서 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제가 보아너게처럼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없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 도저히 쉼이라고는 없는 마귀들, 고통당하는 자들, 비명을 지르는 귀신들, 방황하는 영혼들 가운데 있을 거라는 것은 여러분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불타는 유황의 파도 위에서 던진다,
영원히, 오 영원히 잃었다!"
“주의 노하심이 옵니다!” “주의 노하심이 옵니다!” “주의 노하심이 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십니까? 오셔서 저와 손을 잡지 않으시겠습니까,
"구주의 귀한 이름을 알도록
너와 나에게 주어진 은혜;
우리는 곧 천국에서 만날 것이고
우리의 끝, 우리의 소망, 우리의 길은 다르지 않을 거야"
여러분은 천국이 단지 저 작은 시냇물 건너에 있는 것을 아십니까? 저 시냇물에 뛰어들어 헤엄쳐 건너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저 시냇물에 빠져 죽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저는 바닥에 닿아보지만 좋습니다. 여러분은 빠질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 보세요.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이사야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죽음은 기한 없는 즐거움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혼란에서 해방되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기쁨으로 마지막을 맞이하고 예수 안에서 잠자며 축복을 받으세요.
저는 이제 이 주제에 설명을 모두 끝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저 문을 나서기 전에 여러분에 드리고 싶은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드렸던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에 속하신다고 진지하고 엄숙하게 믿으십니까?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이 무례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점을 지적받아 왔는데, 저는 그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인정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지만, 진지하고 엄숙하게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에 속해 있음을 아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점검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해본, 아주 간단한 세 가지 점검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설교자에는 세가지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교리적 설교자, 경험적 설교자, 실천적 설교자입니다. 이처럼 저는 크리스천을 이루는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된 교리, 실제 경험, 그리고 좋은 실천입니다.
여러분의 교리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교리를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인지 여부를 일부는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무엇을 믿느냐는 문제가 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진리는 항상 귀중한 법이고 진리의 가장 작은 부분도 찾아볼 가치가 있습니다. 요즘은 교파들끼리 예전만큼 그렇게 많이 싸우지는 않습니다. 이런 게 좋아 보이기는 하는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전만큼 성경을 많이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우리가 크게는 괜찮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서로 모순되는 곳에서 괜찮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 보기 위해 성경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저의 칼빈주의나 믿는 자의 세례 교리를 성경에서 찾도록 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한 학식이 높은 불신자 영주가 휫필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불신자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죠. 그렇지만, 만약 성경이 사실이라면 선생님이 맞고 선생님의 반대자들인 알미니안들이 틀렸습니다. 만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은혜의 교리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사람이 성경이 사실이라고 인정한다면 그에게 칼빈주의가 틀린 것을 증명하라고 도전할 것이라는 말도 덧 붙였습니다. 원죄, 선택, 유효적 부르심, 마지막 참으심의 교리를 비롯한 모든 위대한 진리들을 칼빈주의라고 부르는데, 저는 이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핵심 교리라고 믿습니다. 사실 칼빈주의는 칼빈이 만든 것은 아니고 칼빈은 그저 그 주제들에 대한 훌륭한 저자이며 설교자일 뿐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이 모든 것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를 묻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믿게 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라건대,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늘나라에 가시기 전에 주께서 여러분의 머리를 씻어주시고 교리에 있어 바로 서게 하시길을 기원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성경을 읽는지 꼭 물어보아야겠습니다. 이 아침 여러분의 잘못을 찾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틀릴 수도 있지만, 여러분이 무엇이 진리인지 찾기 위해 성경을 여시는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경을 읽지 않으시고, 교리를 간접적으로 취하는 상태에서 교회에 참석하여 성경에 있는 내용이 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요"라고 말한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여러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그것은 성경적 진리일까요? 아닐까요? 그것들이 하나님의 진리라면 그것을 받듭시다. 그것들이 여러분과 맞지 않는다면,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리지만, 예수 안에 있는 진리는 육신적인 사람들에게는 그리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그것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분의 자존심을 너무 깎아내리고, 여러분을 너무 낮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원리들을 직접 찾아보십시오.
그다음에 여러분은 경험적인 확인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 가운데 경험적인 신앙이 거의 없을까 봐 염려가 됩니다. 그렇지만, 참 교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중요한 경험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성도 여러분, 스스로에 대한 경험적 확인을 해 보십시오. 자신의 비참함, 타락, 무능력, 죄 가운데의 죽음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죄와 씨름하며 하나님의 빛을 경험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은혜로 부어지는 성령 충만의 경험이 있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경험적 확인을 가진 것이 맞습니다.
끝으로 실천의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죄 가운데 걷는 사람은 악의 자녀이고 의 가운데 걷는 사람은 빛의 자녀입니다. 올바른 교리를 믿기 때문에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믿지만 그릇되게 행동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멸망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저는 오늘 말씀을 모두 드렸습니다. 부탁드리기는 여러분이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만큼, 스스로가 주께서 잠을 주시는 사랑하시는 자 가운데 있는지 꼭 찾고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연약하고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지은 죄로 인한 영원한 결과는 끔찍합니다. 예수의 피와 상처, 우리는 그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그는 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러 다시 오실 것이며 영원한 천국의 영광과 지옥의 끔찍한 공포로 갈라질 것입니다. 모든 선하고 신성한 것으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스스로가 주의 사랑하시는 자 가운데 있는지 찾고 확인하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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