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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자 : 1855년 2월 11일 주일 아침
■ 설교 장소 : 영국 런던 스트랜드(Strand) 북쪽에 있는 엑서터 홀(Exeter Hall)
■ 설교자 : THE REV. C. H. SPURGEON
■ 설교 제목 :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Christ crucified
■ 본문 참조 사이트 : https://www.spurgeongems.org
■ 설교 내용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23-24"
하나님은 이 세상 지혜에 어떤 경멸을 쏟으셨는가! 이 세상 지혜가 텅 빈 것이 되게 하셨고 아무것도 아니도록 보이게 만드셨습니다. 세상 지혜가 스스로 결론을 내려서 그것 자체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혜로웠다고 자랑했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완전하게 반박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온전히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지혜여, 나는 너를 시험할 것이다. 너는 스스로 강력하고, 너의 지성이 방대하고 종합적이며, 너의 눈은 예리하고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제 나는 너를 시험할 것이다. 네가 풀어야 할 큰 문제를 하나 줄 것이다. 여기 한 우주가 있다. 별들이 자신들의 지붕을 짓고 들과 꽃들이 장식하고 있으며 물이 덮고 있는 우주이다. 내 이름이 그것들에 쓰여있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은 그가 창조하신 것들에 분명하게 보인다. 내가 너에게 이 문제를 준다. 철학은 나를 찾는다. 여기 내가 만든 것들이 있다. 나를 찾아보라. 내가 만든 이 놀라운 세계에서 받아들일 만하게 나를 예배하는 방법을 발견해보라. 너에게 그것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주마, 충분한 자료가 있다. 구름과 땅과 별들을 주목해보라. 너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마, 4천 년을 주며 방해하지 않을 것이지만 너는 너의 세계에 있는 것처럼 할 것이다. 내가 마음을 넓고 크게 가지며 너에게 사람들도 넉넉하게 줄 것이다. 너는 이 땅의 지배자들을 부를 것이고 너는 연설자와 철학자들도 가지게 될 것이다. 오 이성이여 나를 찾으라, 오 지혜여 나를 찾으라; 할 수 있다면 나의 본질을 발견하고, 할 수 있다면 온전히 나를 찾으라. 그리고 네가 할 수 없다면 너의 입을 영원히 닫으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사람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지혜가 더욱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어리석음 조차 사람의 지혜보다 현명한 것임을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인간의 지혜는 어떻게 그 재주를 부렸습니까? 믿음이 없는 나라들을 보십시오. 거기서 여러분은 지혜가 찾은 결과물들을 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던 때였다면 여러분은 오염 물질로 뒤덮인 땅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온갖 부패와 더러움과 타락, 우리가 함부로 언급하기도 어려운 악에 빠진 거대한 소돔과 같은 것으로 우리의 짧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나무와 돌 앞에 엎드려 자신들 보다도 더 악독한 수많은 신들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사실상 우리는 그 이성이 피와 오물이 묻은 손가락으로 스스로의 타락을 기록했으며, 이성이 수행한 악독한 행위들로 인하여 자신의 모든 영광에서 스스로를 끊어 내었음을 압니다. 그 이성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명백하게 보이는" 그에게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합니다. 기어 다니는 파충류, 악어, 독사를 숭배합니다. 모든 것이 신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정말 하늘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악은 의식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고, 엄청난 범죄가 종교화 될 수도 있지만 진정한 예배는 모르는 것입니다. 불쌍한 이성, 불쌍한 지혜여! 너희는 어떻게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아침의 아들 루시퍼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너희도 길을 잃었구나! 너희가 나름 결론을 적어 냈지만 그것은 어리석음의 완성일뿐이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인간의 지혜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했지만 그 결과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작하기 전보다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음이 지혜를 극복해낼 것이다. 이제 무지는 너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쓸어 버릴 것이며, 겸손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네 손에 가득한 거대한 체계를 먼지로 부숴버릴 것이다." 주님은 그의 군대를 부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나팔을 불어 전사들을 일으킵니다. 어부의 복장을 입고 장화를 신은 갈릴리 호수의 사람들입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어부들이죠. 지혜여! 여기 그 전사들이 있습니다!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당신의 자랑스러운 철학자들을 극복해낼 영웅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당신의 폐허가 된 요새의 벽에 그들의 기준을 심고 영원히 떨어져 버리도록 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과 그들을 따르는 이들은 복음을 세상에 전파할 것입니다. 당신은 어처구니가 없다고 웃고, 바보 같다고 비웃을 수도 있지만 복음은 언덕을 넘어 전파될 것이고 천국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후예들을 끊임없이 키우고 계십니다. 저도 사도들의 후예 임을 주장합니다. 직계비속이어서가 아니라 사도들과 같은 말씀과 사명이 있으며 바울 자신처럼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을 회심시키는 것에는 많이 인정받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하나님의 복을 받았기 때문에 제가 여기 서있는 것입니다. 바울만큼 어리석고, 베드로나 다른 어부들만큼 어리석지만 저는 여전히 진리의 검을 붙잡고 여전히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여기에 서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24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오늘 본문을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를 설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가 믿는 것을 아주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를 설교하는 것이 매 주일 아침과 저녁마다 사람들에게 철학을 주면서 성경의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를 설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 교리는 방치한 상태로 어떠한 명확한 진리도 없는 흐린 안개에 싸인 종교를 전하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를 설교하지 않는 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도 설교할 수도 있고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성령에 대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듣는 이들은 "성령이 있는지 없는지 거의 모른다"라고 할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오늘날 칼빈주의라 부르는 것을 설교하지 않는 다면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를 설교하는 것도 없으리라 봅니다. 제가 항상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있는데 칼빈주의는 별명으로 칼빈주의는 복음이며 다른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전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은혜의 경륜 안에 있는 주의 통치권을 전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택하시며, 변하지 않으며, 영원하고 무조건적인 여호와의 사랑을 찬양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백성을 위해 베푸신 특별한 구속에 기초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부름 받은 이후에 떨어지게 하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믿은 후에 저주의 불에 떨어 고통받게 하는 그런 복음을 저는 이행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런 복음은 정말 싫어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그런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를 전할 것이며 모든 반대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거절된 복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두 번째는 승리의 복음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고 세 번째는 칭송받는 복음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I. 첫 번째로 우리는 여기에 "거절된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이 그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보내면 모든 사람이 진지하게 듣고 그 진리를 겸손하게 받을 것이라고 상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생명은 복음에 의해서 불이 밝혀지게 되며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음을 선포해야만 했고 모든 귀는 들을 준비를 하고 모든 눈은 주목하며 모든 마음은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활짝 열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야 했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호의적으로 볼 때 진리가 나아가는 길 조차 방해하는 그렇게 악하고 타락하며 더러운 괴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복음이 전해졌을 때 복음이 받아들여지고 추앙받는 대신에 비웃음과 조소가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복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첫 복음 전도자를 산등성이로 끌고 가서 거꾸로 떨어뜨리려 했을 것입니다. 더한 일도 했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겪어보지 못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게 했습니다. 세상은 그의 선택된 모든 사역자들에게 귀 기울이는 대신 미워하고 혐오했으며, 인류의 쓰레기와 같은 존재, 모든 폐기물과 같은 존재로 취급하고 조롱했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거룩한 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도시에서 도시로 쫓겨 다니며 대적들이 힘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박해와 고통과 괴롭힘을 당했고 죽기까지 돌을 맞아야 했습니다. 진짜 박애주의자였던 그들은 사랑의 큰 마음, 자비의 손, 천상의 입술, 성령의 열정으로 불타는 영혼으로 왔으나 그들은 진실된 최고의 친구가 아니라 정탐꾼으로, 인류의 일상의 문제를 벗어난 탈영병으로, 적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 당시 사람들보다 지금의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복음을 좋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는 줄 알지만 저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많은 측면에서 외부적으로는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에 있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오늘날의 사람의 마음을 열어보면 천 년 전의 사람의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슴속에 있는 악독함은 옛 시몬의 악독함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노인들 조차 복음을 경멸하는 것을 보면 우리 마음속에는 잠재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반대하는 것이 잠복하고 있음 알게 됩니다.
저는 "거절된 복음"을 말함에 있어 진리를 멸시하는 것에 있어서는 똑같은 두 부류의 사람들을 밝히는데 집중할 까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거리끼는 것으로 만들고 헬라인들은 미련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여기 존경받는 두 신사가 있습니다. 한분은 유대인이고 다른 한분은 헬라인입니다. 저는 이분들을 정죄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큰 지역을 대표하는 의회의 일원으로 바라볼 것이며 모든 유대 종족이 끊어진다 해도 그리스도를 거리끼는 것으로 여길 유대인이 이 세상에 얼마나 남아 있을지, 헬라가 지진에 무너지고 온 나라가 질병에 걸려도 여전히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여길 헬라인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보여 드릴 것입니다. 저는 유대인과 헬라인 신사분들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릴 뿐이고 그들이 여러분에게 잠시 말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신사가 아직 하나님의 부름을 받지 못한 여러분을 표현하며 믿지 않는 많은 이들을 대표하고 있음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먼저 유대인입니다. 그에게 복음은 "거리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존경받는 유대인으로 모든 종교 형식에 집중하여 열심을 다해 성전으로 올라갔으며 그가 모든 것 심지어 박하와 회향의 십일조까지 바쳤습니다. 아마도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 그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를 바라본다면 그의 눈 사이에는 율법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성구함과 엄청난 폭을 가진 그의 의복은 그가 이방인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게 합니다. 그 누구도 그가 순수한 히브리인의 자손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는 거룩한 조상을 가졌으며, 경건한 가정을 이루고 정의롭고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종교가 없는 사두개인들을 견딜 수 없었으며 그의 회당을 위하는 완전히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심산에 있는 성전에는 가지 않았는데 사마리아인을 견딜 수 없었고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고의 종교인이었으며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 도덕적이고 율법의 의식들을 좋아하는 사람의 표본이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들었을 때 그리스도가 누구였는지 물었습니다. "목수의 아들이야" "아하!" "목수의 아들이고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아버지는 요셉이지." 그는 "그 정도만으로 충분히 추정해 볼 수 있군." "사실 그것만으로도 그가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좋은 증거지. 그는 뭐라고 말했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하지?" "그렇지 않아" "더구나 그는 '누구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육체일로는 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어" 그 유대인은 곧바로 성구함을 꽉 붙들고 의복의 테두리를 두배로 넓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나사렛 사람들에게 인사할까요?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지나갔다면 그는 그 길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제자들이 간 길을 비켜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가 그의 아버지의 종교를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시내산에서 온 종교이고 성궤와 두 돌판에 있는 옛 종교입니다. 그가 포기할까요.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에는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사악한 사기꾼으로 보입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 들을 수 없다. 듣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는 귀를 닫고 모든 전도자들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여 잘 가세요. 당신의 아버지와 여전히 이 땅에서 방황하고 있는 당신의 민족과 함께 잘 가세요. 저는 당신에게 할 수 있는 것을 다했습니다. 아아 불쌍한 사람아 당신이 거리끼는 것이라 여겼던 그 그리스도가 당신의 심판장이 되실 것이며 "마태복음 27:25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했던 큰 소리의 저주가 당신에게 닥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 엑서터 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리끼는 것으로 대답하는 그런 유대인과 같은 분들을 찾아볼까 합니다. 여기에 계신 몇몇 분에게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경건한 가정이셨지요, 그렇지 않으세요? 좋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종교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 종교를 덮고 있는 외형과 껍질이 지속되는 한 그 종교를 사랑합니다. 변형된 종교의식을 갖지도 않을 것이고 여러분이 좋아하는 건물이 부서지지도 않을 것이며 스테인드글라스가 없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 그런 것에 반하는 말이라도 한다면 여러분은 즉시 그를 이단자로 규정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그런 예배 장소에 가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상들이 예배했던 예배당이라 불리는 평범하고 오래된 만남의 장소를 좋아합니다. 정말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곳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장소지요. 여러분은 그 예배당의 격식과 외관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그 장소에 반하는 이야기라도 하면 여러분은 얼마나 짜증을 느낄까요? 거기서 하는 것들을 모든 곳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여러분이 다니시는 그 교회가 모든 이들을 위한 그런 종류의 장소라고 모델이 될 만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당신은 왜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라고 물으면 아마도 "저는 침례교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공회 교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다른 자신이 속한 교파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거기에 여러분 자신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에는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거리끼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이 하나님의 집에 가는 것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고, 여러분이 수없이 불렀던 찬양과 기도가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너무 형식적이고 위선적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다고 말한다면 모든 외적인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 젊은이 말을 다시는 듣지 않을 거다"라고 말하실 것입니다. "거리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형식주의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곳에 발을 들여놓으셨거나 여러분이 "이것도 꼭 해야 하고 저것도 꼭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들으신다면 여러분은 그런 것을 아주 높이 평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종교적인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이것들에게서 어떤 결함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도 없으며, 갈보리의 십자가 앞에 결코 꿇어 엎드리지도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를 간절함으로 바라본 적도 없으며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그분을 결단코 신뢰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피상적인 종교를 좋아합니다. 누군가 좀 더 깊이 있게 이야기하면 독실한 체한다고 치부해 버립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좋아할 때 그 사람 자체는 신경 쓰지 않고 그가 입은 옷을 좋아하는 것처럼 종교의 외적인 것만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제가 외적인 것을 말하면 제가 하는 설교를 들을 것입니다. 제가 도덕적인 것을 강조하거나 술 취함을 비판하거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의 악독함을 보여 준다면 제 말을 주의 깊게 들으실 것입니다. 모두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는 다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거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야 하며 구주의 피값으로 사신 바가 되어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을 받아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는 미친 사람이오. 가시오. 가버리시오!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소!" 예식 주의자인 유대인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그저 거리끼는 것입니다.
이 유대인의 또 다른 사례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의 감정에 있어서 완전히 전통적입니다. 그는 형식과 의식에 그렇게 얽매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건전한 교리를 배우는 예배 장소로 갑니다. 오직 사실인 것만을 들을 것입니다. 그는 좋은 일을 하고 도덕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는 좋은 사람으로 그 누구도 그에게서 흠을 잡을 수 없습니다. 매 주일마다 규칙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시장에서는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처럼 누구보다도 정직합니다. 그에게 어떤 교리에 대해서 물으면 그는 그것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해줄 수 있습니다. 사실상 그는 성경에 있는 그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그 외에 수많은 엄청난 것에 대해서도 논문을 작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거의 모든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의 종교는 머리의 어두운 다락을 거처로 삼고 있고 그의 가슴에는 최고의 거실이 있지만 그의 종교는 결코 그곳으로 가지 않고 막혀 있습니다. 대신에 그 거실에는 돈, 맘몬주의, 세속적인 것이나 다른 자기 자랑과 자기애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경험적인 설교 듣기를 좋아하고 완전히 칭찬합니다. 사실 건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그 자신에게 어떠한 음성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건전하지만 실체가 없습니다. 그가 진실된 교리 듣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교리가 그의 안 사람 속으로 파고 들어가질 않습니다. 그가 우는 모습은 결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 영광스러운 주제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설교해도 그의 볼에 흐르는 눈물은 결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 성령의 엄청난 감동을 이야기해주면 그는 그것을 칭찬할지는 몰라도 그의 영혼에 성령을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에게 하나님과 교제, 즉 하나님의 신성한 바다에 들어가 그 광대함에 길을 잃는 그 하나님과 교제를 말해주면 그는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결코 그것을 경험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교제도 결코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일단 정곡을 찌르기 시작하면 그는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해부 칼을 들어 그의 가슴을 빼내어 그에게 보여주고 그로 하여금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은혜로 되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그리스도를 보도록 하면 그는 견딜 수 없어할 것이고 그 무엇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비록 머리로는 그것들을 충분히 좋아하지만 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그는 그것을 버리고 맙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은 자신을 바라보십니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는 것처럼 여러분 자신을 보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시는 것처럼 여러분 자신을 보십니까? 그러시다면 유대인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 그리스도가 거리끼는 것인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형식주의자들에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껍질을 가졌지만 정작 알맹이는 혐오합니다. 여러분은 격식과 의복을 좋아 하지만 정작 그것을 입은 사람의 순결함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다채로운 물감과 장식용 반짝이에 감탄하지만 정작 순금은 혐오합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종교는 여러분에게 확실한 위안을 줍니까? 죽음과 대면하여 "나는 내 구속자가 살아 계심을 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밤에 저녁 예배 찬양을 부르며 눈을 감을 수 있습니까?
"나는 끝까지 견뎌야만 한다,
확실한 약속을 받지 않았는가?"
여러분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현재의 상태 그대로 모든 시련 바다를 헤엄쳐 갈 수 있습니까? 사자굴을 지나 승리의 걸음을 걸을 수 있습니까? 고난을 이기고 지옥에 대항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복음은 나약한 것으로 능력이 아닌 말과 소리일 뿐입니다. 바라건대 그것을 여러분에게서 떨쳐내십시오. 간직할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면 그것은 여러분을 떨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폐허가 되고 파멸할 것입니다. 결코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제야 여러분이 스칸달론, 즉 "거리끼는 것"으로 여겼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심판장이 될 것이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유대인을 다루어 보았고 이제는 헬라인을 다룰까 합니다. 일단 외관 상으로도 유대인과는 아주 다릅니다. 그에게 유대인의 성구함은 쓰레기이고 넓은 의복은 경멸의 대상일 뿐입니다. 종교의 형식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테가 넓은 모자를 비롯해서 사실상 밖으로 보이려 하는 모든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달변을 좋아하고 현명한 이야기를 존경하며 진귀한 표현을 좋아하고, 최근에 나온 새책 읽기를 즐겨합니다. 그는 헬라인이고 그에게 복음은 미련한 것입니다. 이 헬라인은 오늘날 대부분의 공간에서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종종 대학교에서 생산되었고 학교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졌으며 모든 곳에서 생산되었습니다. 그는 증권 거래소에도 있고, 시장에도 있으며 마차를 모는 고귀한 신사로 모든 장소, 심지어 법정에도 있습니다. 그는 아주 지혜로운 사람으로 그에게 묻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오래된 시를 읊어 달라고 하거나 다른 것을 요청하더라도 그는 충분히 그런 것을 해줄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회교도로 여러분의 종교를 그에게 권한다면 그는 최소한 인내심을 가지고 듣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크리스천으로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위선적인 말을 멈추세요. 그것에 대한 어떤 것도 듣고 싶지 않아요"
이 그리스 신사는 하나의 참 진리를 뺀 모든 철학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뺀 모든 지혜를 연구하며, 영적인 배움을 뺀 모든 배움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사랑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을 좋아합니다. 참 어리석고 미련한 짓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한 가지 교리가 밝히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귀를 닫고 더 이상 여러분과 함께 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 미련한 짓입니다.
저는 이 사람을 아주 많이 만났었습니다. 한 번은 저를 보시더니 자신은 어떠한 종교는 전혀 믿지 않는 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믿는 것과 제가 죽으면 천국에 가는 소망이 있다고 말했더니, 그는 아주 좋다고 쉽게 말했지만 그는 종교를 믿지 않았고 자연 그대로 사는 것이 최선임을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한 번은 모든 종교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하면서 각 종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아주 훌륭하고 모두가 진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어떠한 종교에라도 신실하면 결국 그 사람은 잘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저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은 단 하나의 종교밖에 없음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종교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선물인 종교입니다. 그러자 그는 제가 편견이 심하며 잘 지내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참 미련한 짓입니다. 그는 저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는 종교를 전혀 좋아하지 않거나, 모든 종교를 좋아했습니다. 또 한 번은 그를 붙들고 믿음에 대해서 잠시 토론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모두 좋습니다. 저는 개신교 교리가 참이라고 믿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의 택하심에 관하여 말하자, 그는 "저는 그런 것은 좋아하지 않아요. 많은 분들이 그것을 전했지만, 결국 나쁜 것으로 만들고 말았어요."라고 합니다. 제가 값없이 얻는 은혜에 관하여 언급했지만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세련된 그리스인으로 만약 그가 선택되지 않았다면 그는 선택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결코 이 말씀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27~28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그는 성경이 믿을만한 것이 생각했는데 성경이 개정된다면 이 구절은 없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 아침 여기에 계신 그런 분들에게 이 말씀을 꼭 드려야겠습니다. 이 세상 지식으로 가득 찬 지식인이여 당신의 지식은 당신을 이 세상에 세우겠지만 요단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갈 때는 철학이 기댈만할 것입니다. 강이 깊으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물결 속에서 당신을 붙잡아 주고, 약속으로 당신을 기쁘게 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팔이 없다면, 당신은 당신이 가진 모든 철학, 당신의 모든 배움과 함께 빠질 것입니다. 결국 당신은 빠져서 끔찍한 바다로 흘러갈 것입니다. 영원한 고통이 그 바다에서 당신은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아! 헬라인이여 복음이 당신에게 미련한 것일 수 있지만 당신은 당신을 심판하실 인자를 뵐 것이며 당신이 하나님의 복음은 미련한 것이라고 말한 그 날을 후회할 것입니다.
II. 지금까지 거절된 복음을 다루었다면 지금부터는 승리의 복음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저 사람들은 망상으로 여기면서 복음을 거부하고, 은혜를 경멸하며 비웃습니다. 여기 저들처럼 웃었던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무릎 꿇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냥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헛되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이사야 53: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한 죄인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이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결코 천국 백성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광의 찬양대에 들어갈 한 사람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름 받고, 구원을 얻으며, 구해질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어리석은 이여!
예의는 걷어치우고 당연한 듯 욕을 퍼붓는구나
구세주의 사랑으로 주신 구속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구나 - 의인에게는 구속이 필요치 않지
만나는 모든 이를 유혹하는 저 매춘부 같은 너를 보아라
대로변에 낡아 빠진 골칫거리
아침부터 밤까지 밤부터 아침까지
너의 멸시만큼이나 혐오에 쌓여 있구나
하늘이 너를 거부할 때
한없고 값없는 은혜의 비가 너에게 내릴 것이다.
저 모든 지혜가 말하네
저 사람은 죄 가운데 죽지만 삶은 선물이다"
의인과 착한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들이 복음을 거절한다면 다른 이들이 부름을 받고 다른 이들이 구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무런 의미 없이 고통받지 않으셨으며 그의 피값은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저는 이번 주에 "부르심"에 대해서 설명을 부탁한다는 메모를 하나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말씀에서는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가 택함을 받는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말씀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부터 두 가지 부르심에 대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제 오랜 친구인 존 번연은 "암탉은 두 가지 종류의 부름이 있어, 매일 일상적으로 꼬꼬댁하는 것이 있고, 자기의 병아리들을 부를 때 내는 특별한 소리가 있지"라고 말하는데 그런 것과 비슷합니다. 우선 모든 사람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듣는 일반적인 부르심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부르심을 받습니다. 여러분 모두도 이 아침에 이 부르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택함을 받은 이는 적습니다. 다른 부르심은 특별한 부르심으로 자녀들에 대한 부르심입니다. 작업장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부르는 종소리를 내는 것은 일반적 부르심입니다. 아버지가 문을 열고 "존, 저녁 시간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특별한 부르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인 부르심을 받지만 선택받은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부르심은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항상 특별한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 서서 사람들을 부르면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제가 죄인들에게 일반적인 이야기를 한들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여러분이 여름날 저녁에 종종 보시는 판 번개와 같습니다. 크고 아름답지만 이 번개는 구름 사이에서만 번쩍이지 땅으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부르심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꽂는 번개와 같습니다. 왕의 갑옷 솔기를 맞추는 화살과도 같은 것입니다. 구원의 부르심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신 것과 같습니다. 마리아는 "랍오니여"하며 그에게 대답을 했지요. 여러분은 그 특별한 부르심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귀에 여러분의 이름을 속삭이시며 "나에게 오라"라고 하셨던 때를 기억하실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제가 다음에 이야기하려는 사실을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바로 실효적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에는 저항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특별한 부르심으로 부르시면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 저의 경우에도 저는 종교를 비웃고 경멸했으며 혐오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이 아니라면 저는 주께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저는 가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해도 하나님은 "그러나, 너는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로는 나는 결코 듣지 않을 거야 라는 결심으로 교회에 가지만 결국 제가 들어야만 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아! 제 영혼에 말씀이 어떻게 들어왔는지요! 거기에 저항할 수 힘이 있었을 까요? 아닙니다, 저는 거꾸러졌고 모든 뼈가 부서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실효적 은혜에 의해 구원받은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셨습니까?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여러분을 다루시기 시작하시면 여러분은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여러분은 충분히 견뎌 왔습니다. 몸이 아픈 것도 여러분을 거꾸러뜨리지 못했습니다. 질병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발 앞으로 이끌어 가지 못했으며 훌륭한 설교도 여러분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이 일하시면, 아! 사울과 같은 엄청난 변화를 맞닥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말을 타고 다메섹으로 가는 중이었지요 "사도행전 9:4~5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시는 음성이 들려왔고. 사울은 더 이상 갈 수 없었습니다. 바로 실효적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에게도 같은 부르심을 주셨습니다.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가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무 아래를 지나시면서 "누가복음 19:5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삭개오는 그물에 걸린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들었고 그 부르심은 삭개오의 영혼으로 들어갔습니다. 전능하신 능력이 그를 무너뜨렸기 때문에 그는 나무 위에 그냥 멈춰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에게 특이한 사람들의 사례를 말씀드릴까 하는데 바로 교회에 와서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이 묘사되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 저 이야기 내 이야기 아니야! 저분이 나를 그리고 있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어제저녁 주인의 장갑을 훔친 한 젊은이에게 제가 여기서 말을 하지만, 예수께서 그를 회개의 자리로 부르시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르심이 특별한 성격을 가지는 경우 특별한 능력을 수반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들에게 붓을 주시면서 어떻게 실물과 같은 초상화를 그리는 지를 보여 주십니다. 사실상 죄인들은 특별한 부르심을 듣는 것입니다. 저는 특별한 부르심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부르심으로 저는 그저 하나님께 맡길 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틀림없이 부르심을 받을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은 비웃을 수 있지만 유대인이나 헬라인 중에서도 여전히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요점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자기 의를 버리고, 많은 율법주의자들이 자신의 율법주의를 버리고 그리스도께 오거나 많은 헬라인들이 하나님의 복음의 보좌에 자신의 생각을 굽히게 된 것은 엄청난 긍휼 하심입니다. 윌리엄 쿠퍼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이 흔들어 놓은 부자들이 조금 있어
그리고, 면류관을 쓰고 기도하시는 한분이 있지
감람나무에 남은 열매와 같아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 여기저기에 있구나"
III. 이제 세 번째 요점인 칭송받는 복음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여러분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순수한 경험의 문제 여야 합니다. 이 아침 여러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것을 아실 것입니다. 저는 크리스천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할 때가 있음을 압니다.
"내가 간절히 알기 원하는 한 가지,
때로는 걱정스러운 생각을 일으킨다;
나는 주를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나는 그의 백성인가? 아닌가?"
만약 누군가 자신의 삶 가운데서 스스로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인식한 적이 없다면 그는 크리스천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 "이제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확신의 때가 없었다면 저는 그 사람은 거듭난 적이 없었을 거라는 심한 말을 차마 못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모르면서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모르면서 어떻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 사람이 모르면서 어떻게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갈 수 있는지, 사람이 모르면서 어떻게 암흑에서 찬란한 빛으로 건져질 수 있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확실하게 압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옛 구절을 외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이제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네
나를 위해 흘리신 내 구주의 피
사랑하는 그의 발 앞에 누워
구원받은 죄인은 찬양을 드립니다"
눈이 기쁨으로 반짝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확실하고 명확하게 이해되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죠. 저는 아직 의심 가운데 있는 분들을 괴롭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종종 우울한 의심은 점점 커질 것입니다. 자신이 부름 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때,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 자체를 의심하는 때가 있습니다. 아!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 일인지요!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붙잡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의 손을 어떻게 잡느냐가 아니라 그가 여러분의 손을 잡는 것으로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언젠가 여러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제가 다음 부분에서 말하려는 순수한 경험의 문제에 대해서 저를 따라올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참으로 믿는 자에게는 능력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능력인 그리스도이십니다. 아아! 하나님의 복음에는 모든 서술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한때 저는 마제파를 좋아했었습니다. 마제파처럼 야생마에 내 욕망과 손과 발이 묶여서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는 상태로 광야로 추방되었죠. 지옥의 늑대들은 제 몸과 제 영혼을 저들의 당연한 먹이 인양 여기며 울부짖으며 쫓아옵니다. 그때 전능한 손이 제게 오셔서 야생마를 멈추고 묶인 밧줄을 끊어 저를 내려 주셨고 저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거기에 능력이 있습니까? 예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느낀 사람이라면 그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저도 제 죄들의 튼튼하고 오래된 성에 살면서 제 일들에 빠져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 나팔수가 성문 앞에 와서는 문을 열라고 했습니다. 저는 문 앞에서 화를 내며 당신은 절대로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온화한 품성이 풍기는 한분이 오셨는데 그의 손에는 못이 박혔던 흉터가 있었고 그의 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그의 십자가를 들어 올리시더니 해머처럼 휘두르셨습니다. 첫 손길에 제 편견의 문이 흔들렸고 다음에는 좀 더 흔들리더니 세 번째는 문을 아예 넘어뜨렸습니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므로,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능력입니다! 아! 그것은 능력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 마음으로 그것을 느꼈습니다. 저를 굴복시키고 무릎 꿇게 하셨으므로 제게는 성령의 증거가 있으며 그것이 전능하신 능력임을 압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값없는 은혜 만이
내 사랑을 얻었고 내 영혼을 꽉 붙잡았다"
크리스천에게 복음은 능력입니다. 무엇이 젊은이로 하여금 자신의 부모를 떠나 먼 곳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하도록 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하게 하는 것은 능력입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저 선교사로 하여금 콜레라가 창궐하는 마을 한가운데서 삐걱 거리는 계단을 올라가 심각한 질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삶 전체를 모험으로 이끄는 힘이어야만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무엇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런 준비가 없는 많은 동료 앞에 서서,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을 이야기할 것이다 라고 결심하게 할까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전장에 있는 욥의 군마처럼 "자 가자!" 하며 외치고 힘을 내며 영광스럽게 움직이게 했을까요? 그것을 하게 하는 것은 능력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무엇이 연약한 여성으로 하여금 캄캄하고 비 내리는 저녁길을 걸어서 전염병에 걸린 열병 환자 옆에 앉도록 용기를 내게 했을까요?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도둑들의 소굴을 통과하고 주정뱅이들과 불신자들 사이를 지나서 가도록 힘을 주었을 까요?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죽음의 영안실로 들어가 곁에 앉아서 위안의 말을 하게 했을까요? 황금이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했을까요?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그녀에게 줄 금이 없습니다. 명성이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했을까요? 그녀는 결코 알려지지도 않을 것이며 이 세상의 위대한 여성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무엇이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했을까요? 선행을 쌓는 것을 좋아해서 일까요? 아닙니다. 그녀는 높은 하늘 앞에서 그런 자격이 없는 줄을 압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했을까요? 바로 그녀의 마음에 있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녀는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온 세상 만물 다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받은 나,
내 영혼, 내 삶, 내 모든 것 드리네"
그러나 저는 또 다른 장면을 봅니다. 한 순교자가 화형장으로 급하게 끌려갑니다. 무기를 든 남자들이 그를 감싸고 있고 군중들은 조롱 대고 있지만 그 순교자는 담담하게 계속 걷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그의 허리를 쇠줄로 묶고 화형장으로 끌고 갑니다. 그 사람 주위로 장작 더미를 쌓아 놓고는 불을 붙입니다. 순교자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시편 103: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그의 발 주위로 불이 붙고 그의 뼈까지 태우고 있습니다. 손을 외치는 그를 보십시오. "내 주님은 살아 계셔, 비록 불이 이 몸을 삼킬지라도 나는 이 몸으로 주를 볼 것이다." 화형대를 붙잡고 마치 그것을 사랑했던 것처럼 입 맞추는 그를 보십시오. 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저들이 나를 쇠줄로 묶었으나 하나님은 황금 줄을 내게 주실 것이며 이 모든 장작 더미와 수치와 부끄러움은 내 영원한 영광으로 바꾸실 것이다" 보십시오. 그의 몸 아래가 모두 탔으나 그는 여전히 고통 중에 살아 있습니다. 마침내 그의 머리가 떨구어지고 나머지 몸 나머지 엎어지고 맙니다. 그가 쓰러지면서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부탁하나이다" 여러분 그에게 어떤 놀라운 마법이 있었던 것입니까? 무엇이 그를 그토록 강하게 만든 것입니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잔인한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왔을까요? 무엇이 그가 화염 가운데서도 요동하지 않도록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능력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구원을 얻은 자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기 아주 다른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은 사람들도 없는 고요한 방안입니다. 외로운 침대가 하나 놓여 있고 의사 한분이 서 계십니다. 한 어린 소녀가 있는데 얼굴은 하도 앓아서 핼쑥해졌고 뺨은 벌레가 파 먹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가끔씩 깨기는 하지만 기만적인 파괴자의 죽음의 신호일 뿐입니다. 창백한 얼굴의 약하고 허약한 소녀는 죽어가고 있지만 소녀의 얼굴을 보면 마치 천사를 본 듯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소녀가 말을 하는데 그 음성 속에는 음악이 있는 듯합니다. 옛 잔다르크는 이 소녀의 위엄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소녀는 침상에서 용들과 싸우고 있지만 소녀는 평안함 속에 있습니다. 죽어가는 소녀의 시는 들어 보십시오
"예수, 내 영혼의 사랑,
당신의 품으로 날아가게 하소서,
내 곁에서 파도가 용솟음치고,
폭풍이 여전히 몰아칠 때
구주여, 숨겨 주소서, 나를 숨겨 주소서,
삶의 폭풍이 지나가고
안식처에 무사히 다다를 때까지,
오, 마지막엔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그리고 소녀는 이 땅에서 미소와 함께 눈을 감고 천국에서 눈을 뜹니다. 무엇이 소녀를 그렇게 죽을 수 있게 했을까요? 그것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른 사례를 더 말씀드리고 싶지만 시간이 없네요, 그리고 길고 지루한 설교로 여러분을 지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른 문장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믿는 자에게 복음은 지혜의 완성이며 믿지 않는 자에게 그렇지 않은 것은 그들의 타락에 기인한 판단의 왜곡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대중들은 종교적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거의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신자, 무신론자, 이신론자들은 깊은 생각과 종합적인 지능을 가진 사람으로 말하고 크리스천 논객들은 마치 적의 손에 넘겨져야만 할 것처럼 흔드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은 지혜의 총아이며, 지식의 전형이고, 진실의 보물 창고이며 신비한 비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의와 자비가 합쳐질 수 있는지를 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변치 않는 율법이 완전한 완성되는 것과 죄인을 당당히 이끌어 가시는 주권적인 사랑을 봅니다. 그것에 대한 우리의 묵상은 마음을 넓힙니다. 그리고 영광의 빛 가운데 우리의 영혼을 열리면 우리는 그 안에서 분명 해지는 깊은 지혜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아, 존경하는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지혜를 찾으신다면 여러분은 그것이 이미 엄청나게 보였음을 볼 것입니다. 구름의 균형에서도 아니고 땅의 기초의 튼튼함에서도 아닙니다. 하늘 군대의 질서 정연한 행진에서도 아니고 바다 파도의 끊임없는 움직임에서도 아닙니다. 온갖 아름다움을 가진 식물에서도 아니고 놀라운 신경과 혈관, 힘줄과 같은 몸을 가진 동물에서도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창조주의 최고의 작품인 인간에서 조차도 아닙니다. 그러나, 시선을 돌려 이 놀라운 광경을 보십시오!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하늘 심판에 대한, 불순종하는 죄인을 건지시는 희생 제물이셨습니다. 여기 근원적인 지혜가 있습니다. 왕좌에 오르셔서 면류관을 쓰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 지혜입니다. 이 땅의 여러분이여 그를 바라보십시오. 눈이 멀지 않고 배움을 좋아하신다면 존경의 마음으로 머리를 숙이고 여러분의 모든 것으로는 어떤 복음도 만들 수 없었음을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존경하는 여러분, 복음은 그 자체로 지혜이지만 복음을 배우는 자들에게 지혜를 주기도 합니다. 복음은 젊은이들에게 지혜와 신중함을 가르치고 단순한 이들에게 이해력을 줍니다. 주를 믿고 찬양하는 사람과 진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예수 안에 있는 것처럼 다른 과학 분야에서도 따를 만한 올바른 위치에 있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고백하건대 지금 저는 제 머리에 모든 것을 둘 수 있는 책꽂이가 있습니다. 무엇을 읽든 그것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압니다. 무엇을 배우든 그것을 어디에 간직해야 될지 압니다. 예전에는 책을 읽으면 제 모든 지식을 광대한 혼란 속에 두었지만, 제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로는 그리스도를 제 태양으로 해서 가장 중심에 두었습니다. 각 과학은 행성처럼 그 주위를 돌고 과학의 세부 분야들은 위성처럼 이 행성들 주위를 돕니다. 그리스도는 제게 있어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 저는 지금도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과학은 모든 과학 중에 최고의 과학이며 제게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작업실을 갈보리에 세워보십시오! 그곳에 전망대를 세우고 믿음으로 자연의 고귀한 것들을 찾아보십시오. 여러분을 겟세마네 동산에 홀로 계신 분에게로 데려가서 실로암의 물로 눈을 씻으세요. 성경이 여러분의 기준이 되는 고전이 되게 합시다. 그래서 성경이 혼란에 대한 최종 처방이 되게 하십시오. 그 빛이 여러분의 조명이 되게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플라톤보다 현명하게 될 것이며, 고대 그리스의 7현인 보다도 많이 배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저는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그리고 진정으로 여러분에게 간곡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알기에 여러분은 이 아침 서로 다른 동기로 이곳에 모이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호기심으로 오셨고 어떤 분들은 제 설교를 들으시던 분들입니다. 각자 사시는 곳도 다르지요. 이 아침 여러분은 저에게 무엇을 들으셨습니까? 저는 그리스도를 거부한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말씀드렸습니다. 한 부류는 종교의 형식만 가지고 있는 종교 주의자이고 다른 부류는 우리의 복음을 미련한 것이라 부르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손을 가슴에 얹고 이 아침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이들 중에 속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 자리에 들어오신 그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가시면 됩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즐거움과 기쁨은 마치 꿈처럼 사라지고, "기초 없는 허상처럼"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언젠가 사탄의 지옥에 내려가면 아마도 수많은 영혼 중에 여러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두 손을 가슴에 얹은 상태로 끝이 없는 원을 영원히 도는 그러한 영혼들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손과 몸이 투명하다면 저는 여러분 안에 있는 심장을 볼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것을 보게 될까요? 불이 있는 경우입니다. 불속입니다! 벌레가 심장을 갉아먹지만 결코 죽지 않고 그곳에서 영원히 돌 것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여! 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제는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경멸하지 않게 하시고, 이 시간 이들이 부름 받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부름 받으신 나머지 분들에게는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더 오래 사실 수록, 여러분은 복음이 더 능력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더 깊은 가르침을 받으실 것이고, 성령의 변치 않는 도우심을 더 받을 것이며 복음이 능력임을 더 깨닫고 또한 복음이 지혜임을 더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축복이 여러분에 임하고 주께서 저녁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사람들도 천사도 광산을 파내자
자연의 황금 보물이 빛나는 곳;
그것을 십자가로 가져오라,
모든 자연의 황금은 빛이 나지만 그저 쓰레기일 뿐
사악한 모독자는 눈을 흘기며
예수의 진리는 헛된 것이라 외치지만,
우리는 그들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목도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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