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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자 : 1855년 1월 21일 주일 아침

■ 설교 장소 : 영국 런던 사우스 워크 (Southwark)에 있는 뉴 파크 스트리트 채플 (New Park Street Chapel)

■ 설교자 : THE REV. C. H. SPURGEON

■ 설교 제목 : 성령의 인격, The Personality of the Holy Spirit

■ 본문 참조 사이트 : https://www.spurgeongems.org

■ 설교 내용 :

"요한복음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오늘 아침 제가 여러분에게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면 놀라실 것인데, 이 부분은 오늘 저녁 특별 설교 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번 설교에서는 이 본문에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계시며,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유익을 끼치시려는 다른 원리들을 설명하고 적용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존 뉴턴은 훌륭하고 건전한 책이지만 읽을 수 없는 책들이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가치를 가지려면 엄청난 양을 가져야 하는 싸구려 책들입니다. 다른 것들로 은이나 금으로 된 책이 있지만 저는 수표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 장이 엄청난 값을 가지고 있는 수표입니다". 제가 깨달은 점은 오늘 이 본문이 마치 엄청난 값을 가지고 있는 수표책과 같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아침에는 본문의 모든 것을 말씀드릴 수는 없고, 몇 시간 후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귀한 약속의 가치를 모두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본문에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네 가지로 몇몇 지침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성령의 참되고 올바른 인격을 다룰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구원 역사에 대한 영광스러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다룹니다. 셋째로 모든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교리의 기반이 되는 뭔가를 찾을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왜 육신의 생각이 성령을 거부하는지를 찾아볼 것입니다.

 

I. 우선 우리는 성령의 올바른 인격에 대해서 다룰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이나 그의 신성한 사역과 은혜를 말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성령이 참으로 그리고 실제로 실존하고 존재하는 한 인격체라는 것을 쉽게 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삼위일체 주의자들은 삼위 하나님 중의 한 인격으로 말하곤 합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우리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그 자체로 실제로 존재하는 한 인격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입니다. 성령을 한 인격으로 우리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성부 하나님을 한 인격체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하시는 일들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계를 창공에 매달았고, 암흑 속에서 바다를 만드셨습니다. 우박을 만들고, 별들을 이끌어 내고 각각의 이름을 부르신 분이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저는 그가 하신일을 알기 때문에 그를 한 인격체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성자 예수님도 한 인격체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저와 같은 뼈와 몸을 가지신 실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의 아기나 "슬픔의 사람"을 상상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빌라도의 뜰에서 조롱과 박해를 받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박히는 그분을 떠올리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종종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님의 인격을 떠올리는 것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구름을 두르시고 모든 창조물의 왕관을 쓰시고 이 땅을 심판하시며 우리의 마지막 판결을 말하시려 부르시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해서는 그의 존재를 한 인격으로 쉽게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가 하시는 일은 너무 신비롭고, 비밀스러우며, 육신의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 인격체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어떤 영향이나 발산, 성부로 부터 흘러나오는 흐름도 아닙니다. 그는 성자나 성부 하나님과 같은 실제 인격체입니다. 저는 이 아침 성령 하나님께서 한 인격체라는 것이 사실임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 관련 교리를 조금 세워볼까 합니다.   

 

우리는 첫 번째 증거를 거룩한 세례 현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현장으로 가시지요. 지금은 감추어져 있지만 여러분의 눈에 그것이 항상 보이기를 바랍니다. 세례단으로 여러분을 모시겠습니다. 믿는 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덧입는 장소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라는 엄숙한 말들을 듣게 되는 장소입니다. 이름들이 아니라 "이름으로"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올바른 형식에 따라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누구나 삼위일체 주의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세례는 우스갯거리와 거짓말이고 그 자신은 하나님 앞에 사기꾼이고 위선자가 됩니다. 성부와 성자가 언급된 것처럼 성령도 마찬가지이며 전체가 하나로 삼위일체가 된 것입니다. "이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부의 이름, 성자의 이름, 성령의 이름, 영광스러운 여호와의 이름으로 세례가 주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억을 일깨워 드리면 여러분이 이 예배당을 나설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예배를 끝내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하지요. 그리고 사실 사도들의 방식을 따르더라도 성부도 한 인격, 성자도 한 인격, 성령도 한 인격으로 분명한 구분이 있습니다. 성경에 다른 증거가 없을까요? 제 생각에는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령이 단순한 영향력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가 실제로 실존하고 존재하는 인격으로 고백하는 성부, 성자와 함께 성령이 언급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주장은 성령께서 지상에서 다른 모습들을 보이셨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위대한 성령께서는 스스로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를 볼 수 없었지만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를 가지셨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니까? 완만한 강둑에 늘어진 버드나무가 있는 요단강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물로 내려가시고 경건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물에 담급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기적 같은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태양빛보다 밝은 빛이 하늘에서 비추이고 영광 가운데 비둘기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내려옵니다. 그것은 옛 화가들이 예수님 주위에 후광을 그린 것과 같이 예수께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뭅니다. 성령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오셔서 세례 의식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얼굴 주위를 찬란하게 빛나게 했습니다. 성령은 비둘기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순결과 온유함을 나타냅니다. 성령은 하늘로서 내려오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비둘기처럼 내려오셨습니다. 성령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신 것이 이것이 유일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곧 오실 약속하신 축복을 기다리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아주 급하고 강한 바람의 소리입니다! 놀란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당황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곧 밝은 빛이 나타났고 불의 혀 같은 이 빛은 각 사람에게 임합니다. 이런 기적 같은 바람과 불꽃은 성령께서 자신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말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저는 이런 외형적 모습을 가진 사실 자체가 그는 한 인격체임을 나타낸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영향이나 속성은 나타날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의 눈에 보이고 인간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 오신 성령님은 한 인격체임이 분명합니다.

 

또 다른 증거는 성경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자질들이 성령님께로 귀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여러분에게 성령님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언급하고 있는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9~11절입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여기에서 여러분은 지식의 능력이 성령께로 귀속된다는 것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지금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는 사람이라면 한 자질을 다른 것에 돌리고 이해력을 가진 단순한 영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은 어쩔 수 없고요. 그렇지만 저는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력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 한 존재, 한 인격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서도 성령에 대한 말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성령께서 의지가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성령은 단순히 성부의 뜻에 따라오신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별되고 분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님을 한 인격체로 말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성경에서는 능력을 성령님께로 귀속시키고 있습니다. 능력은 한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제가 더 강조할 필요 없이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 의지와 능력,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은 단순한 속성도 은유도 의인화된 영향도 아니고 분명한 한 인격체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마도 여러분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줄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훗날의 증거물들이 성령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 인격체 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은 창세기 1장을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세상이 아직 무질서와 혼란 가운데 있을 때에 성령께서 수면에 운행하셨다는 장면입니다. 이 세상은 처음에는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질서가 없었고 마치 흑암의 계곡과 죽음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 위에 그의 날개를 펴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생명의 씨앗을 그 위에 뿌리신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생겨난 기원은 성령에 의한 것입니다. 이 땅이 생명을 품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혼란으로부터 질서를 가져온 것은 한 인격체 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운행하셔서 지금의 세상을 만들어 놓으신 그분은 한 존재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성령에 대한 더한 것을 읽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베드로후서 1:21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모세오경을 썼을 때 성령께서 그의 손을 움직이셨습니다. 다윗이 시편을 쓰고 그의 하프로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할 때 그의 손가락에 천사 같은 움직임을 준 것은 성령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의 잠언을 말하고 아가서를 부를 때 지혜의 말과 황홀한 찬양을 주신 것은 성령이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입술에 닿은 불은 무엇이었나요? 다니엘에게 다가온 것은 어떤 손이었나요? 예레미야를 그렇게 슬픈 가운데서도 평안케 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에스겔을 독수리처럼 신비한 공간을 날고 우리는 닿을 수 없는 웅장함을 보게 하신 것은 무엇이었나요? 목동이던 아모스를 선지자로 만든 이는 누구인가요? 누가 천하던 학개가 강력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도록 가르쳤나요? 누가 하박국에게 강 위를 달리는 여호와의 말과 전차를 보여 주었나요? 누가 나훔이 불같은 메시지를 전하게 했나요?  누가 말라기로 하여금 "저주"라는 단어로 성경을 끝맺음하게 했나요? 이 물음들 각각에 누가 계십니까? 성령님이 맞습니까? 이 성경의 인물들이 증거 하는 그분이 인격체가 아닐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21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말씀을 생각하면 우리는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역사하시는 것을 언제 중단하셨나요? 우리는 그가 여전히 그의 사역자들과 그의 모든 성도들을 다루시고 계심을 압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께서 "사도행전 13:2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하는 속성을 결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베드로에게는 "백부장에게 가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로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내시에게 세례를 베푼 빌립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바울에게는 "저 도시는 들어갈 수 없고 다른 곳으로 길을 돌려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도행전 5:4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는 말씀처럼 성령께 거짓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힘은 매일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받은 우리의 입술을 경이로운 말들로 풍성하게 하십니다. 그 힘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래 가진 것이 아닌 먼 곳에서 날아오는 새와 같은 생각을 주십니다. 저도 가끔 이상하게 느끼는 그 능력은 저에게 시적 능력이나 언변을 주시거나 전에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능력을 주시고 저를 동료보다 높여 주십니다. 그가 그의 사역자들에 입히신 그 위엄은 그들이 부르짖는 전쟁의 한가운데서 욥의 군마처럼 물속의 레비아단처럼 그들에게 역사합니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그 힘은 귀가 연결되었던 것인 양, 어떤 마술봉의 힘에 의해 빨려 들어가는 것인 양 우리를 앉아서 듣게 합니다. 그 힘은 어떤 인격체에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성령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분은 성령이라고 우리도 느끼지만 성경에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우리를 살리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에베소서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에게 첫 생명을 주시고 우리의 죄와 의, 다가올 심판의 판결을 내리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불을 붙이시고 그의 입김으로 바람을 불어 불이 살아있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 아니십니까? 만든 이 가 보호자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위해 일하시고 그들을 시내산 기슭으로 데려가고 골고다 언덕으로 인도하는 분은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이 모든 것을 하셨음에도 그가 여전히 한 인격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누군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분명히 바보나 하는 말일 것입니다. 이 바보들은 이런 일들이 영광스럽고 신성한 분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심각하게 고민할 수 있는 현명한 사람이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증거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느낌은 성령에 기인한 것으로, 그분이 실제로 한 인격체라는 가정하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에서는 성령께서 근심한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이사야 63:10에서도 성령께서 근심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사도행전 7:51에서는 성령을 거스를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러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그리고 사도행전 5:9에서는 성령을 시험할 수 있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이제 이런 것들은 어떤 자질이나 단순 발산에 기인하는 감정이 될 수 없고 어떤 인격체와 연관 지어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단순한 영향은 근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인격체만이 슬퍼하고, 근심하며, 분노하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까지 저는 성령의 인격에 대하여 핵심 되는 내용을 충분히 정리했다고 봅니다. 이제는 여러분에게 삼위일체 교리에 충실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아주 진지하게 말씀드릴까 합니다. 저는 이단으로 돌아서기 전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사역자였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 주님의 신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이후 몇 년 동안 이단성 교리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성경에서 아주 별나고 오랜 사역자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33:21,23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곳은 마치 노질하는 배나 큰 배가 통행치 못할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라. 너의 돛대 줄이 풀렸었고 돛대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었고 돛을 달지 못하였었느니라" 그 사역자가 말하기를 "이제 너는 삼위일체 교리를 포기했고 너의 돛대 줄이 풀려서 돛대 밑을 튼튼히 할 수 없다. 일단 세 인격체의 교리를 표기하면 너의 돛대 줄은 완전히 없어져 버린다. 너의 배를 지지해야 하는 돛대는 흔들리고 곧 무너져 버릴 것 같이 될 것이다" 삼위일체가 없는 복음은 꼭대기에 올려놓은 피라미드와 같습니다. 삼위일체가 없는 복음은 묶을 수 없는 모래로 만든 줄과 같습니다. 삼위일체가 없는 복음은 사실 사탄에게 뒤집힐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의 복음에는 지옥의 힘이 대항할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의 복음을 넘어뜨린다는 것은 비눗방울로 바위를 나누거나 깃털로 산을 반으로 쪼개는 것보다 더한 것으로 삼위일체의 복음을 넘어뜨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삼위의 인격체 대한 생각을 가지면 모든 신성의 핵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오직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 됨을 알면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에 대한 황금 열쇠입니다. 이것이 미로와 같은 미스터리를 푸는 실마리이고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만큼 빨리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II. 이제 두 번째는 우리의 구원 역사에 있어 삼위의 하나님의 연합입니다. 삼위의 하나님을 모두 언급하고 있는 성경을 찾아보죠.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세분이 언급되고 있는 세분 모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뭔가를 하십니다. "내가 구하겠으니"는 성자를 말씀하는 것이고 "너희에게 주사"는 성부 하나님을 말씀하는 것이고 보혜사는 성령을 말합니다. 이제 잠시 동안 이 놀라운 주제인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목적과 연관된 삼위 하나님의 연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내가 만들겠다"가 아니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셨습니다. 엘로힘 언약은 서로에게 "우리가 연합하여 함께 사람의 창조자가 되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세대가 지나간 이후에도 그분들은 "우리가 사람을 구원하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부께서 "내가 사람을 구원하겠다"가 아니라 삼위의 하나님이 함께 한뜻으로 "우리가 사람을 구원하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의 구원에 관여되시는 분이 삼위의 하나님 중 단 한 분이 아니라는 생각은 저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저를 구원하신다는 약속을 삼위의 하나님 중 한 분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삼위의 하나님이 함께 "우리가 사람을 구원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말씀에서 각 인격체가 별도의 일을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자께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중보기도를 뜻합니다. 성부께서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라고 말씀하심은 증여를 뜻합니다. 성령께서 보혜사로 우리와 함께하심은 초자연적인 영향을 말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삼위의 하나님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분들 중 한 분의 보좌 앞에서 밤낮으로 손을 들고 "주여 어느 때까지 입니까?"라고 외칠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 있는 보석과 우림과 둠밈이 있는 흉패를 볼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약속과 언약을 저버리지 마십시오"라며 성부께 간절히 구하고 있는 그분을 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슬픔과 비통함을 대신 말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들의 중보를 버리시거나 그의 중보에 무관심한 성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시고 그의 모든 간구를 허락하시는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내내 성령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누워서 쉬고 계신가요? 아 아닙니다. 그는 지상의 모든 곳을 다니시며 지친 영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로 오라 그가 너를 쉬게 하실 것이다". 그가 눈물이 가득한 눈을 만날 때면 우는 자로 하여금 십자가의 위로를 찾게 하십니다. 그는 세파 시달려 지친 믿는 자를 보시면 그의 영혼 키를 잡으시고 위로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는 마음이 상한 자를 도우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십니다! 그리고 그의 긍휼 하심의 사명에 따라 전 세계 다니시므로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십니다. 삼위의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일하시는지 붙잡으십시오. 그래야만 하지만 "성자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성자께서 성부 이상으로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부께서 엄청난 폭군이며 그를 자비롭게 하기 위해 성자께서 죽어야만 했었다는 상상도 하지 마십시오. 성부의 사랑이 그의 사람들에게 흘러가도록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 아닙니다. 삼위 한 분의 사랑은 다른 하나님의 사랑만큼 큽니다. 삼위의 하나님은 선택받은 자들을 저주에서 구원하기 위한 위대한 목적 아래 함께 연합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제가 축복된 삼위일체를 말씀드린 본문에서 다른 것도 주목하셔야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삼위의 하나님이 서로 다른 하나님에 대해서 약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자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아마도 "알겠습니다. 저희는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라고 하신 것은 성부를 대신하여 확약하신 것입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는 말씀에도 성령을 대신한 약속이 있습니다. 한 하나님이 다른 분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들 간에 어떤 합의가 없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한 분은 구원하기를 원하는데 다른 분이 그렇지 않다면 다른 분을 대신해서 약속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자가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성부께서 들으시고, 성부께서 무엇을 약속하셨든지 성령께서는 일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영혼에 무엇을 불어넣으시든지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삼위의 하나님은 서로에 대신하여 함께 약속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확약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하나님뿐만 아니라 삼위의 하나님에 의해서 죽음과 지옥의 손이 닿지 않는 안전한 곳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삼겹줄의 안전함이 있는 것입니다!

 

III. 우리의 세 번째 요점은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앞서 언급한 두 가지가 순수하게 교리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번 주제는 경험에 대한 것입니다. 성령의 내주 하심은 너무 심오하고 인간의 내면과 아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진실되고 참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한 오랜 사역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한 캠브리지 대학교 연구원에게 자신이 일평생 배워 본 적이 없는 한 언어를 이해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기를 "저는 헬라어도 라틴어도 모르지만 가나안의 언어를 말할 수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가나안 말을 조금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이스라엘 혈통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하늘나라의 상속자도 아니기 때문일까 바 아주 두렵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께서 성도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보혜사를 보내셔서 성도 안에 거하시며 함께하실 것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회를 세웠던 이그나티우스는 "저는 성령님과 함께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테오포로스 또는 하나님을 품은 자로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품은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성령님의 성전인 것을 모르십니까? 성령님은 여러분 안에 거하십니다! 성령께서 거하지 않으시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가 말을 잘하고 신학을 이해하고 건전한 칼빈주의자가 될 수도 있지만 그가 좋은 옷을 입은 세상의 자녀가 될 수 있을지언정 살아있는 자녀는 아닙니다. 그가 심오한 지성과 폭넓은 영혼과 마음, 자연의 모든 비밀을 파고들 수 있는 풍부한 상상력을 갖고 독수리 조차 보지 못한 길을 알며 사람들이 닿을 수 없는 깊이를 갈 수 있다 하더라도 그의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 하셔서 그와 영원히 거하심을 이해하지 않는 한 그의 모든 연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광신주의라고 부르며 "당신은 퀘이커 교도 아닙니까? 왜 조지 폭스를 따라가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르는 사람을 따를 것입니다. 그의 기이한 행동들에도 불구 그 조차도 많은 경우 실제로 성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의 영 아래 안식하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면 언제나 제 안에 있는 영은 그 사람 안의 영을 듣기 위해 뛰어내리고 그는 우리가 하나임을 느낍니다. 그리스도인의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영은 다른 이의 영을 인식합니다.  저는 제가 좋은 분이라고 여기는 어느 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분의 이야기는 우리가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지 아닌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그분이 이 자리에 계셨으면 좋겠는데 이 말씀을 꼭 들으셨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17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여러분도 여러분 안에 성령이 계시는지 여부를 모르십니까? 저는 제가 살아있는지 여부를 알 수 없을까요?  만약 제가 전기에 감전된다면 제가 그것을 모를까요? 저는 분명히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 충격은 제가 어디에 서있는지를 알게 할 만큼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면, 내 가슴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면, 성령님을 모시고 내 몸을 성전으로 만들었다면 과연 제가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원한다면 그것을 광신주의라고 부르십시오. 그렇지만 저는 저희 중에 어떤 분들은 항상 또는 일반적으로 성령의 영향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게 되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구합니다.  우리가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때는 성령께 지혜를 구합니다.  우리가 의기소침할 때면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내주 하심의 놀라운 능력을 모르십니다. 성도가 죄 된 것을 만지려 할 때 그 손을 거두시는 것. 안목의 정욕을 뿌리치도록 하는 것. 미끄러운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발을 붙드는 것. 유혹으로부터 마음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성령의 내주 하심에 대해서 모른다면 그것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입니다! "마태복음 12: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영향을 멸시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이 주제를 정리하기에 앞서 저를 아주 기쁘게 하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제가 이 부분을 놓치고 넘어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아르미니우스 주의자가 이곳에 있다면 제 설교를 끝낼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르미니우스 주의자가 "영원히"라는 단어를 다루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그는 "영원히라" 하면서 중얼중얼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코 그것을 한 번에 풀어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번역이 잘못되었다"라고 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불쌍한 사람은 원본도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할지도 모릅니다. 오! 그렇지만 고맙게도 우리는 그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일단 저에게 성령을 주시면 "영원히"가 없어지는 날까지 결코 그를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IV. 이제 우리는 세상이 왜 성령을 거부하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간단히 다루면서 마칠까 합니다. "요한복음 14:17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라고 말씀하셨지요. 여러분은 "세상"이 의미하는 바를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주권 아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할 때 제외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택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떤 엄청난 판결에 의해서 심판받은 타락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사람들을 선택하실 때 주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육신의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은 스스로 이 신성한 영향력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라는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의 세계는 성령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을 멸시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비웃는 이유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세상 사람에게 "나는 내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다"라고 말하면 그는 "나는 볼 수 없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만질 수 있는 무언가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한 크리스천 노인과 믿지 않는 의사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을 들어 보셨나요? 그 의사는 영혼이 없다고 했고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영혼을 본 적이 있습니까?" 크리스천은 "아니오"라고 말했습니다. "영혼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영혼의 냄새를 맡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영혼을 맛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그러면 영혼을 느낀 적은 있습니까?" 크리스천이 대답합니다 "예, 저는 제안에 그분이 계신 것을 느낍니다" 그 의사는 "글쎄요, 네 가지 감각으로는 알 수 없고 오로지 한 감각이네요" 노인이 말합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고통을 본 적이 있나요?" "아니오" "고통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고통의 냄새를 맡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고통을 맛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그러면 고통을 느낀 적은 있습니까?" 그 의사가 대답합니다 "예, 저는 제 생각에 고통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성령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성령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령을 느낍니다. 당신은 그것을 광신적이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결코 그를 느낄 수 없다고 합니다. 당신이 저에게 꿀이 쓰다고 말하는 것을 가정해 보죠.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니오, 저는 당신이 꿀을 맛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한번 맛을 보세요." 성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그의 영향을 느꼈다면 당신은 더이상 그분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성령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에도 우리가 볼수 없는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바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그러나 당신은 바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허리케인은 사람이 사는 집을 통째로 날려버리기도 하고 저녁의 부드러운 산들바람은 꽃을 만지면서 장미꽃에 진주 왕관 같은 이슬방울들을 맺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전기를 본 적은 있습니까? 아니오. 그렇지만 당신은 전기가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소식을 전하는 것을 압니다. 당신이 뭔가를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우리의 감각의 한계가 있지만 우리 안에서 의지와 행동 모두를 위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성령에 대한 교리를 비웃는 마지막 이유는 바로 그들이 그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진심 어린 경험을 통해 그것을 알았다면, 만약 그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영혼을 통해 일하시는 그분을 인정했다면, 만약 그들이 죄를 자각하고 떨림으로 마음이 녹았었다면 그들은 결코 성령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분은 여러분 안에 거하시고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은 모든 믿는 자 안에 거하시며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달콤한 기억으로 마무리할까 합니다.

 

저는 주의 성도와 죄인들을 향한 조언과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이 아침 성령 하나님이 한 인격체라는 것을 들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통해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다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성령을 위한 기도뿐만 아니라 성령에 대한 기도에 대해서 여러분 왜 그렇게 진지해야만 할까요? 이런 추론이 있다고 가정해 보죠. 여러분은 여러분의 기도를 성령께 올려 드려야 하고, 그분에게 간절히 부르짖어야 하며 그분은 여러분이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풍성하게 응답하실 수 있다는 가정입니다. 이 사람들을 보는가? 무엇을 바꾸려는 것일까? 내 영향력을 사람들에게 스며들게 하려는 이 무리를 보는가? 여러분은 이곳이 이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심을 아십니다. 이 영향력은 이 도시뿐만 아니라 크게는 영국에까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강단뿐만 아니라 언론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연말이 되기 전에 제 말했던 것, 글로 쓴 것들이 2만 여부 배포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향력을 어떻게 좋게 만들 수 있습니까? 그것을 통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더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을 까요? 꾸준히 성령 충만하도록 끊임없는 성령을 위한 기도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배포될 각 장마다 각장의 단어마다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수고를 알아주시고 모든 교회가 부흥되며 교회 자체뿐만 아니라 세계로 유익이 나누어지도록 성령께 두배로 간구합시다. 

 

그리고 아직 믿지 않는 분들에게 마자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령에 대해서 말할 때는 항상 조심하십시오. 저는 용서받지 못하는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마태복음 12: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라는 말씀과 같을 것입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모르지만 조심스럽게 걷습니다! 거기에는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의 무지라는 모래로 덮인 함정입니다. 조심스럽게 걸으십시오. 다음 시간 이전에 그 함정에 빠져 있으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심란하면 아마도 술집에 가서 그것을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어떤 음성이 여러분의 영혼에게 말을 하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에 저항하고 그래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딘가에 있습니다. 정말 조심하세요. 오! 성령을 거스르는 범죄만큼 어두운 죄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성부 하나님을 모독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심판받을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을 모독하고 용서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한다면 주께서는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이해한다고 공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있습니다. 그것은 위험 신호입니다. 멈춰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령을 경멸하고, 성령의 계시를 비웃고, 크리스천들이 그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을 조롱했다면,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당장 멈추십시오. 이 아침 아주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의 누군가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실제로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멈추십시오! 두려움이 여러분을 멈추게 하십시오. 앉아서,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급하게는 가지 마세요. 그런 죄에 빠져 계신 분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험한 말을 하셨던 분들은 그만 멈추십시오! 

 

아, 이것은 저희 모두를 멈추게 합니다.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아마도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겠지?" 우리 모두 이것을 생각하고 말로나 행동으로 성령 하나님을 가볍게 다루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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