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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자 : 1855년 6월 10일 주일 아침

■ 설교 장소 : 런던 사우스워크의 뉴파크스트리트 교회(New Park Street Chapel)

■ 설교자 : THE REV. C. H. SPURGEON

■ 설교 제목 :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에게 자신을 나타내심, Christ Manifesting Himself to His People

■ 본문 참조 사이트 : https://www.spurgeongems.org

■ 설교 내용 :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요한복음 14: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말로 훌륭한 스승님이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곁을 내주셨습니다. 나사렛 사람이기도 하셨지만 생명과 영광의 주님이셨고 크고 위대하신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난한 제자들, 어부들과 마치 그들과 동일한 계층과 질서에 있었던 사람인 것처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지위를 자랑하는 세상의 고관들과 같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마치 다른 사람과는 다른 부류인양 다른 사람들 위에서 걷고, 여러 가지 형식적인 것을 걸치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어떤 성직자들과 같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그의 제자들에게 아버지가 자녀에게 대하듯 말씀하셨고 심지어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하는 것보다 더 친절하게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격의 없게 대하는 것을 꾸짖는 대신에 아주 단순한 질문도 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질문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에 친절하게 답하셨습니다.


빌립은 예수님과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그분을 곤란하게 할 수 있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요한복음 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보여 주실 수 있는 것처럼, 다시 말해서 빌립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실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친절하게 답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9-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그리고, 이제 본문의 가룟인 아닌 유다가 와서 아주 단순하고 쉬운 질문을 합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를 꾸짖는 대신에 단순히 다른 주제로 넘어가셔서 가장 현명하게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설명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침묵으로 가르쳐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령께서는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과 혼동되지 않도록 하셨다는 인식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가룟인 아닌 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우리의 주님을 배반하고 팔았던 사람이고 다른 유다는 유다서를 쓴 유다라고 불려야 할 마땅한 사람입니다.


어떤 분들은 유다라는 이름을 읽으면서 "아! 저 질문은 배신자 유다가 한 것이구나!"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는 그런 착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이름이 후대에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어리석은 소망이 아님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 모두는 흠이 없이 사람이 되기를 바라야 합니다. "잠언 10:7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 우리는 이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야 합니다.


저는 제 이름이 교수형에 처해진 어떤 범죄자의 이름으로 오해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제 이름이 실수라도 불명예의 달력에 올라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혹여 잘못 알려지더라도 언젠가 제가 주의 영광을 위하여 정직하게 노력했다는 것이 알려질 것이고, 하나님은 "가룟인 아닌 유다"라고 결국 그 사람은 속이는 자가 아니었다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유다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중요한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여기에는 사실과 질문이 있습니다.

I. 우선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자신의 사람들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셨다는 위대한 사실이 있습니다.


비록 말씀에서는 명시적으로 그 사실이 진실임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말씀에 있는 질문에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마음에 쓰인 성경이 있습니다. 바로 경험의 성경입니다. 그 성경이 이 사실이 참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이 거듭나지 않았을 상태에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특별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주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경험했는지 말입니다.


저명한 성인들의 전기를 살펴보면 예수님이 그들의 영혼에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말씀하신 것과 그분의 놀라운 인격을 펼쳐 보이신 것 그리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분의 영광을 깨닫게 하신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천국에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영혼은 행복에 젖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천국 가까이에 있었지만 천국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나타내실 때는 그것은 땅에 있는 어린 천국이며 뱃속에 있는 낙원, 영화된 이들의 행복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백성들이 존경의 눈으로 보는 가운데 완벽하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가 되면 그 행복은 완성의 단계에 이르고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처럼 되고 그분이 계신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아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아니 그분의 백성에게만 허락하신 특별한 나타내심에 대하여 나누어 볼까 합니다. 네 가지로 살펴볼까 합니다. 첫째로 대상이 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게는"이 아니라 "우리에게는"이라 했습니다. 둘째로 때에 대한 것입니다. "어찌하려 하시나이까?"라 했습니다. 주께서는 그냥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려 하시나이까?". 여기에는 특별한 때가 있습니다. 셋째로 놀라운 나타내심에 대한 몇 가지 발언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넷째로 이 나타내심이 우리의 영혼에 미칠 영향을 잠시 살펴볼 것입니다.


1. 그렇다면,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은총 받은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본문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놀라운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은총 받은 사람들은 세상에 속해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여러분이나 저나 그들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상상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세계에서 온 영으로 하여금 이 사람들을 누구인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 영이여! 명령을 하나 내리겠다. 이 세상에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가서 찾아보고 돌아와서 그들이 누구인지 나에게 말해다오.


영에게 시간을 주니 영은 세상을 날아다니다 돌아와서 말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하나의 공통된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서로를 맹렬히 추격하며 서로를 짓밟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각자가 원하는 뭔가를 위해 분주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군중 속에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몇몇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강한 반대를 헤쳐 나가면서 군중들의 흐름과 정반대로 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니 군중들의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이마에는 '자아'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지만, 반대 방향으로 헤쳐 나가는 사람들의 이마에는 '그리스도'라고 새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자주 듣는 독백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저는 그 사람들을 주목했습니다. 그들이 모든 도전에 맞서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추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반대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는데, 그들 앞에는 작은 문이 있었고, 그 위에는 '죄인 중의 괴수인 자에게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거기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목적지까지 따라가 보니 그들은 구원의 벽을 따라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죽음 속에서 팔을 접고, 평온하게 눈을 감는 것을 보았습니다. 천사들이 진혼곡을 부르는 것을 들었고,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분명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이여, 네가 옳은 말을 하였구나. 이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무엇을 보았느냐? 그들은 모여서 함께하고 있던가? 아니면 다른 세상 사람들과 섞여 있던가? 영이 말합니다. "저는 그들이 일주일에 한 번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어떤 장소에 모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찬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경건하게 무릎을 꿇었는데 그 집에서도 그랬지만 사적으로도 무릎을 꿇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신음과 싸움과 고통을 목격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기도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조용히 모여서 주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 행하신 일을 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악한 자들과 함께 있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들어가지 않을 어떤 곳을 보았는데 길 모퉁이에서 많은 등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건물 앞에는 신비주의 카발라 표식, 저주와 악행의 표시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악한 자들이 이리저리 비틀거리고 있었는데 술에 취해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손으로 눈을 가리며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또한 또 다른 지옥의 소굴도 살펴보았는데 그곳에서는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장면이 펼쳐 있었습니다. 거룩한 노래는 들리지 않았고 흥청거리는 외침과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곳을 둘러보았는데 그곳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복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저들은 저들의 짝을 찾아갔고 같은 나무 아래에 둥지를 짓고, 같은 지붕 아래에 거쳐를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영은 말을 이어갔습니다. "저는 그들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외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시편 101:7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그는 거짓말하는 자를 쫓아내고 거짓 행하는 자가 자신에게서 떠나가도록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들을 주목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택함 받고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민수기 23:9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고 기록된 바로 그 사람들임을 확신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영이여, 그 사람들을 제대로 표현했구나. 그런데, 저는 그런 사람들이 여기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주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사람들입니다. 주께서는 자신을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셨죠. 그들은 원칙, 행동, 대화, 욕구, 목표 또는 목적에 있어서 세상적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저에게 더 이상 일반 은혜나 일반적인 나타나심에 대하여 말하지 마십시오. 저는 제게 힘이 있는 한,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하는 말씀을 접하는 한, 특별한 사람들을 향한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선포할 것입니다. 


2.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특별한 때에 관한 것입니다. 이렇게 큰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똑같이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항상 주의 얼굴의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분의 백성들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특별한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는 일반적으로 책임의 때와 시험의 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저는 게으르거나 그저 그런 그리스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임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자신을 자신의 일에 전적으로 바친 사람이 영적인 나타나심에 대하여 풍성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구원할 만큼의 종교는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영적이고 특별한 그리스도인의 축복을 누릴 만큼은 아닌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하는 것이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은총을 내리시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앉아서 팔짱을 끼고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방에 들어가 전능하신 분의 임재를 누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가장 열심인 사람들은 주의 긍휼을 가장 잘 분별하고 주님으로부터 가장 풍성한 축복을 누립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언제가 가장 행복한지 물어보면 그는 최선을 다해 사역할 때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제가 그렇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아직까지는 쉬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쉬려고 하면 틀림없이 쉼이 아닌 다른 것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님의 이름을 전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면 제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것 같고, 다시 설교단에 오르기까지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최선을 다해 사역하면 가장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더 깊이 팔 수록 더 좋은 물을 얻고 가장 수고한 사람이 가장 좋은 빵을 얻는 법입니다. 이처럼 땀방울은 좋은 빵을 얻게 하는 축복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더 수고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창 49:14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하셨는데 잇사갈과 같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에게는 "잠언 26:3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라는 말씀이 딱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징계를 받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진미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그에게 꿀이든 그의 몫을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내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이므로 너의 빵을 내 그릇에 담가 놓았다. 가져다 먹어라"


사역의 때가 있을 것이지만 이미 말씀드린 대로 시련을 겪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사역에서 벗어나 있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의 아픈 시간이 여러분에게 잃어버린 시간에 그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 시간을 잘 견딘다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에게도 유익일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는 말씀을 모르십니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은 머리와 모든 지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머리는 어느 정도 고통의 겪으셨고 그 고통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몸도 견뎌야 할 어느 정도의 고통이 있고 여러분이 그 고통을 많이 겪을수록 다른 누군가가 받을 고통은 적어질 것입니다. 천국에 가기 전까지 모든 교회가 견뎌야 할 시험의 분량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던 것처럼, 그분의 모든 백성도 그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섞은 것이 가득한 잔이 있는데, 의로운 자는 반드시 그것을 마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한 모금씩 마시지만, 우리 중 한 사람이 참으며 죽 들이마실 수 있다면, 다른 동료들에게는 그만큼 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고난의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가장 많이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우기 전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바위에서 물을 주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천사가 얍복 강가에서 그와 씨름을 했고 수많은 천사들이 마하나임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보통 시련 오기 전에는 기쁨의 시기가 있고 그 기쁨의 시기가 끝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위험을 예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많은 기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시련이 오면, 그 시련에 있는 기쁨을 기대하십시오. 왜냐하면 보통 우리의 고난은 우리의 기쁨에 비례하고, 또 우리의 기쁨은 우리의 고난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슬픔의 그릇이 쓸수록, 위로의 잔은 더 달콤한 법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시련이 무거울수록, 다음 세상에서의 영광의 면류관은 더 밝을 것입니다.


사실 히브리어 카보드(kabod)라는 단어는 무게와 영광을 모두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의 무게는 영광입니다. 그에게 영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광은 무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을 주님의 발 앞에 숙이고 엎드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에게 호소하며 묻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많이 뵌 적이 언제입니까? 기쁨으로 정원을 거닐 때입니까? 아니면 쓰디쓴 약을 입에 머금고 있을 때입니까?


여러분은 풍성하고 일이 술술 잘 풀릴 때보다 고통으로 괴로울 때 예수님을 더 잘 보지 않으셨습니까? 창고가 가득 차고, 기름통은 터질 정도이고, 포도주가 넘칠 때는, 하나님의 성소는 종종 방치되고 하나님의 사랑의 사역자들은 거의 무시됩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않고 우리에 가축이 없을 때는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분의 자녀들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오시고 그들에게 자신을 가장 많이 드러내시기도 합니다.

 

3.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의 놀라우신 나타내심 그 자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수많은 주의 나타내심이 있지만 이것은 가장 귀중한 나타내심입니다. 우리가 결코 다시는 겪고 싶어 하지 않는 나타내심도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깨어났을 때 우리의 죄성을 발견하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 드릴뿐 그것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가 매일 원하는 나타내심이 있습니다. "요 14:21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은 이것을 다른 방법으로 행하십니다. 저는 오랜 시간 겟세마네에 있었던 예수님의 고통의 나타내심을 가졌었습니다. 수개월간 그분의 고뇌에 대하여 깊이 묵상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라는 쓰디쓴 풀을 먹고 기드론 시내의 검은 물을 마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때때로 저는 홀로 계단을 올라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하셨던 모습 그대로를 취해봅니다. 그분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분과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땅으로 떨어지는 피땀을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통 중에 계신 나의 구세주를 바라보며 언젠가는 그분께 더 가까이 다가가서 갈보리에서 마지막으로 외치셨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들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여러분 중에도 마치 실제 눈으로 보는 것처럼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여러분의 구세주를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머리에 있는 가시 면류관과 그곳에서 얼굴로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보았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외침을 듣고 피 흘리는 옆구리를 보셨을 것입니다.  박힌 못을 보고는 바로 달려가 못을 뽑아내고는 그분의 몸을 내려 눈물로 씻고 세마포와 향품으로 싸고 귀한 향유를 부으셨을 것입니다.


다른 때에는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 가운데서 그분의 나타나심을 만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께서 베풀어 주신 희생 제물을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는 그 희생 제물과 타서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여러분은 주께서 여러분을 의로움으로 입혀주신 것을 분명하게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보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놀랍도다, 내 영혼이여, 잘 차려입었구나
위대하신 삼위의 하나님께서 해주셨구나;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하여
가장 아름다운 찬양을 올려드리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로 인하여 아주 큰 기쁨을 누리셨던 때들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분이 사탄 위에 한 발을, 다른 한 발은 죽음 위에 딛고 승리하신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그분이 그분 뒤로 수많은 빛나는 무리와 함께 하늘로 행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여러분은 그분의 대적들이 그분의 발판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이 당신의 영혼에 나타내심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때때로 시간의 날개 보다 높이 날아서 우리가 미래를 현재로 가져올 수 있게도 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흰 왕좌에 앉으셔서 홀을 잡으시고 주의 성도들이 주 앞에 서서 찬양을 올려 드릴 때의 그 위대하고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게도 합니다. 제가 조금 더하면 아마 저는 광신주의자로 비난받을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리스도인이 천국 바로 옆에 사는 때가 있다고 믿을 것이고 믿어야만 합니다. 제가 천국문 근처에 간 적이 없었다면 저는 여기에 없습니다. 제가 때때로 천국에서 영화롭게 된 자들의 향로에서 나는 냄새를 맡지 않고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듣지 않았었다면 저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높은 산에 올랐을 때 그리고 보좌에서 울리는 감미로운 음성을 들었을 때의 황홀한 기쁨을 누리는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나타나심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그런 경험이 없다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저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그런 경험이 있다고 믿습니다. 많은 사역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주의 나타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에게는 주어질 것이고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의미를 알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테넌트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저녁 설교를 앞두고 잠시 산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숲을 걷고 있었는데 그리스도 임재를 너무도 강하게 느꼈습니다. 바로 그분의 나타나심이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고 교인들은 설교자를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테넌트 목사는 몇 시간 동안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그를 깨웠을 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인양 얼굴은 환하게 빛났습니다. 그는 죽는 날까지 그 만남의 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를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는 그곳에 계셨고 가장 친밀한 방식으로 마음을 맞대고 그와의 만남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놀라운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것에 대하여 많이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아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적인 길을 멀리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더 많이 가르치시고 더 깊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호세아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4. 그렇다면, 이러한 영적인 나타내심의 자연스러운 효과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 효과는 겸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이러저러한 영적 교제를 가졌으므로 나는 위대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아무런 영적 교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편 138:6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 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겸손하지 않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시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그들에게 어떠한 사랑의 교제도 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영적인 나타내심은 사람에게 행복을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가까이 사는 사람은 분명 행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적인 나타내심은 사람에게 거룩을 줄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 나타내심을 경험한 적이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것을 공언하지만, 그의 행동이 그가 말한 것에 부합하는지 보지 않는 한 아무도 믿지 마십시오. "갈라디아서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나님은 악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한 사람을 버리시지도 않으시지만 악한 자를 존중하지도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가까워지면 세 가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영문 H로 시작하는 겸손(humility), 행복(happiness) 그리고 거룩(holiness)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이것들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II. 이제 두 번째로 흥미로운 질문에 대해서 나누어 보겠습니다.


유다는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라고 했는데, 이 질문은 어떻게 하게 되었고, 어떻게 대답되었나요?


첫째로, 그것은 무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불쌍한 유다의 생각은 이런 것이지요. "어떻게 예수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실 수 있으시지? 대체 왜? 만약 그가 다시 내려오신다면 우리뿐만 아니라 세상도 그를 볼 것인데 말이야. 어떻게 그러실 수 있을까? 그가 불의 전차를 타고 나타나시거나 구름 기둥으로 내려오신다면 우리처럼 세상도 그를 볼 거야." 그래서, 불쌍한 유다는 아주 무지하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주님?"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그의 너그러움 때문에 그런 질문을 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 주여 어떻게 자신을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실 수 있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약간 아르미니안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기를 원했고,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말한 것이지요. "오 주여, 저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저의 너그러움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게 한 것입니다."


아!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결코 하나님보다 더 자비로울 수도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죄인이 구원받는다면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죄인이 그분을 영광스럽게 할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수는 그분께 맡기고 우리 일이 아닌 일 간섭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잠언 20:3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자들입니다. 어찌 되었든 유다는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추측은 아마도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 주님, 제 생각에는 주께서 오셔서 오 세상의 왕이 되시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냥 몇몇의 왕이신 것 같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 세상에 미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구주의 왕좌를 보기를 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분 앞에 절하기를 바랐고 그것은 아주 정당하고 칭찬할만한 바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주여 어찌하여 온 세상을 무릎 꿇게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결코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질문을 할 수는 있겠지만, 저 세상에 갈 때까지 우리는 그 답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아마도 존경심의 발로로 했을 것 같습니다. "오! 어떻게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뭐지? 그저 여기 있는 베드로의 동생일 뿐인데. 그냥 어부야. 요한은 뭐지? 그도 또한 어부일 뿐이야. 마태는 세리였고 수백 명을 갈취했었지. 삭개오로 말하자면 수많은 과부의 집을 삼켰던 인물 아닌가? 그런데 당신은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까? 죄인 마리아가 서 있습니다. 대체 그녀는 무엇을 했기에 당신이 그녀에게 자신을 나타내셔야 하셨습니까? 그리고 일곱 귀신을 가지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가 있습니다. 주여, 어떻게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시려 하십니까?"


이것은 우리가 종종 우리 영혼에 물었던 질문 아닙니까?


"내 영혼아 멈추어라, 경배하고 탄복하라.
여쭈어보라, 오, 왜 나 같은 이를 사랑하셨는가?"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은 이것이죠


"나를 구주의 가족으로 만든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로다"


저에게 오셔서 "선생님, 제가 왜 크리스천인가요? 왜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나요?"라고 물어보신다면 저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왜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나요?"라는 물음에 제가 또다시 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15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는 존경의 마음으로 여기에 서서 "주님, 왜지요, 주님, 왜 세상에 가 아니라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세상보다 더 낫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유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 수많은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나은 사람들이죠! 그런데, 본성적으로 세상보다 나은 사람들 맞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들 중의 몇몇은 더 나쁜 일을 했을까요? 여기 계신 분들 중의 몇몇은 다양한 형태로 지었던 자신의 죄를 일어나서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자기를 세상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주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신 은혜에 대하여 끊임없이 놀라워할 것입니다.


그런데, 답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왜 자기를 일부에게만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셨습니까? 그 질문에는 답이 없었습니다. 답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께서는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주님은 유다에게 왜 자신을 그들에게만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시는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종종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사람에게는 나타내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으신다고 말하는데, 왜 그런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글쎄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답하지 않으셨고, 저는 그분이 하신 것보다 더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신이 그것에 어떤 반대가 있으신지 묻고 싶네요.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로마서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시비를 건다면 "로마서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라고 하십니다.


누군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왜 저를 낳으셨죠?"라고 묻습니다. "나는 하나님도 아니고 내 마음대로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니?" 반대자가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는 나타내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불공정한 것 아닌가요?" 하나님께서 답하십니다. "네가 나를 불공정하다고 하는가? 대체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내가 너에게 빚진 것이 있는가? 계산서를 가져오면 지불해 주마. 내가 너에게 은혜를 빚졌는가? 그렇다면 은혜는 은혜가 아니다. 그냥 빚일 뿐이다. 만약 내가 너에게 은혜를 빚졌다면, 너는 그것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왜 제 동생이 주의 나타내심을 받는 거죠? 그는 저만큼이나 나쁜 사람입니다" 왕께서 대답하십니다 "물론 그렇지, 그렇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줄 수 있다" 문 앞에 거지 둘이 있는데, 하나는 그냥 돌려보내고 다른 하나에 무언가를 줄 권리가 없습니까?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습니까? "로마서 9:15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반대자가 말합니다. "그런데요, 제가 구하고 간청한다면 그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7: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라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지만, 제가 받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는 한 저는 그것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구하라고 기록되어 있지. 그리고 수단은 목적을 따르는 법이지. 내가 너를 이끌지 않는 한 너는 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나에게 불의를 말하지 마라. 너는 내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겠다고 약속한 내 말을 찾아보기를 바란다. 추악한 인간아! 네가 나를 대적했는가? 그렇다면, 너의 운명은 영원히 지옥으로 보내지는 것이다. 그럴만하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감히 나를 공정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너는 대체 무엇이냐? 만약 내가 교수대에 50명을 올려놓고 일부만 용서하고 나머지는 모두 처벌할 권한이 없다는 말인가? 너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반대자가 말합니다. "아니오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친구여, 그렇다면 이것을 인정할 때까지 구원은 기대하지 말게나"


이 자리에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의 교만이 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만을 설교한다면 어떤 이들은 "저 사람은 율법폐기론자이고 극단주의자야"라고 할 것입니다. 저희는 그런 비난을 경멸하며 그런 비난은 스스로에게 하라고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는 그들이 바로 율법폐기론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의 보좌 앞에 나아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마도 주께서 제 간구를 허락하실 걸요
아마도 주께서 내 기도를 들으실 걸요
제가 죽는다 하여도 저는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에서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은 이것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 저는 몇몇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할지 압니다. 그들은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말도 안 돼! 우리는 종교가 사람들을 질서 있게 하는데 아주 좋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런 나타나심과 환상은 믿지 않아" 좋아요 여러분. 저는 조금 전에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어떠한 나타내심도 없었으므로 여러분 스스로 세상 속에 있는 존재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우리는 이런 나타내심에 대하여 많이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몇몇 그리스도인이 계십니다. 저도 그것을 압니다. 교회는 지난 몇 년 동안 야위고 굶주린 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특별한 것들을 설교하는 설교자들을 거의 보내시지 않으셨고 교회는 점점 더 낮아지고 있습니다.


썩어가는 덩어리 위에 하나님께서 뿌려주신 소금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될지 저는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높은 곳에서 있었을 수 있지만 우리 중 일부는 낮은 곳에서 살아왔습니다. 누군가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살아왔을지 모르지만 또 누군가는 바카 계곡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는 좋은 산 위에 집을 지을 수만 있다면 골짜기에 머무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이 아침 일어나십시오! 다시 한번 여러분의 발에 빛으로 신을 신기십시오. 가볍게 고난의 평원을 가로질러서 갈보리 언덕에 이르고 정상을 향해 오르십시오. 갈보리 언덕에서 평원 너머로 천국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비스가 정상에 닿을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이 노래할 것입니다.


"넘실거리는 파도 너머 아름다운 들판
싱그러운 푸른 옷을 입었네"


그리고 여러분은 영혼은 아미나딥의 전차와도 같을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아직 영적인 나타나심을 경험하지 못하셨다면 구하십시오. 또한 이미 누리고 있다면 더 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계시만큼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고 천국에 맞도록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오! 우리가 누리는 것을 멸시하는 자들이여! 저는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당신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여러분이 갖는 첫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그분이 불 가운데서 나오셔서 그 대적들에게 보응하시는 때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분이 긍휼과 사랑 가운데서 나타나지 않으신다면 그분은 공의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시내산에서 그분을 뵙기 전에 갈보리에서 그분을 뵐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을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뵙지 전에 죄인들의 구세주로 붙드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셔서 여러분을 이러한 나타내심으로 끊임없이 인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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