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전글("바이블타임 도움말 번역 -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 "바이블타임 도움말 번역 - 성경 공부의 기초들")에 이어서 도움말 번역 과정의 마지막 결과물을 공개합니다. 성경 공부 요령은 다음과 같이 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번 포스팅은 그중에 3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
성경 공부의 기초들
성경 해석의 규칙
3장. 성경 해석의 규칙
우리는 바른 해석의 기본으로 "3C"다루었습니다: 내용(Content), 문맥(Context), 상호참조(Cross-reference). 우리는 이제 이것을 성서 해석학을 간단히 다루는 것으로 확장하고자 합니다. 성서 해석학의 목적은 원저자(와 하나님)가 의도하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한 구절에 대하여 유효한 많은 적용이 가능하지만, 해석은 단 하나만이 유효합니다. 성경 자체에서 개인적 해석이 가능한 말씀은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벧후 1: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특정 규칙들은 정확한 의미를 찾는 쪽으로 도움을 줍니다. 반면에 이러한 규칙을 무시한 사람들은 스스로 뿐만아니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까지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벧후 3:16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어떻게하면 원저자가 의도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의미가 명쾌하지 않은 구절을 만났다고 가정해 보세요. 여러분은 그것을 어떻게 푸시겠습니까? 다음의 규칙들을 기억하세요:
우리가 단어의 정확성과 원래의 의미에 정밀하게 다가설수록 우리느 좀더 나은 해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다음의 단계를 따라서 핵심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보세요:
정의. 헬라어나 히브리어 사전의 정의를 찾아보세요. 동사의 경우, 시제도 중요합니다.
상호참조(Cross-reference). 말씀과 말씀을 비교해 보세요. 동일한 헬라어 단어나 히브리어 단어가 성경에서 어떻게 쓰였는지 보는 것은 정의를 명쾌하게 하거나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같은 저자가 이 단어를 다른곳에는 어떻게 사용했는지? 다른 저자는 이 단어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물론 여러분이 참고하는 도구들은 단어의 비성경적 문서에서의 사용 사례를 줄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는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찾아야만 할까요? 한글이나 영어 단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걸까요? 그 이유는 하나 이상의 헬라어 단어들이 하나의 한글 단어로 번역 될 수 있고 헬라어 단어들은 의미의 미묘한 차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 20:17 "나를 만지지 말라" 냉엄하게 들립니다. 그렇지 않나요? 예수께서 부활 하신것, 너무 거룩한것, 또는 뭔가를 지금은 손대지 말았으면 하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맞지 않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피로스 조디에이츠의 The Complete Word Study New Testament (AMG Publishers, 1991)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정의: 요 20:17로 가서, "만지지" 단어 위를 보면 "pim680"를 볼 수 있습니다.스토롱 사전을 참조할 수 있는 숫자입니다. 정의를 살펴보죠."680. 합토마이; 합토에서 유래(681), 만지다. 어떤 대상에 영향력을 가하려는 의도의 만짐을 의미... 뭔가의 표면을 만지는 것만을 의미하는 프셉랍하오(5584)와 구별됩니다." 이제 "pim."을 살펴보죠. 요한계시록 바로 다음에 있는 조디에이츠의 문법 코드입니다; 849페이지에서 pim이 "present imperative active 현재 명령형 능동태(80)"임을 알수 있습니다. 857페이지에서는 "현재 명령법. 능동태에서는 지속적이거나 반복적인 행동을 수반하는 뭔가를 미래에 수행하라는 명령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부정문은 뭔가를 수행하기를 멈추라는 명령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부정 명령문이므로 이미 일어나고 있는 뭔가를 멈추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발견할 수 있으십니까?
마리아는 이미 예수님께 매달려 있었고 예수님은 잡는 것을 멈추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야고보서 5:14 병든자가 있느냐?..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에서 기름바름은 무엇일까?
알레이포의 정의 (218) - "기름을 바르는것" (스트롱 사전); 그러나 "기름바름"으로 번역되는 또다른 헬라어 단어가 있는데, 크리오(5548)입니다 - "기름을 바르거나 문지르는 것, 즉 사무실이나 종교 행사에 봉헌하는 것" (스트롱 사전). 이 단어는 동사이기 때문에 시제도 살펴야 합니다, "apta" aorist participle active 부정과거 능동 분사. "부정과거 분사는 연속적인 행위가 아닌 단순 행위를 표현합니다...핵심 동사와의 관계가 일시적인 경우에는 통상 핵심 동사의 이전 행위를 의미합니다." (조디에이츠 p.851)
알레이포에 대한 관주들:
마 6: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막 16:1 [여자들이]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막 6: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눅 7:38 [...]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요 12:3 [...]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크리오에 대한 관주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
행 4:27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행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고후 1:21 ...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렇다면 알레이포와 크리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관주와 정의를 다시 보고 차이점을 정리해 보면: "알레이포"는 기름의 실제적인 사용이고 "크리오"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 당시의 기름의 실제적인 사용의 예화로(단어가 사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돌보아 줄때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기름을 치료 용도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제 단어 공부를 통해서 배운것을 야고보서 5:14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기름을 바르며"는 영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실제적인 것일까요?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어 시제인 부정 과거 분사는 "기름부음 받은 것"이 더 나은 번역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순서는 기름부음이 먼저고 그 다음이 기도입니다 ("주의 이름으로"는 기름 부음이 아니라 기도를 가리킵니다). 야고보서 5장은 장로들이 아픈 이들에게 약을 먼저 주고 주의 이름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안에서 실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아름다운 균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구절과 어울리는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 구절에서 각각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장의 주제는 무엇이고 권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해석이 이런것들에 부합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문맥은 우리가 구절을 올바르게 해석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줍니다. 문맥이 바로 열쇠입니다. 우리가 문맥 안에서 구절을 해석 했음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부분이 남아 있다면, 좀더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요 3:5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문맥상으로 여기에서의 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에서는 물 세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 세례로 이해하면 예수님과 니고데모 간의 대화 주제를 확 뒤 바꾸는 것이 되고 맙니다. 화제의 감작스런 변화를 주의하세요, 그것은 여러분의 해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단서 일 수 있습니다! 물은 양수를 지칭합니다, "물로 태어남"은 자연 출생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 이것은 세례에 의한 거듭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요? 만일 이것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구절이라면 그런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구절에 있는 그리스도를 믿음에 의한 거듭남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는 다르게 해석 해야만 합니다. 베드로는 청중들이 복음에 반응하는 한가지 방법으로 세례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세례가 거듭남을 위한 길이었다면 베드로는 어떻게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라고 쓸 수 있었을 까요?
먼저 우리는 “그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라고 묻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은 원래의 읽는이들에게 어떤 의미였는가?”라고 묻습니다; 나중에는 “그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자와 읽는이들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밤낮 사흘을”(마 12:40)은 특히 암스트롱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수요일 십자가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에 죽으셨다가 "제 삼일에 살아나야"(마 16:21)대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할수 있었을까요? "셋" 또는 "날들"의 정확한 의미는 명백한 모순을 설명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역사 이야기를 하나 나누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물양동이의 개수를 세는 것처럼(여섯개의 가득찬 물양동이와 반만 채운 양동이 한개를 일곱개라 세는 것처럼) 하루의 일부라도 하루 전체인양 날 수를 세었습니다. 유대인 방식으로는 하루의 일부라도 온전한 하루로 계산하고 각 날은 오후 6시에서 시작해서 오후 6시에 끝나므로, 금요일 오후 3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해서 1일, 금요일 오후 6시부터 토요일 오후 6시까지 해서 2일, 토요일 오후 6시부터 일요일 오전 5시정도까지 해서 3일입니다. 문화적 문맥 안에서의 해석은 우리가 곤란에 빠지지 않도록 해줍니다.
창 15:7-21. 역사적 문맥에서 보면 두 조각의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는 것은 아브라함 당시에는 계약을 진행하는 일반적인 방법 이었습니다.양쪽 당사자들은 그들의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파멸이 그들에게 일어 날 것이라는 맹세와 함께 쪼갠 고기 사이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하나님 만이 지나셔서 일방적인 언약을 만드셨습니다.
문자적인 언어는 문자적으로 비유적인 언어는 비유적으로 두세요. 그리고 특별한 의미를 갖는 관용구나 방언에 주의하세요.
마 6:23의 “악한 눈”.
규칙 1, "악한"과 "눈"의 정의 - 여기서는 별 도움이 안됩니다. 규칙 2, 문맥: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후 문맥과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려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대하고 있는 것은 히브리어 관용구, “악한 눈” 입니다. 이 관용구를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사용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마 20:15 "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 "악한 눈"을 갖는 것은 인색하거나 부러워하는 것에 대한 히브리어 관용구임을 알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으로 돌아가서 이런 이해가 어떻게 문맥과 완전히 들어 맞는지 확인해 보세요.
이 59:1 “여호와의 손이 짧지 않다;”
신 33:27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말일성도들은 하나님도 예전에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신체 부위에 대한 언급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확신시킨 다음에는 계속해서 우리도 하나님 처럼 될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한 강연에서 몰몬교의 지도자들은 이런 구절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월터 마틴(이단들의 왕국의 저자)을 도전했습니다. 그에 대하여 마틴 박사는 몰몬교도들에게 구절을 하나 더 읽을 것을 권했습니다: 시 91:4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월터 마틴은 “하나님이 사람이었음을 증명하는 여러분의 방법을 따른다면 하나님은 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몰몬교도들은 자신들이 우스꽝스러운 처지에 놓인 것에 웃어야만 했습니다.
풍유는: 각 요소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
모든 비유는 풍유다. 이것은 참일까 거짓일까?
몇몇 비유들은 풍유입니다, 예를 들어, 씨 뿌리는 비유는 풍유입니다: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가시덤불은 걱정과 욕심을 의미하는 등과 같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유는 풍유가 아니라 한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깨달음을 비유에서 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비유를 기반으로 모든 것을 말하려 한다면 왜곡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깨달음은 분명한 구절에서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가 그 구절을 설명한다면 좋겠지요.
눅 18:1-8 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이 이야기는 기도의 담대함을 설명합니다. 이것을 풍유로 풀어낸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될까요?
모든 종류의 갈등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하나님은 과부의 권리 보호에 주저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귀챦게" 합니다, 기타 등등.
눅 16:1-9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 비유의 핵심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풍유입니까?
청지기는 직분이 없을 때를 대비하여 자신의 직분을 사용한 단 한가지에 대해서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인을 속인 비 윤리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칭찬받지 않았습니다.
'성경 프로그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이블타임 핸드북 번역 - 3장. 프로그램 동작(개요와 요소들) (0) | 2017.02.20 |
---|---|
바이블타임 핸드북 번역 - 1장. 소개 및 2장.바이블타임 시작하기 (0) | 2017.02.20 |
바이블타임 도움말 번역 - 성경 공부의 기초들 (0) | 2016.09.28 |
바이블타임 도움말 번역 -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 (0) | 2016.09.28 |
바이블타임 도움말 번역 요령 (0) | 2016.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