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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말씀을 읽으며 나의 죄악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교회와 사회에 대한 기도가 절실함을 마음에 새긴다.
"예레미야 5장 9절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어찌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날이 갈수록 인간의 탐욕이 빚은 결과는 사회와 자연 모두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말에 많은 것이 담겨 있지 않은가 싶다. 부끄러운 과거와 현재의 욕망은 숨기고 자신의 목소리만을 높이고 싶어 한다. 계엄령 선포로 촉발된 내란 사태 가운데에서도 한국 교회의 이름은 부끄러움에 처해 있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 그 근원을 따라가다 보면 일제강점기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에 그 연결 고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글은 짧은 제목만 쓰고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냥 묵혀 놓았던 것이다. 2018년 9월 10일이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이었는데 80주년을 맞이하여 코람데오닷컴에 실린 기사를 읽으며 교회에서는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한국 교회의 부일과 배교를 구체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글로 내 생각을 정리해 보아야겠다고 결심했었다.
구약 성경을 읽으면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 과정에서 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향한 배신과 부패를 보며 강력한 경고를 받는데, 왜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강력한 채찍질을 가할 수 있는 한국 교회의 부패와 패역질은 그냥 외면하고 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우리의 부끄러움은 숨길수록 또 다른 죄악이 되어 발현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위의 그림은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사로 1938년 9월 12일 석간 3면에 실린 사진과 기사이다. 이틀 전인 1938년 9월 10일 아래와 같이 신사 참배를 결의하고 평양 신사를 찾아가 허리를 숙인 교회 대표자들의 모습이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도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끊임없이 육신의 욕심에 무너져내리는 부끄러운 내 모습 같아서 슬프다.
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려행(勵行)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있어서 총후(銃後) 황국 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한다.
소화13년(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위의 기사는 1938년 9월 14일 매일신보에 실린 것으로 서양인 선교사들이 총회의 결의가 장로교 헌법에 위반되고 성경에 위반된다는 것을 총회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보도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그 손을 뿌리친 것이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강압과 폭력으로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 했다는 변명은 개나 줘버리라고 해야 할 듯하다.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모습이 확연하다.
위의 기사는 1940년 9월 4일 매일신보에 실린 "평북 벽동 예수 교회 일동 애국일에 신사 참배"라는 제목의 글이다. 일부 목회자가 아니라 교회 전체가 신사참배에 나서고 그 수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는 말에 마음이 처참해진다.
물론 신사 참배 거부 운동으로 2백여 교회가 폐쇄되고 2천여 명이 투옥되었으며 오십여 명의 순교자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조선예수교장로회 소속 교회만 해도 2천 개가 넘었으니 그 수는 미미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위의 기사는 1939년 12월 14일 신한민보에 실린 "산정현 장로 교회 신사 참배 거절"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산정현 교회는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고난을 겪었던 교회이다. 그렇지만, 주기철 목사와 관련된 일화는 활용하면서도 당시 만연했던 교회들의 부끄러움에는 눈을 감는 외눈박이 시선으로는 현재의 우리를 제대로 볼 수 없다. 기사를 그대로 옮겨본다.
이번 평양 산정현 장로 교회의 신사참배 거절은 참으로 공경할만한 것은 그들이 참 교인인 까닭이다. 본래 참 교인은 다른 신을 섬길 수 없고 딴 주의를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국에 있어서 참 예수교인으로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또 딴 주의를 믿지 않으려면 고난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인의 영광이 매양 고난 가운데 나타난 것은 십자가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이르되 예수 교인의 정신이란 것이다.
참 예수 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에는 예나 지금이나 고난을 면할 수 없는 것은 대동소이하다. "복"만 외치는 삯꾼들이 판치는 것 또한 예나 지금이나 한 가지이다. 그렇지만, 교회 지도자들을 비판하기에 앞서 개인적으로 돈, 명예, 욕망이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 기록이 외면당하고 잊히지 않았으면 한다. 유무료 정식 교재로 발간되어 우리의 신앙 각성에 활용되었으면 좋겠다.
"야고보서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주여 한국 교회가 1년에 한 번이라도 신사참배 회개의 날을 정하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수면 위로 올리고 교회 공동체의 죄와 개인의 죄를 서로 고하며 참 경건과 거룩의 삶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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